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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만복사에서 저포 놀이한 이야기 만복사저포기 萬福寺樗蒲記 이생이 담 너머를 엿본 이야기 이생규장전 李生窺牆傳 부벽정에서 취해 놀았던 이야기 취유부벽정기 醉遊浮碧亭記 남쪽 저승을 구경한 이야기 남염부주지 南炎浮洲志 용궁 잔치에 초대받은 이야기 용궁부연록 龍宮赴宴錄 해설 《금오신화》를 읽는 즐거움 |
金時習, 열경, 매월당/동봉/벽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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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복사에 향 올리고 돌아오던 길이던가
가만히 저포를 던지니 그 소원을 누가 맺어 주었나. 꽃 피는 봄 가을 달밤 그지없는 이 원한을 술동이 열어 한 잔 술로 녹여 없애세. 복사꽃 붉은 뺨에 새벽이슬이 젖건마는 깊은 골짜기라 한봄 되어도 나비조차 아니 오네. 기뻐라, 이웃집에서 백년가약 맺었다고 새 곡조를 다시 부르며 황금 술잔이 오가네. --- 「만복사저포기」 중에서 이생은 거친 들판에 숨어 겨우 목숨을 보전하다가, 도적이 다 사라졌다는 소식을 듣고 부모님 사시던 옛집을 찾아갔다. 그러나 집은 이미 불타고 없었다. 최랑의 집에도 가 보니 행랑채는 황량했으며 쥐와 새들의 울음소리만 들렸다. 이생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작은 누각으로 올라가 눈물을 닦으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 날이 저물도록 우두커니 홀로 앉아 지나간 일들을 생각했다. 한바탕 꿈만 같았다. 이경쯤 되자 희미한 달빛이 들보를 비추는데 행랑에서 발소리가 났다. 멀리서부터 들려오다가 차츰 가까워졌다. 이르고 보니 바로 최랑이었다. 이생은 최랑이 이미 죽은 것을 알고 있었지만, 너무도 사랑하는 마음에 의심하지도 않고 물어보았다. “당신은 어디로 피난 가서 목숨을 건졌습니까?” --- 「이생규장전」 중에서 용왕은 좌우의 사람들을 시켜 한생을 모셔 오게 했다. 한생이 종종걸음으로 나아가 절하자, 그들도 모두 머리를 숙이고 답례했다. 한생이 윗자리에 앉기를 사양하며 말했다. “존귀하신 신들께서는 귀중한 몸이지만, 저는 한갓 가난한 선비일 뿐입니다. 어찌 높은 자리를 감당하겠습니까?” 한생이 굳이 사양하자 그들이 말했다. “우리와 선생은 음양의 길이 달라서 서로 통제할 권리가 없습니다. 용왕께서 위엄이 있으신 데다 사람을 보는 눈도 밝으시니, 그대는 반드시 인간 세계에서 문장의 대가일 것입니다. 용왕의 명이니 거절하지 마십시오.” --- 「용궁부연록」 중에서 기자 조선의 몰락을 직접 경험하지 않은 홍생조차 인간사의 무상함을 담아낸 시를 쓰자, 기 씨 여인은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인간이 ‘현실은 사라지기 마련’이라는 생각을 갖고 산다는 것을 인식합니다. 이건 슬픈 일이 아닙니다. 의외로 마음을 달래는 효과가 있어요. 깊은 설움과 허무를 겪는 이에게 ‘이건 나만 느끼는 감정이 아니다’라는 위안을 주지요. 부벽정에서의 만남은 기 씨 여인이 자신의 슬픔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됩니다. 나아가 홍생이 자신을 발견할 수 있게 유도하며 새로운 삶으로 가는 길을 열어 줍니다. --- 「《금오신화》를 읽는 즐거움」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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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과 저승, 용궁과 지옥을 넘나드는 기이한 이야기와
아름답고 낭만적인 시가 어우러진 다섯 편의 비극 이승과 저승, 용궁과 지옥을 넘나드는 기이한 이야기 다섯 편. 조선 전기의 학자 김시습이 쓴 한문소설이다. 김시습은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 이후 벼슬길을 버리고 평생 조선을 떠돌았다. 때때로 분노가 치밀면 미친 짓을 했고, 세상에 펼치지 못한 학식과 포부를 탁월한 글로 남겼다. 그 대표작이 《금오신화》다. 서해문집 청소년 고전문학 시리즈의 《금오신화》는 어려운 유·불교적 배경지식을 문장 안에 쉽게 풀고, 김시습이 인용한 옛이야기의 맥락과 낭만적인 시의 운율을 살리는 충실한 번역으로 고전의 멋을 전한다. 부처가 이어 준 기묘한 백년가약(〈만복사저포기〉), 죽은 아내와의 눈물겨운 재회(〈이생규장전〉), 달빛 아래 선녀와 주고받는 시 짓기(〈취유부벽정기〉), 쇳물 흐르는 저승에서 염라대왕과 펼치는 치열한 문답(〈남염부주지〉), 용왕의 초대로 신들과 더불어 즐기는 용궁 잔치(〈용궁부연록〉)를 묘사한 신비롭고 환상적인 일러스트는 이야기의 흐름을 한눈에 보여 주고 청소년 독자의 몰입감을 높인다. 허무한 결말에 숨겨진 새로운 삶으로 가는 길 《금오신화》 속 인물들의 사연은 안타깝다. 전란에 휘말려 어린 나이에 죽거나 뛰어난 글재주에도 과거 급제에 실패하고, 결혼도 하고 벼슬도 얻지만 한순간에 스러지거나 반란에 왕족의 신분을 잃는 식이다. 이 취약한 세상을 등지는 다섯 주인공의 선택은 언제든 훼손될 수 있는 삶에서 스스로를 구해 보겠다는 노력에 가깝다. 결말을 현실 도피로 보지 않는 이유는 이들이 다른 존재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양생은 귀신이 된 여인, 이생은 홍건적의 칼에 세상을 떠난 최랑의 영혼과 사랑을 나눈다. 홍생은 선녀와, 박생은 염라대왕과, 한생은 용왕과 교류한다. 초월적 인물과의 만남은 주인공이 운명의 짝을 얻는 순간이고 허망하게 잃은 연인을 되찾는 시간이다. 재능을 인정받아 신선이 되는 통로이며 불의한 현실을 어떻게 바꿀 것인지 논의하는 장이자 귀한 사람으로 존중받고 환대받는 경험이다. 무엇보다 이질적인 존재와 손잡고 살아가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게 되는 ‘변화’의 계기다. 《금오신화》는 인물이 특정 시공간에서 겪는 일을 묘사해 재미와 교훈을 주는 옛이야기와 비슷하지만, 인물의 삶이 뒤바뀌는 ‘사건’을 겪는다는 점에서 한국 최초의 고전‘소설’로 정의된다. 이 소설은 성공보다 실패가 더 많은 세계를 살아가는 미약한 인간이 쥐고 살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이야기한다. 그것은 타인과 함께하며 자신을 확장하고, 이 경험에 의미를 부여해 이전과 다른 삶으로 거듭나는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