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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비 오는 날/ 고인돌/ 홍교 위를 걷다/ 모래의 꿈/ 검은 모래의 기억 ― 만성리 해수욕장/ 여수麗水/ 사철소를 찾아/ 오동도 ― 동백 아가씨의 꿈/ 석인石人의 노래/ 모멘트moment/ 달빛 아래 목련 식당/ 종명산 제2부 갈치/ 작심 게장/ 장어탕 이야기/ 그 계절의 독서법/ 어떤 이유/ 눈사람/ 미뢰의 바다/ 봄, 소리로 오다/ 당신의 밥상/ 여수, 겨울의 맛/ 산수유/ 상실의 시대 제3부 여름의 시간/ 오래된 도서관/ 마이산/ 나의 누이야/ 차마/ 봄날/ 오래전 그대를 위하여/ 연리지 서 ― 청도 운문사에서/ 나무의 수화/ 해인사 장경판전의 각수/ 선운사, 송악/ 통도사 제4부 벌판 위에 홀로/ 둔병도/ 적금도/ 대두라도 후박나무의 독백/ 조발도/ 낭도에서 불을 지피다/ 호모에렉투스를 기억하다/ 그리운 방/ 매운, 기억/ 소금꽃/ 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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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집이 좋아
창문 하나 없는 벽에 귀 기울이면 이야기 소리 들려오는 울타리도 없고 대문도 없고 커다란 지붕만 하나 얹은 당신의 집 오랜 세월 고요한 이끼에 싸인 당신의 집에 기대면 청동거울에 비친 하늘이 쨍하고 반짝이는 소리 민무늬항아리에 차르륵 곡식낟알 쏟아지는 소리 돌화살촉이 들판을 가르며 바람을 일으키는 소리 하늘과 강, 들판의 소리들이 울타리 없는 당신의 집으로 속속 들어가 앉아 글자 없는 이야기책을 만들었는지 몰라 삶과 죽음을 한 몸에 품던 동검의 날이 비파형으로 잠든 곳 돌을 떼어 쓰는 일상이 역사가 되어 웅장한 지붕이 된 곳 켜켜이 쌓인 이야기들이 너무 가볍지 않게 너무 무겁지 않게 등을 내주는 당신의 집 들판을 마당으로 끌어들여 누구라도 잠시 이야기를 듣고 갈 수 있는, 여기 산수리 신대마을 왕바위재에 터를 잡은 당신의 집에는 지금도 작가미상의 이야기들이 하루종일 새어나오고 있어 ---「고인돌」중에서 온몸에 살얼음이 꼈어요 조금만 움직여도 서걱서걱 혈관을 타고 돌아요 태생부터 피의 균형이 잘못된 나는 하루하루 백혈구 수치에 목메었어요 사람들은 나의 동글동글한 웃음과 하얀 몸을 사랑하죠 눈이 오면 신이 나서 나를 굴려 양지바른 곳에 두려 해요 그런데 어쩌죠 난 처음부터 눈밭을 굴러서 태어난, 사람 나무의 머리채를 잡고 흔드는 북풍과 가녀린 새의 발목을 잡는 차가운 눈발이 나의 탯자리인 걸요 이 살벌한 눈밭에서 백혈구 수치를 높이는데 온 힘을 쏟아야 해요 사람들이 주는 잠깐의 친절은 내게 큰 도움이 되지 못해요 살을 에는 추위를 견뎌야 내가 살거든요 달달달 치가 떨리는 영하의 추위가 나의 계절이거든요 새벽에 눈 떠 허허벌판에 혼자 서 있어도 두 눈 질끈 감고 따뜻한 남쪽을 지워야 해요 눈발이 그치면, 눈발이 그치면, 세상 가뭇없어요 그런데 가만 거기 눈발 속에 서 있는 당신 혹시 당신도? ---「눈사람」중에서 구비쳐 온 길들이 바다와 마주치고 바다는 또다시 수평선 밀어내며 먼 길 떠나고 여수는 보이는 곳마다 계단을 만든다 한 걸음 한 걸음 작은 걸음으로 비탈에 길을 낸다 그 길은 손바닥만 하기도 하고 그 보다 작기도 하다 층층이 작은 계단에 물을 대고 햇살을 들이면 계단은 어느새 작은 둥지가 된다 구비쳐 온 길이 힘든 당신, 작은 계단들이 옹기종기 둥지를 튼 여수로 오시라 지친 날개 잠시 접고 햇살과 바람과 파도가 길을 낸 여수에서 마음 안 계단을 살며시 밟아보시라 그러면 당신과 출항을 준비하며 층층이 푸른 깃발을 단 바다를 볼 수 있으리라 ---「여수麗水」중에서 게장 백반을 먹으러 가는 길에 ‘작심 독서실’ 간판을 보면서 우리들 ‘작심삼일’이 생각나 한참을 웃었다 작심삼일作心三日, 저 이름을 거리에 건 이는 누구일까 마음을 단단히 먹는 일이 얼마나 어려우면 유효기간이 삼일일까를 생각하며 작심에 대해 