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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강의 심장을 훔칠 수 있을까요
자연주의적 에로스/ 새들이 날지 않던 날/ 어떤 감정에 대하여/ 당신에게만 좋은 사람이고 싶어요/ 심천역에서/ 냥이의 괜한 사관史觀/ ~스럽다는 게 가벼워지도록/ 관계/ 반달/ 끄트머리에서 지탱하는 힘/ 순환/ Alt+s(저장하기) 제2부 호박 속처럼 환해야 수상한 평행이론/ 우리 애인/ 이별에 대한 적분/ 천천히/ 흰 구름에 부시다/ 진화 혹은 퇴화/ 물그림자/ 첫눈이 새봄에 내린다면/ 자기가 만들어지기까지/ 모모를 찾아서/ 착각/ 아포리즘에 반反한 저녁/ 모과나무 묘비명 제3부 뿌리들 안으려면 잡곡밥/ 눈이 큰 아이/ 큰 바위 얼굴 / 안주를 감추다/ 염소와 엄마/ 영자 언니/ 염전/ 바오밥나무에 감꽃이 피어날까/ 다락/ 아이스크림이모가 사막에서 사는 법/ 가을 소나기/ 냉이와 방정식/ 무당벌레, 날개를 접다/ 촌놈/ 마루와 함께 한 겨울/ 당신의 손 제4부 우리가 되어야 한다는 입술/ 꽃먼지 1/ 그만하자/ 꽃먼지/ 강여울에 등을 기대다/ 봉숭아/ 미루나무/ 설화가 열리는 마당/ 겨울나무를 실은 종점행 버-스/ 속리俗離 가는 길/ 담쟁이 넝쿨에게/ 구두/ 내 집 앞에 매화가 피어있다는/ 봄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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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을 알 수가 없다 씨 뿌리지 않은 독초처럼 자라나 어느새 전신을 마비시켜 버린 두려움마저 새롭지 않다 메두사의 섬광을 본 듯 순식간에 생겨난 실금들로 이루어진 오래된 무늬들 차라리 썩 잘 어울리는 낙관, 회색 조의 그림이 되어 견고한 성벽을 장식한다
아마도 그랬던 것 같다 옅은 불빛마저 꺼진 뒤 영화가 시작되기 바로 전 찰나의 적요 어둠에 익숙하기 위해 혹은 새로운 빛에 적응하기 위해 가졌던 눈 깜빡임 그러했던 때가 흐릿한 기억이지만 있긴 하였다 하지만 지금 파괴의 본능조차 묻어버리는 아득한 눈의 깊이 떼어내고 씻어낼수록 그리움의 눈곱은 덧대어지는데 바람 거세던 유년의 기억 속 몇 날 며칠 동녘을 밝히던 원인 모를 산불 번져가듯 얼마간 휘감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다만 소리 없이 누군가 건너와 주기를 이 너머로, 그럼에도 다시 또 익숙하게 내려지는 블라인드 캄캄한 밤하늘에는 어제도 오늘도 먼 별들이 총총하다 ---「어떤 감정에 대하여」중에서 너를 만날 때마다 반짝이는 강돌을 하나씩 삼켰어 내가 삼킨 건 복사꽃 그늘에 살던 아기뱀 몸 안에서 점점 자라나 근질거리는 이빨로 심장을 깨물거나 울컥 독을 쏟아내곤 했지 그러한 저도 많이 아플 거라 한 번씩 꺼내어 놓아주려 해도 차마 떠나가지 못하는 토막 난 어둠 꽃잎처럼 흩날리더라 언제까지나 너의 중심에 들어앉아 촘촘히 사랑할 거라 새겨둔 저 깊은 고요 내가 삼킨 건 등받이가 부서진 벤치였나봐 내려앉거나 올라서던 잿빛 불안들 기어코 레일 위를 달려와 길들여진 모든 건 언젠가 사라진다는 바람의 비문을 속삭이지만 예정된 이별에 잠들지 못하는 간이역 이따금 열차가 멈출 때면 내 안의 강돌들 온몸을 기울여 까맣게 잊었던 기적 소리를 듣기도 하더라 ---「심천역에서」중에서 새벽녘 안개는 잠시나마 경계의 시간을 한 덩어리로 뭉쳐놓는다 허락된 순간 저저금 뿌려진 씨앗들이 깨어나기 전 찬란한 어둠의 꼬리를 물고 빛의 탐스러운 꼭두머리를 잡아 하강 혹은 비상을 준비한다 어섯눈을 틔운 시클라멘 이파리들이 몇 잎 간당간당 자라고 있다 행여 마를 새라 혹여 알뿌리가 썩진 않을까 흙도 나도 날마다 눈을 맞춘다 세상의 중심인 양 꽃대가 올라오면서 그나마 시늉만 하던 잎들은 둥근 재생의 공간 속으로 숙명인 듯 들어서고 있다 서늘한 정적이 흐른다 꽃대는 애도의 몸짓으로 내처 고개를 숙인 채 자신이 피어날 때를 기다리고 있다 잎들을 보낸 꽃대가 비로소 꽃으로서 그 도도한 호흡을 유지하던 한 