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제1부
달력을 보며/ 집을 깨우다/ 시의 부엌/ 바느질/ 당산 할매/ 정상 가동/ 대보름/ 겨울 빨래/ 궁민의 힘/ 저녁에서 아침 사이/ 다시 봄/ 접接/ 그 사월/ 투표소에서/ 어떤 양곡관리법 개정(안)/ 진달래 제2부 젓 누름돌/ 나는 낡은 것이 좋다/ 착시/ 옛길/ 아이스크림을 사는 이유 / 옮겨가다 / 순치/ 되묻다/ 연습/ 첫추위/ 빙점/ 봄으로 가는 구멍 하나/ 다짐/ 밥심/ 회상 제3부 결기/ 육자배기/ 귀가/ 채송화 예보/ 노래/ 참깨 / 손님/ 때왈/ 문턱 각시/ 아주 오래된 경운기/ 휴식/ 흘러간다/ 한 생애라는 것이/ 이름/ 무의 계보/ 순환 제4부 꽃가루 비염/ 월하月下/ 꽃은 무엇으로 피는가/ 내 안의 멀구슬나무/ 산딸 꽃/ 청춘/ 이런 사랑 / 구월/ 선유仙遊/ 언저리에서 사무치다/ 새벽(에/ 망중한/ 마루에서 생각하다/ 메밀밭 이야기/ 설 |
박형진의 다른 상품
|
복숭아나무 가지에
우편함을 걸어놨습니다 꽃봉오리 부풀 때 괜히 마음도 부풀었습니다 그러고 말았지요 사는 일이라는 게 언제나 매일반이라고 꽃이야 무심한 듯 피고 지는데 제멋대로 피고 지는데 재채기 한번 크게 했습니다 봄이 움찔합니다 --- 「꽃가루 비염 전문」 중에서 정지 방 아궁이에 불을 지핀다 먼동에 샛별이 뜰 무렵 잠든 집을 깨우려는 것이다 아니 집은 이미 첫닭울이에 깨서 어수선한 꿈으로 뒤척이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박형진 시집_ 시의 부엌 03 일어나 뒤늦은 도량석을 하고 무슨 성스런 의식인양 불을 댕기면 집은 기다렸다는 듯 코를 벌름거리며 찬 하늘에 연기를 뿜어낸다 그것이 저 먼 길 날아가는 기러기의 좌표쯤이나 되었으면 그러나 이 산골 나지막한 오두막 가느다란 연기 한줄기가 높고 쓸쓸한 것들의 위로가 되랴 차라리 언 땅에 낮게 더 낮게 깔려서 한 목청으로 여기저기 재채기를 해대면 조여 오는 새벽냉기는 풀어지겠지 어린나무 꽃눈들 잠이 깨겠지 --- 「집을 깨우다 전문」 중에서 바늘을 잡고 앉으면 마음이 편해진다 나무를 패느라 조금 전까지 도끼를 잡은 손 도끼질과 바느질은 같은 것이다 놀랍게도 바늘은 도끼질 몇십 년에 닳고 닳아서 된 것이라 박형진 시집_ 시의 부엌 04 무겁기 그지없다 자칫 살을 찌를라 신경을 곤두세우고 내리치면 갈라지는 이 추운 날의 흔적들 한 땀씩 꿰매노라면 어느새 마음이 따뜻해진다 모처럼 바늘을 잡은 김에 첫눈이 내리는 날 만나자던 약속을 흥얼거리고 고개 들어 슬쩍 먼 산을 건너다보면 한 손에 걸레 잡고 한 손에 행주 쥐고 방과 부엌을 오가며 살림하느라 종일 고단했을 마누라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잠이 들었다 그도 한쪽 터진 삶이 숨겨져 있지 창밖엔 어느덧 눈이 오는데 이불을 덧대 기워주고 싶다 --- 「바느질 전문」 중에서 같은 곳을 바라보며 가는 도반이다 스물다섯 번의 하안거를 보낸 그의 몸 구석구석에선 금방이라도 하얗게 빛나는 쇠 구슬사리들이 쏟아질 것만 같다 마지막 해제일지도 모르는 날들을 묵은 산밭에 길을 내는 그 적막을 깨는 쇠잔한 기침 소리가 견뎌내야만 하는 침묵의 시간 들을 토막토막 나누어 놓았다 오래지 않아 단전 깊은 곳에서부터 온몸을 타고 번지는 열기 삶의 가장 뜨거운 순간이 