우리는 작심한 듯 열변을 토했다 밥상 위 간장게장은 작심하고 우리 앞에 딱지를 벌리고 누웠다 거친 바다를 몸으로 막아내던 그 딱딱한 등딱지를 얇게 삭혀 내린 간장게장에서 작심한 듯 짭조름한 향이 났다 마음 단단히 먹고 덤벼야 하는 세상이라면 아무래도 나는 백전백패 단 한 번의 승리도 없을 것이다 돌아서면 금방 물렁해지는 마음 안쪽, 나도 작심하고 나를 다 내려놓을 것이다 물렁해지지 않으면 스며들지 못하는 세상, 물컹물컹 건너다보니 한 세월이 다 건너간다 제 살과 껍질 내려놓은 간장게장 작심이 입맛을 돋우는 저녁, 물러지지 않고는 서로에게 닿을 수 없는 마음과 마음, 그렇게 한 세상 저물어도 좋겠다 ---「작심 게장」중에서 맥이 느려 수면내시경을 할 수 없다는 의사는 생으로 내 목구멍에 긴 호수를 집어넣었다 어떤 그리움도 남아있을 것 같지 않던 세상이 순간 침을 질질 흘리며 자꾸만 헛구역질을 해댔다 내게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지병이 있다면 잠에서 깨는 순간 낯선 행성에 홀로 서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동안 숨을 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절박하게 지구의 창을 두드리며 발랄했던 아침 창가 새라든지 밑줄 그으며 읽던 책이라든지 아가하고 부르던 엄마의 목소리 후드득 빗방울을 타고 올라오던 흙내음 같은 것들을 불러 세웠는데 꽃같이 붉은 심장이 펌프질을 하던 순간부터 모든 그리움 속에 숨어있는 적멸을 예감했을까 붉디붉은 꽃 속에 숨어있는 칠흑의 순간에 한 호흡 한 호흡 내세워 세상을 걸었을까 눈물 콧물 쏟아내던 호스가 길게 몸을 관통해 나오고 나는 얼룩진 얼굴을 닦으며 그리운 영혼들을 새삼 심장 위에 올려 생의 순간에 말을 걸어오던 것들을 지긋이 눌러본다 다행히 그 영혼들이 아직 내 얇은 손바닥을 울리며 뛰고 있다 또다시 낯선 행성에서 잠이 깨겠지만 그때마다 사무치게 창을 두드리겠지만 꽃 같은 내 심장이 두근두근 부르는 그리운 이름이 있어 이 생의 호흡을 다시 가다듬는 것이다 ---「어떤 이유」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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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詩 다시 태어나도 그 손 잡겠습니다 2022년 늦가을 박혜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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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는 인간을 존재의 의미가 드러나는 존재자, 즉 현존재라고 말한다. 존재에 대한 탐구는 곧 인간에 대한 탐구라 단정하고 있다. 박혜연은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 인간과 인간 사이에 상상을 펼쳐 정중하고 격식 있게 존재의미를 풀어내려 한다. 대상과 현상의 본질을 훔쳐 자존을 세우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존재의미와 가치를 드러내려 몰입한다. 그러므로 시 속에 스스로를 용해하여 넌지시 던져놓을 수밖에 없다.
그에게 시는 그 자체로 자존이 된다. 진심으로 자신을 만나기 위한 함축적 질문과 함께 실존의 처음을 궁금해 하고, 자신만의 개성적 어법으로 세계의 본질을 하나하나 밝혀낸다. 작정하고 자신의 어법으로 존재의 본질을 들여다보는 철학적 메시지도 그렇지만 인문학적 따뜻함을 끝까지 잃지 않는다. 그의 시가 단정하면서도 살갑고, 지적이면서도 서정적이고, 냉철한 분석이면서 따뜻한 시선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 신병은 (시인, 문학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