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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바다 _09
해설 | 어느 투쟁의 기록 _139 |
Ernest Hemingw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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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어부도 여럿 있고 대단한 어부도 몇 명 있죠. 하지만 할아버지 같은 어부는 할아버지뿐이에요.”
--- p.25 노인은 늘 바다를 ‘라 마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사람들이 바다에 애정을 느낄 때 부르는 스페인어다. 때로는 바다를 사랑하는 사람들도 바다에 관해 나쁘게 말할 때가 있는데, 그럴 때조차도 바다는 늘 여성인 것처럼 불린다. 몇몇 젊은 어부, 낚싯줄에 찌 대신 부표를 연결해 사용하고 상어 간으로 큰돈을 벌었을 때 사들인 모터보트를 타고 다니는 이들은 바다를 남성형인 ‘엘 마르’라고 불렀다. 그들은 바다를 경쟁자나 장소, 심지어 적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노인은 늘 바다를 여성으로 생각했고, 큰 호의를 베풀어주거나 베풀어주지 않는 무언가로 생각했는데, 만일 바다가 사납거나 사악한 짓을 한다면 그것은 바다로서도 어쩔 수 없어서 그러는 것이었다. --- pp.32~33 나는 낚싯줄을 정확히 드리우지, 노인은 생각했다. 다만 더는 운이 없을 뿐. 하지만 누가 알겠어? 어쩌면 오늘은 다를지도. 하루하루가 새로운 날이야. 운이 따르는 편이 더 좋지. 하지만 나는 차라리 정확한 편을 택하겠어. 그러면 운이 찾아올 때 준비가 되어 있을 테니. --- pp.35~36 사람들 대부분은 바다거북에 대해 비정한 태도를 취하는데, 왜냐하면 바다거북을 도살하고 토막 낸 후에도 그 심장이 몇 시간 동안이나 펄떡거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인은, 나에게도 저런 심장이 있고 내 발과 손도 녀석들의 것과 똑같지 않은가, 하고 생각했다. --- pp.40~41 “하지만 인간은 패배하도록 만들어지지 않았어.” 노인은 말했다. “인간은 파멸할 수는 있어도 패배할 수는 없어.” --- p.112 나는 죄악이 뭔지도 잘 모르겠고 내가 죄악을 믿긴 하는 건지도 잘 모르겠어. 어쩌면 저 고기를 죽인 게 죄악이었는지도 몰라. 비록 내가 살기 위해, 또 여러 사람을 먹이기 위해 그랬다고 하더라도 말이지. 하지만 그렇게 치면 죄악 아닌 게 없을 거야. 죄악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말자. 그러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고, 세상에는 그런 일로 돈을 버는 사람이 따로 있으니까. 그 사람들더러 생각하라고 하자. 고기가 고기로 태어났듯이 나는 어부로 태어난 거야. --- p.114 게다가 이 세상 모든 것은 어떤 식으로든 다른 모든 것을 죽이게 되어 있어. 고기잡이는 나를 죽이는 일인 동시에 나를 살게 해주는 일이기도 해. 그 애가 나를 살게 해주지, 노인은 생각했다. 나 자신을 너무 많이 속여선 안 돼. --- pp.115~116 가져왔어야 했던 것들이 한두 개가 아니지, 그는 생각했다. 하지만 자네는 그것들을 가져오지 않았어, 이 노인네야. 지금은 없는 것들을 생각할 때가 아니야. 있는 것들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해봐. --- p.120 하지만 이제 어둠이 내려 아무런 불빛이나 빛도 보이지 않고 불어오는 바람에 부풀어오른 돛만이 배를 꾸준히 끌어가는 가운데, 노인은 어쩌면 자신이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느꼈다. 그는 두 손을 모아 손바닥의 감각을 느껴보았다. 감각은 살아 있었고, 단순히 손을 폈다 오므렸다 하는 것만으로도 살아 있음의 고통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선미에 등을 기대보고는 자신이 죽지 않았음을 알았다. 그의 양어깨가 그렇게 말해주고 있었다. --- p.1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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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적은 단어로 그려낸 완전한 세계