어쩌면 생의 마지막일지도 몰라 묵연히 서로를 바라보는데 박형진 시집_ 시의 부엌 05 밭둑 감나무 밑을 지나가는 서풍 한 줄기 --- 「아주 오래된 경운기 전문」 중에서 돌에도 사연이 있다 폐사지에 남아있는 주춧돌이거나 깨어진 빗돌 혹은 어느 릉의 둘레석을 가져다 사람 밟고 다니게 다리를 놨다는 것들과 함께 아름답지 않아도 증언되는 역사를 더 말해주는 돌도 있지만 여기 됫박만 하게 크고 동글납작한 돌 하나 있음에 귀를 기울여라 이 돌은 흙 속에 묻혀있는 귀하게도 될 돌들과는 달리 어느 바닷가에서 세상의 수많은 이야기들을 싣고 오는 파도와 수수백년 고독한 대화를 나누며 스스로 둥글어진, 그러다가 귀머거리 삼 년 봉사 삼 년 벙어리 삼 년 살이 하던 우리 할머니와 합이 맞아 기꺼이 뒤란 장독대 황숭어리 젓독에 들어와 앉게 되었던 바 처음엔 그렇게 시작했겠지 그리고 그 담부터는 해마다 풀치젓 고너리젓 밴댕이젓 새비젓 왼갖 젓갈이 된 놈들 푸르딩딩한 눈탱이를 찍어 눌러서 한철 곰을 삭혔는데 그 젓갈들이 한여름 더운 밥상에 짭조름한 간이 되어 농군들 울뚝불뚝 일하게 하려고 한 대도 몇 대씩 대물림될지도 모르는 열탕지옥 같은 젓독 속의 시간을 누군들 견뎌낼 수 있겠느냐 말이지 흔히 하기 쉬운 말로 돌부처 같다느니 목석같다느니 하고 속내 뻔하기 마련일 사람에게 빗대기도 하지만 박형진 시집_ 시의 부엌 06 이 젓돌이야말로 숭앙받는 부처에 견줄만큼 ---「젓 누름돌 전문」중에서 |
|
작가의 말
조울증도 없으면서 젊어서부터 내 감정은 늘 결핍과 과잉 사이를 오갔다. 내가 시를 쓰는 것은 이 두 감정의 봉우리에 외줄을 걸고 연필 하나를 장대 삼아 위태위태하게 한발씩 내딛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떨어지려는 중력과 앞으로 나아가려는 관성은 서로 부딪치기만 해서 언제나 나를 어지럽게 했는데 돌이켜보면 역설적이게도 그 지점에서 생겨났던 이야기들이 줄 위에서 겨우겨우 균형을 잡게 했던 것이었음을 알겠다. 그래서……이제, 어디쯤 건너가고 있는가? 눈도, 마음의 눈도, 제발 더는 어두워지지 않기를! 다시 시집을 내려 하니 뭐라 말할 수 없는 감정들이 솟구치는 것을 막을 수가 없다. 시집이 나오기까지 멀리서 또는 옆에서 힘써 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2026년 봄 박형진 |
|
박형진은 내가 좋아한 사람이다. 나이 들어가며 모난 불편들을 농사로 다듬어 간수하고 묵히며 오래된 바닷가 집에서, 오랜 세월 사용한 마을 말을 버리지 않고 그 말로 시를 쓴다. 박형진의 시를 읽어 가노라면 우리들의 도회적 세련과 세계를 누비는 명품(?)들이 무엇인가를 빼먹은 말이라고 경고하기도 한다. 모항 바닷가 작은 오두막 ‘시의 집 한 채’는, 그 존재가 막강한 아름다움이다. - 김용택 (시인)
|
|
왜 박형진의 시는 서정과 생명만으로는 부족해서 사람의 몸 어디를 꼭 시리고 저리게 하는 걸 보태는가. 아무도 없는데 제가 살고 있어서 그렇다. 간혹 불 앞에 앉아서 운다. 견딘다. 푸르게 피어나고 자라는 것들에 마음을 뺏기며 버틴다. 그리고 쓴다. 또 쓴다. 시가 흰 눈처럼 내리고 쌓인다. 내가 이 시집의 원고를 읽으며 어찌 시리고 저리지 않겠는가. - 김영춘 (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