달여간 사라진 잎들의 태동 소리를 나는 듣지 못하였다 마침내 뿌리의 복부가 불러올 즈음 단 한 번도 펄럭여 보지 않았던 기나긴 날개깃을 꽃은 기어이 접고 말았다 ---「순환」중에서 딸아, 둥근 내 딸아 가을볕 쨍한 날 속 좋은 호박 썰어 잘 말려 두었다가 정월 대보름, 들기름에 달달달 볶아 먹으면 휘영청 달 밝은 날에 먼 길 떠날 수 있다 하더라 그믐날 죽으면 어때서 그래 덩굴져 허공을 오르던 우리네 그저 감감하기만 하던 앞날이었지만 호박꽃 같은 달빛 아래서라야 보내는 이도 돌아가는 길도 환하게 이어질 테니 ---「수상한 평행이론」중에서 쿵 이제 그 누구도 허락지 않으련다 햇살의 오해 가득하던 세계를 떠나 녹슨 비명과 함께 여기 누웠다 놀라지 마라 둥근 잎사귀들 사이 이지러진 달로 태어나 아주 드물게 운 적 있다만 더 낮은 곳으로 향한 모든 얼룩 사랑 때문이었다 ---「모과나무 묘비명」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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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작가마당》신인상으로 등단한 임정매 시인의 첫 시집 『수상한 평행이론』이 도서출판 애지에서 나왔다. 이 시집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관계’이다. 관계는 탄생하고 소멸하는 순환과정을 겪으며 기대와 고통, 기쁨과 슬픔을 딛고 개인의 역사를 만들어간다. 두려움과 그리움이라는 상반된 감정으로 이루어가는 크고 작은 범주의 관계들, 앞날이 캄캄할수록 사람을 품어 안으며 살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이웃들, 이름도 없이 역사 속으로 스러져 갈 들풀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간절하고 순정한 눈빛으로 형상화한다. “찬란한 어둠의 꼬리를 물고” 하강 혹은 비상을 준비하는 새벽녘 안개와 세상의 중심인 양 꽃대를 올리면서 둥근 재생의 공간으로 들어서는 잎들의 숙명을 그리며, 시인은 “실금들로 이루어진 오래된 무늬들”과 “녹슨 비명” 너머 사람이 사람을 품는 서정의 세계로 이끈다.
표제작 「수상한 평행이론」은 삶과 죽음의 관계에 대한 어머니의 수상한 이론을 간결하면서도 섬세한 감각으로 그려낸다. 무병을 앓던 어머니는 무녀의 삶이 아닌 어머니의 삶을 선택하며 고명딸에게 그 병이 이어질까 노심초사 세상살이 방편을 일러주셨다고 한다. 낮은 꽃잎 하나 지나치지 못하고 예쁘다 말해주는 감성과 절기를 읽는 특별한 이성과 대보름날에는 말린 호박을 들기름에 볶아 꼭 먹어야 하늘로 되돌아가는 날이 보름날이 될 수 있다고, 보름달이 뜰 때라야 장례를 치러주는 사람들의 길과 떠나는 자신의 길이 환하다는 말씀 등이 그것이다. 시인은 어머니의 ‘여자는 열두 폭 치마로 다 감싸 안아야 한다’는 수상쩍은 이론에 반발하면서도 단 한 사람의 길이라도 밝게 비추고 싶은 사랑을 보여주신 어머니가 시의 근원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감정에 대하여」는 사회적 관계를 맺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불완전하고 불안한 존재, 두려움과 그리움으로 누군가 자신에게 다가오길 기다리는 현대인의 감정을 그려냈고, 「심천역에서」는 관계 속에 내재 된 잿빛 불안들에 대해, 「새들이 날지 않던 날」은 “젖지 않고는 날 수가 없”는 새들의 쉼 없는 날갯짓을 응시하며 고통을 벼려가는 서정을 담았다. 「잡곡밥」은 단단한 콩 두 알에 담긴 땅의 철학을 읽어냈고, 「진화 혹은 퇴화」는 관계에 대한 시적 변화를 추구하며 질문과 사유의 장으로 확대한다. 해설을 쓴 이민호 시인은 “임정매의 시 쓰기는 ‘뜬 눈과 감은 눈(「흰 구름에 부시다」)’의 아이러니에서 비롯한다. 눈을 감아도 사물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는 익숙함과 눈 뜨고 있어도 거부할 수 없는 삶의 역정이 시에 담겼다. 