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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구름 한잔 하실래요?/ 그의 유품은 냄새였다/ 얼음 판화/ 유리의 방/ 0416M7EDK1 주문이 밀려온다/ 그림 같은 풍경이/ 제비꽃/ 머리의 형식/ 바닥을 걸다/ 소沼/ 냄새가 지워진 저녁/ 말의 유적지/ 새 발자국/ 여진/ 세고비아/ 길의 매듭/ 오리배/ 눈부처 제2부 화각장/ 그 여자는 누구였을까/ 단풍을 쬐다/ 장마/ 재스민 캔들/ 자작나무 숲에서/ 종소리를 받았네/ 간이 맞지 않는 식탁/ 여전히 긴 오후/ 실리카겔/ 송홧가루 날리는 5월/ 잎 또는 입/ 지도에 없는 길/ 결로/ 달 속에 나를 두고 왔다/ 냉천동 살구나무 오거리 거울/ 적조/ 주소지에 물 자국이 마르면/ 소리 없는 혁명/ 저녁의 문장/ 그늘을 먼저 그리다 제3부 늙은 악어/ 염소가 오고 있다/ 먼지/ 아낙시비 아몰포 나비가 날아갔다/ 귀뚜라미 울음을 꺾어 왔네/ 물수건/ 돌확/ 빵이 부푸는 동안 장미가 졌다/ 지구 반대편에 앉아 뜨개질하는 여자/ 오후 세 시의 식탁/ 그릇/ 서리꽃/ 고드름 문장/ 가을은 겨울이 되고 겨울은 봄이 되었다/ 먼 섬/ 소골안 재개발단지/ 휘파람/ 번져가는 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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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긴 혀가 굳어 있다
끊어진 말미를 이어보려고 벚나무 이파리 두꺼운 물소리에 귀를 대고 있다 말을 닫고 귀를 열었다 빙판에 엎드려 나뭇잎 문양의 물소리를 건져 올린다 깊고도 시린 음각 무늬 침묵의 집에 오래 갇혀본 적 있다 추웠다가 차갑다가 아팠다 언제쯤 미끄러져 넘어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계절 어디쯤에서 깨질지 모르는 불안한 걸음 갇힌 말들이 섬세한 잎맥을 따라 물을 조각하고 있다 ---「얼음 판화」중에서 흙 묻은 작업화 한 짝이 먼저 떨어졌다 더는 밀려 내려갈 바닥이 없어 밀어 올릴 수밖에 없는 허공 오랜 실업의 날들은 늘 언덕 위 구름 부피가 궁금했다 구름 한잔 하실래요? 내려올 수도 올라갈 수도 없는 지점 올라갈수록, 손에 잡힐 듯 멀어지는 구름 한잔 편대를 짜고 날아가던 새 떼의 행렬이 갑자기 흩어졌다 어떤 기미처럼 층층의 방들이 방들을 밟고 구름사다리를 오르는 현장에서 그는 작은 너트 녹슨 너트 하나가 빠졌을 뿐이다 동백꽃 하나 떨어져도 동백나무가 울지 않는 것처럼 꾸덕꾸덕 말라가던 콘크리트 바닥이 바닥을 껴안는다 온몸으로 꾹 눌러 찍은 음각, 생의 낙관 오늘 저녁은 소주 한잔 어때요? 아내의 목소리가 작업복 주머니 속에서 구겨지고 있었다 ---「구름 한잔 하실래요?」중에서 의뢰인의 목소리는 깊고 어두웠다 보내온 주소는 내비게이션에도 나오지 않는 차가운 습지였다 막다른 골목은 민들레꽃 환했다 꽃잎에 앉아 수평을 잡다가 날아가는 흰 나비의 시간이 고양이의 푸른 눈에서 잠시 출렁였다 혼자 죽은 사람이 남긴 주소는 대체로 문자가 아니라 사물이라고 누군가 말했다 옷걸이가 걸치고 있는 뒤섞인 계절과 뒤꿈치 다 닳은 끈 풀린 운동화 마지막 눈빛을 받아 주었던 꽃무늬 벽지의 썩은 향기를 죽죽 찢어 구겨 넣었다 모두 세 자루로 묶여 생략되었지만 담요 위에 웅크렸던 그의 구겨진 잠은 뜯어지지 않았다 끝까지 태아의 자세로 돌아가고 싶었던 그의 간절한 그곳, 아직 이곳 냄새의 소유권이 완강했다 마지막까지 움푹 꺼진 자국에 고여있던, 무릎과 가슴이 껴안은 체온은 메아리처럼 멀어지는 새소리로 식어갔다 자목련 꽃봉오리에 부리를 밀어 넣고 노래를 훔쳐 간 동박새는 가지로부터 가장 멀리 날아가 허공에 멍 같은 울음을 남겼다 다시, 잔설이 남아 있는 곳으로 봄이 풀려가고 있어도 바깥을 열고 나간 방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예 없었던 것처럼 ---「그의 유품은 냄새였다」중에서 며칠째 밀린 잠을 자고 있다 그는 무기수다 탈옥을 시도하다 붙잡혀 형량이 늘어났다 잔설 사이 꽃을 찾으러 나섰다가 들켜 잠속으로 도망쳤다 집중 감시당하는 잠 보초병들의 물 샐 틈 없는 경계 일정한 간격으로 맥박을 짚어 보고 체온을 재고 간다 잠의 근원지를 찾느라 온몸을 수색 중이다 보호자가 넣어 주는 영치금으로 산소를 사고 혈액을 구해 잠속에 숨어 있다 면회 시간마다 가족들은 그의 귓속으로 젖은 목소리를 흘려 넣는다 눈꺼풀이 가늘게 떨리고 차고 습한 감옥 콘크리트 벽 한쪽에 잃어버린 열쇠처럼 이슬 한 방울 맺힌다 ---「결로」중에서 분나무*에 가을이 들면 붉어진 그 잎 곁에 자꾸 쪼그려 앉았다 은근하게 불씨가 번진 잎맥을 따라 시린 손 쬐고 있으면 심장에 낀 살얼음도 가만히 풀렸다 꽃을 좋아하던 그는 구절초가 지고 허전해진 뒤란에 모닥불 몇 가지를 피워놓았다 이름부터 향기롭고 따뜻한 나무 찬바람을 맞을수록 붉게 익었다 나는 나무 밑에 떨어진 불씨 몇 개를 골라 책갈피에 온기를 꼭꼭 눌러 놓곤 했다 하지만 계절을 물들이던 목록 하나, 둘 사라지고 그가 떠나간 뒤 아무리 방을 따뜻하게 덥히고 앉아 있어도 녹지 않는 지점이 생겼다 집보다 먼저 사라진 뒤란에 썩은 분나무는 숯덩이 같은 그루터기만 안고 있다 언제쯤의 가을이 책갈피에서 떨어져도 나에게는 더 이상 손을 쬘 나무가 없다 * 경기 화성 지방에서 쓰는 붉나무의 방언 ---「단풍을 쬐다」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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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인혜 시인은 책을 좋아하는 언니 오빠들 틈에서 자라며 동화책과 동시집을 사다주곤 했던 성장기를 통해 자연스럽게 시를 쓰게 되었다고 하는데 삶과 죽음에 대해 천착하게 된 계기를 이렇게 전한다.
“인간은 누구나 생명의 유한성에 대한 불안과 공포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삶과 죽음의 공존성과 순환성을 나는 아주 일찍부터 예민하게 인지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건 일찍 아버지를 여윈 슬픔으로 부재와 상실이라는 인식과 뒤이어 태어난 조카의 존재가 당시 나를 삶과 죽음의 혼란에 빠지게 한 충분한 이유가 되었어요. 그리곤 잠재의식처럼 나의 평생 화두가 된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죽음의 어둡고 무거운 배경과 생의 찬란함, 죽음 같은 응달과 빛의 광휘로 가득한 양지는 아이러니하게도 한 공간에 존재했었기 때문이죠. 행과 불행 또한 그렇지 않을까요? 이러한 인식이 어렵고 불안한 미래를 위로하는 테마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오민석 문학평론가는 해설을 통해 “허인혜는 “갇힌 말들”에 대한 명상을 통하여, 즉 죽음에 대한 궁구를 통하여 그 대척점에 있는 해방된 말들, 생명의 약동을 지향하는 시인이다. 그녀의 언어는 죽음의 여울을 돌며 타자를 향하여 번져간다.”고 말하고, 안도현 시인은 추천사를 통해 ”시적 주체가 자기 과시와 치장을 통해 대상을 흡입하는 게 아니라 입을 다문 대상에게 말과 감각을 부여함으로써 떨리는 서정에 이르게 하는 기법”이라고 말한다. 시인의 말 오래 연모해 온 집터 하나 있었습니다. 그곳에 거처를 마련하려는 꿈으로 낡은 청약통장을 들고 무주택자로 오랜 세월 떠돌았습니다. 분양받은 새집, 문패의 질량 눈썹보다는 무겁고 눈꺼풀보다는 가볍습니다. 잠은 끝없이 시집 속의 이야기를 부양합니다. 2022년 가을 허인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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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갇힌 말들이 섬세한 잎맥을 따라 물을 조각하고 있다”라고 썼다. 나는 이 말을 바꾸어 이렇게 써 본다. 숨어 있던 말들이 미세한 감각의 길을 찾아 자신의 존재를 찾고 있다, 라고. 시적 주체가 자기 과시와 치장을 통해 대상을 흡입하는 게 아니라 입을 다문 대상에게 말과 감각을 부여함으로써 떨리는 서정에 이르게 하는 기법. 작고 사소하고 가여운 것들에게 보내는 연민의 시선은 딱딱한 콘크리트 바닥에도 음각의 ‘생의 낙관’을 새긴다. 이때 낙관은 생의 마지막 장면에 찍는 ‘落款’이면서 남겨두고 가는 생을 위한 ‘樂觀’이기도 하다. 이 시집 속에는 “습기의 단어들이/맑고 정하게 찰랑거린다”. 허인혜 시인은 풍경과 사물에 깃든 물기를 찾아내는 것을 시업의 목표로 삼고 있는 듯하다. 물은 긴 혀를 가지고 있고, 나뭇잎 모양의 물소리도 있으며, 긴 머리카락은 빗줄기를 닮아가고, 내 그림자를 물결이 핥아주고, 그늘에 고인 것은 먹물이다. 그늘의 습기를 더 키우고 키워 강물의 두꺼운 물결로 출렁이시길. - 안도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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