무한한 확장의 가능성을 지닌 불멸의 고전 『노인과 바다』는 “우리 시대 작가가 쓴 작품 중 가장 훌륭한 작품으로 인정받을 것”이라는 윌리엄 포크너의 찬사를 넘어서 출간한 지 7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최고의 고전으로 손꼽힌다. 시대를 넘어선 생명력을 지닌 소설은 많지만, 짧고 단순한 줄거리로 이토록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작품은 『노인과 바다』가 유일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소설은 때로는 “파멸할 수는 있어도 패배할 수는 없”는 불굴의 의지에 대한 이야기로, 때로는 나이와 생물종을 초월한 우정에 관한 헌시로, 때로는 생태주의나 실존주의를 키워드로 읽힌다. 노인은 팔십사 일간 물고기를 잡지 못한 불운한 어부 ‘산티아고’ 그 자체였다가, 10년 만에 발표한 신작에 쏟아진 혹평으로 상심했던 헤밍웨이의 분신이 되기도 하며, 가끔은 예수의 모습과 겹쳐 보이기도 한다. “어떤 것을 구심점으로 삼아 읽어나가든 『노인과 바다』의 구조적 정합성은 쉽게 깨어지지 않는데, 이러한 사실이야말로 이 작품이 얼마나 치밀하게 쓰였는지를 말해준다”라는 황유원 번역가의 해설처럼, 『노인과 바다』는 무한한 확장의 가능성을 지닌, 가장 적은 단어로 그려낸 가장 완전한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새로운 번역본이 최소한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면 단순히 기존 번역본들의 오역을 답습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는데, 역자는 어찌 보면 가장 당연하면서도 본질적인 부분인 헤밍웨이의 ‘문장’에 주목하며 그 도전에 임하기로 했다.(‘해설’ 중에서) 불필요한 수식을 배제한 사실적인 묘사를 의미하는 ‘하드보일드 문체’ 역시 헤밍웨이와 그의 작품을 설명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키워드다. 그러나 원래 『노인과 바다』는 쉼표로 이어진 복문이 대부분이라는 사실은 비교적 덜 알려져 있다. 황유원 번역가는 소설 속 긴 서술문과 극도로 짧은 대화문의 차이에서 비롯한 긴장감과 리듬에 주목했다. 물고기를 토막 내듯 긴 문장을 임의로 끊지 않았고, 반대로 짧은 대화문을 늘리지 않았다. 예를 들어, 작품의 마지막 장면에서 한 관광객이 뼈만 남은 청새치를 보고 “저게 뭐죠?” 하고 웨이터에게 묻자 웨이터는 짧게 답한다. “‘Tiburon,’ (……) ‘Eshark’.” 뼈만 남게 된 정황을 알려주고자 했으나 영어를 하지 못하기에 같은 의미의 두 단어만 나열한 것이다. 그러니 이를 “티부론입니다”라고 서술격 조사를 붙여 번역하면 오역이 된다는 것이다. ‘상어의 공격을 받아 뼈만 남게 됐다’는 설명을 ‘저것은 상어다’로 오해하는 것은 관광객이어야지 독자여서는 안 된다. 때문에 역자는 이를 “‘티부론.’ (……) ‘상어요’”라고 옮겼다. 이러한 원칙하에 건져 올린 문장들은 멕시코만의 모습을 보다 본래의 모습에 가깝게 그려내며, 날치가 튀어 오르고 청새치와 상어가 헤엄치는 지구 반대편으로 독자를 거뜬히 데려간다. 그가 이미 그걸 수천 번이나 증명해 보였다는 사실은 아무 의미도 없었다. 이제 그는 그걸 다시 증명해 보이려 하고 있었다. 매 순간이 새로웠고, 그걸 증명해 보일 때 과거는 전혀 생각지도 않았다.(72쪽) 산티아고가 팔십사 일 동안 고기를 잡지 못하자 소년 ‘마놀린’의 부모는 산티아고를 ‘살라오’, 즉 운 나쁜 사람이라고 일컬으며 아들을 다른 배에 타게 한다. 그런 산티아고를 보며 어떤 어부는 비웃고, 몇몇 어부는 슬퍼한다. 그러나 그 누구도 노인에게 왜 바다로 나가느냐는 질문은 하지 않는다. 그가 어부이기 때문이다.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는 한, 빈손으로 돌아올지언정 그는 어부다. 노인은 힘겨운 사투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자신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는다. 자신은 어부고, 그것이 자기가 타고난 운명이라고 굳게 믿는다. 고기가 고기로 태어났듯이 자신은 어부로 태어났다고. 다만 더는 운이 없다 해도 자신은 낚싯줄을 정확히 드리우며 요령이 많은 어부라고. 노인에게 고기잡이란 밥벌이인 동시에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가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행위인 셈이다. 그러니 노인에게는 고기와 사투를 벌이는 모든 순간이, 그에 앞서 마음을 가다듬고 바다로 나가는 하루하루가 삶을 뒷받침하는 ‘결정적 한순간’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