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1부 왓츄어네임
꽃샘추위/ 적화/ 정숙이 & 정수기/ 매생이국/ 입양/ 왓츄어네임/ 화병/ 오랑캐꽃/ 압화/ 나의 독버섯이란 별명/ 샌드위치맨/ 쑥/ 규화목/ 노이즈 캔슬링/ 도라지와 여뀌/ 꽃잎차 2부 삭제된 메시지입니다 눈먼 생각/ 복화술 - 인형의 노래/ 낙화/ 그 어느 날엔가는 - 弔花戀歌/ 숨은 그림 놓아주기/ 나비 화석花席/ 공갈빵/ 흰죽/ 삭제된 메시지입니다/ 신과 함께/ 싱잉볼/ 주금화/ 나를 묻는다/ 홍역/ 버들강아지 오요요/ 몸살 3부 바람의 집 가을강/ 따뜻한 알/ 그 잠 곁을 돌아 나왔다/ 어떤 자세/ 먹감/ 비늘/ 한마음계량소/ 무단 방류/ 노각/ 냉잇국을 끓이는 저녁/ 수염 틸란드시아/ 부추에 대한 소고/ 참깨를 볶으며/ 양간지풍/ 분가/ 타임아웃 4부 탈피 가묘/ 빚잔치/ 삽목/ 공중전화기/ 냉과리의 노래/ 함구/ 탈피 / 관계망상/ 닭똥집에 대한 고찰/ 절규/ 극한 / 손저울/ 습관적으로/ 죽음이 자란다/ 어떤 새의 경우/ 대처 |
|
꽃을 솎는다
늙은 복숭아나무를 휘어잡고 놀란 꽃들을 집어뜯다보면 손끝에 묻어있는 찐득한 소리들이 손톱 밑으로 파고든다 꽃과 꽃 사이 햇빛과 그늘 사이 나는 무슨 자격으로 꽃을 따내고 있을까 당신과의 적당한 거리를 가늠해보니 버릴 게 많아 울음이 자라던 진자리 봄볕으로 덧대며 아랫배를 쓸어내리던 시간이 있었다 복숭아 한 알을 떠올리기 전에 이정숙 시집_ 그 잠 곁을 돌아 나왔다 눈 맞추지 말고 혼잣말도 말 것 뚝뚝 생피 흐르는 낙화 붉으스레 얼비친 눈물 훔치고 비명이 매달렸던 가지가 휘청거린다 꽃을 주워 먹고 몰래 붉어진 바닥은 알고 있었을까 내 몸 속 뜨겁던 꽃도 이렇게 끌려나갔다는 것을 그 꽃을 지우고 빈 몸으로 돌아오던 길에 흘린 피처럼 쏟아지던 노을 나의 봄엔 느닷없이 겨울이 들이닥쳤다 꽃을 따서 꽃을 먹이는 쓰라린 농사법 부스스한 복숭아나무가 무릎 아래 쓰린 상처들을 밟고 어쩔 줄 모를 때 바람이 엎드려 진물을 핥아주고 있다 --- 「적화」 중에서 이역 땅 스리랑카 친구들 이름은 구름 너머 두고 왔지만 아침 산책길에 만난 소녀가 ‘하이’ 해맑게 먼저 말을 걸었을 때 영어가 쉽사리 혀에서 풀리지 않아 주저주저 나는 조화처럼 씨익 웃었다 강아지가 나를 향해 갸우뚱 한다 쪼그리고 앉아 그때서야 중얼거리듯 ‘왓츄어네임’ 강아지는 눈 깜빡이며 꼬리를 흔들었다 이정숙 시집_ 그 잠 곁을 돌아 나왔다 풀섶에 별처럼 내려앉은 꽃에게도 ‘왓츄어네임’ 그림에서나 본 천상의 열매에게도 새를 붙잡아 앉힌 줄 알았던 꽃나무에게도 이름을 묻자 그것들의 발가락이 꼼지락거리는 걸 보았다 나륵꽃이 배시시 웃자 덧니로 깨문 향기가 퍼졌다 건들거리며 다가온 바람도 내게 날아오른 참새가 흰구름을 만나도 ‘왓츄어네임’ 오래 등 뒤에 세워둔 당신 이름에게 손 내밀었다 죽은 동생의 이름도 고개를 묻고 불러보았다 사랑이라 쓴 가명과 용서라는 본명이 통성명 한다 돌아오는 길에 내게 물었다 ‘왓츄어네임’ 나를 에워싼 나의 이름들이 끄덕끄덕 따라오고 있었다 --- 「왓츄어네임」 중에서 죽은 이의 한 끼를 차리려고 추석장을 보러 나섰다 건어물집 서까래에 달려 눈이 움푹 꺼진 북어 몇 쾌가 내려다보는데 주인은 생물이라고 힘을 주지만 좌판 위의 생선들은 이미 눈이 돌아갔다 부릅뜨고 잠을 쫓는 채소 가게를 지나 이정숙 시집_ 그 잠 곁을 돌아 나왔다 노점의 한 노인이 늦은 점심상을 차려놓은 듯 신문지만 한 그늘을 깔고 노지상추 청양고추 야들야들한 부추 가지런히 진설해놓고 자울자울 한다 나는 저 약 될 것 같은 부추를 사고 싶다가 더 맛나 보이는 잠 한 소쿠리도 욕심 났지만 아니다 아니다 세상 뜬 영감님 만나 겸상이라도 한 듯 벌어진 입가가 달차근한 근심없는 저 표정을 흔들 수 없다 