이것을 바탕으로 이 시집은 중심과 중독, 강돌과 장미 가시, 보는 행위와 읽는 행위의 이미지가 짝을 이루며 움직인다.”며 “사물을 고요히 관조하듯 바라보기도 하지만 적극적으로 스며들어 파헤치기도 한다. 이러한 시의 변증법이 이 시집에 자리하고 있다.”고 적었다. 이경자 소설가는 “감춰야 한다고 해서 꾸역꾸역 싸 맨 관능들은 감춰지지 않아서, 문자로도 뜨겁고 순수하게 출렁거렸다.”고 말하고, 김병호 시인은 “시인이 선명한 그림과 조근조근한 속삭임으로 보여주는 정서적 연대기는 아름답다. 그리고 그림과 속삭임 사이를 오가는 솜씨는 좀 능수능란하다.”고 말했다. “사람은 강의 모습을 닮고 강은 또 사람의 모습이 되어 흘러갑니다. 저의 첫 시집을 통해 만나고 사랑하고 이별로 잊혀가는 무수한 관계의 흐름을 읽더라도 다시 사람을 품어 안을 수 있는 따스한 힘을 독자가 발견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로 더욱 굳게 내려진 관계의 블라인드, 다소 거칠지라도 순정한 시로써 저 유구한 강줄기처럼 독자들에게 가닿고 싶습니다.” 위와 같이 첫 시집의 출간 소회를 밝힌 임정매 시인은 시를 만나지 못했다면 더 많은 가시를 지닌 삶을 살았을 것 같아 아찔하다며 ‘새빛문화아카데미’를 통해 들풀 같은 자신에게 작은 꽃씨가 있음을 알려주신 손종호 시인을 참 스승으로 모시고 있다. 늘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일을 해왔으며 현재도 법무부 산하 공공기관에서 취업 지원하는 상담사로 일하고 있다. 주말에는 금강을 지척에서 바라볼 수 있는 옥천의 한 농가 주택에서 지내며 자연의 말씀을 받아 적고 있다. 시인의 말 멀리 왔다 그래도 괜찮다 2023년 가을 금강변에서 임정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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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매』 라는 장편소설 한편을 읽었다. 감춰야 한다고 꾸역꾸역 싸 맨 관능들은 감춰지지 않아서, 문자로도 뜨겁고 순수하게 출렁거렸다. 인격과 그 역사는 몸에 깃드는 것. 기하학으로도 그려지지 않는 가지가지의 무늬. 셀 수 없이 드리워진 생명의 시간들. 한달음에 읽어낸 것이 미안했다. 농경시대의 끝자락에서 그 냄새라도 맡아 본 사람이 아니고서는 상상할 수 없을, 가난하고도 정겨운 고향 사람들과 삶. 펄펄한 기억, 모두 그리움으로 그려낸 안개 같은 문자그림들. 그 동안 이 많은 것을 품고서 몸을 풀지 못했으니 얼마나 숨이 가빴을까. 그리고 고달팠을까. 나라면 소설 한편으로 썼을 사연들이 시(詩)라는 정제된 문자로 가볍고도 무겁게, 아름답고도 정갈하게 풀어낸 임정매의 순수와 열정이, 그래서, 고맙다. - 이경자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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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산 앞에 산이 있”고 “뒷산 뒤에도 산이 있었”기에 소녀는 떠난다. 아니 소녀는 원래 떠나는 존재다. 훗날 “젖지 않고는 날 수가 없나 봐요”라고 묻는 소녀는 다시, 그 길은 “모난 것도 아닌데 벼랑을 만난 듯 한쪽으로” 발이 쏠리기만 한다고 “절박하지 않은 짐짝은 버려야 한다”는 깨달음이나 던지며, 그래서 “온전히 채워지는 슬픔은 없더라”는 결론을 낸다. 이것이 삶이 들려주는 어두운 목소리인지 시적 엄살인지 판단하는 일은 온전히 읽는 이의 몫이지만, 시인이 선명한 그림과 조근조근한 속삭임으로 보여주는 정서적 연대기는 아름답다. 그리고 그림과 속삭임 사이를 오가는 솜씨는 좀 능수능란하다. “적당의 적당량을 유지하기 위해 덜어내거나 추가하지 못하는” 능수능란이다. - 김병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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