저 푸성귀 몇 돈 바꾸어 무엇을 하고 싶었을까 죽을 복이라도 잘 타서 아무 날 아무 시 경로당 마실 가듯 까무룩 잠들어 떠나고 싶다던 그녀의 곤한 잠 곁을 나는 까치발로 돌아 나왔다 --- 「그 잠 곁을 돌아 나왔다」 중에서 입 없는 말이 찾아왔다 삭제된 메시지라는 문장 안에서 뼈만 남긴 의미의 흔적을 읽는다 우리는 절반의 연애를 하며 헤어지자, 헤어지지 말자는 말을 혀 밑에 넣고 산다 삭제 버튼을 눌렀는데도 삭제되지 않는 속마음 어떤 말이든 혓바늘이 돋아 까끌거렸다 유산되거나 사산되어버린 새벽의 내 일기처럼 한 줄 문장은 혈흔 같아 ‘삭제된 메시지입니다’ 실은 내게는 떨리는 위로 그 하얀 눈길은 간 곳 없지만 내게로 걸어온 발자국만 움푹 파여서 이정숙 시집_ 그 잠 곁을 돌아 나왔다 아무도 몰래 눈길이 붉었다 --- 「삭제된 메시지입니다」 중에서 나의 양양에서 당신의 간성은 멀다 우리 사이엔 바람에 뒤틀린 듯한 산맥이 가로놓여 봄이면 한바탕 밭은 숨이 틀어오른다 바짝 마른 가슴팍에 기어이 불이 붙고 당신에 대한 굶주린 생각이 불타오르면 혀끝에 달구어진 이름 부르며 이 화염의 골짜기에서 돌아설 수도 없어 나는 죽어야 끝이 날, 간성에 다다라야 한다 오래 서성거린 바람이 갈기를 세워 내 움츠린 어깨에 채찍처럼 감겨오면 활활 꽃신 신고 나는 목숨 사르며 산을 탄다 솟아오른 능선 아래서 주저앉을 뻔도 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불의 함성 앞세워 양양에서 간성까지 빠른걸음으로 하룻밤 하룻길 잡히면 죽는 날카로운 불꽃 등에 지고 나는 헐떡거리며 산등성을 넘어간다 내 안의 불로 내 살 지지면서 너에게 닿는 간성에서 나는 재가 되겠지만 잿속에 타고 남은 이름 끌어안고 아직 불기로 뜨거운 나의 이마를 식히리라 그런데, 그놈의 간성은 어디에 있을까 당신과 나의 경계에서 모래바람이 불어왔다 --- 「양간지풍」 중에서 |
|
시인의 말
“안녕?” 조심스럽게 다가가 이름을 물었다 가지에 앉은 새들에게 그 새들의 무게로 흔들리는 나무에게 그늘에서라도 제 한숨을 피워내는 꽃들에게…… 그러면서 그 목숨들의 작은 읊조림을 따라불렀다 강 건너에 있는 이들 간절한 호명呼名 을 아무리 힘껏 던져도 끝내 닿을 수 없는 거리 그러나 눈길마저 차마 거둘 수 없어 눈물 그렁그렁한 노래들을 들꽃다발처럼 들고 나는 이쪽 강둑에 그저 서 있을 수밖에 2025년 가을 이정숙 |
|
시인의 시가 순도 높은 진정성을 가지는 이유는 사유나 관념만이 아닌 자신의 구체적 경험이 시 속에 스며들어 있다는 점 때문이다. 이정숙 시인은 특수한 개인의 경험을 독자들이 공감할 수 있는 보편성으로 이어놓는 내공이 탁월하다. 시인은 뛰어난 직관으로 사물과 사건에서 시적 모티프를 발견하고 그것을 압축된 작은 서사로 구축한다. 그것은 시 속에서 하나의 메타포로 작동되는데 그 짧은 서사가 시인의 핍진한 경험과 은유관계로 놓이는 것이다. 그리하여 “쉬이 삭이지 못한 날것의 단어들도 곱씹다 보면/욱신거리는 생각들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닭똥집에 대한 고찰」)고 하는 걸 보면 시인이 꿈꾸는 것은 자기정화이며 자기구원, 결국 생에 대한 긍정이 아닐까 한다. 시인의 이러한 지향 의식은 채송화 줄기를 분질러 땅에 꽂으면서 하는 독백에서도 잘 드러난다. “부러진 왼쪽 발목은/이 적막 속에서 얼마나 견뎌야/뼈와 뼈들이 들어맞아 제 집을 지을까/진(津)물 위에 진(珍)물이 스며/내 흉터는 분홍에게 닿게 될까”.(「분가」) 흉터가 채송화의 분홍에 닿은 그 지점이 시인이 꿈꾸는 시적 지향이 아닐까? 그 지향이, 정화의식이 아플 만큼 아름답다. - 복효근 (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