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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코디언은 절반은 악기 같고, 절반은 타자기 같은 모습으로 조용히 놓여 있었다. 금속 테두리는 녹이 슬어 거뭇거뭇했고 닳은 가죽끈이 연식을 보여주었다. 살면서 별로 생각해보지 못한 물건이었다. 주변에 악기 하는 사람도 드물었지만, 간혹 기타나 색소폰을 연주하는 이는 봤어도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이는 없었기 때문이다.
--- p.13 L이 식사 도중에도 몇 번 물끄러미 악기 쪽을 바라보자 사장은 필요하면 가져가라는 놀라운 제안을 했다. 못 믿는 눈치이니 “여기서야 장식용으로 둔 거지만 악기는 연주하는 사람 곁에 있어야지”라며 자신의 철학을 확인시켜주었다. --- p.15 ‘그러면 그렇지’라는 자괴감이 밀려들었다. 자기 인생에 이런 횡재가 있을 리 없었다. 그러나 못 고치면 못 고쳤지, 안 고치는 게 나은 건 무엇이며, 공짜로 고쳐달라는 것도 아닌데 안 고치는 걸 권한다고 하니 반발심이 들었다. 자신이 보기에 멀쩡히 소리가 나는 악기를 포기한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 p.20 G는 인터뷰 내내 ‘처음에는 딱히 관심이 없었다’는 유의 말을 반복했다. 그건 뭐랄까 좋아하는 일을 직접 드러내는 걸 쑥스러워하는 것처럼도 들렸고, 이야기를 더 극적으로 하기 위해 밑밥을 까는 것도 같았다. 그가 예로 든 음악 이야기들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애호가라 말할 수준이 아니라고 했지만 언급하는 음악가들이나 음악이나 나로서는 전부 처음 듣는 이름들뿐이었다. --- pp.26~27 그의 뒤숭숭함은 경매가 마감을 앞둔 밤에 절정에 이르렀다. 조카는 비슷한 물건이 또 올라올 테니 진정하라고 했지만, 그가 검색해본 이래 그 모델을 본 건 처음이었다. 다시는 없을 희귀한 기회라는 생각이 강해졌다. 그는 경매라는 방식의 매력, 중고 악기 거래가 사람을 당기는 매력에 고스란히 끌려들고 있었다. 적은 금액 차로 망설이는 사이 어느 노련하고 과감한 구매자에게 행운이 돌아가고 자신은 영영 후회할 거라는 아찔함이 밀려왔다. --- pp.38~39 클럽 회원들은 엄연히 전쟁 중인 나라에서 물건을 구입하는 것이 맞는지 싶어 망설였다고 했다. 배송이 안 될까 걱정한 게 아니라 그 와중에 이런 걸 사고파는 게 옳은 일인가 싶었던 것이다. 우크라이나 판매자가 사는 도시는 키이우에서 서쪽으로 몇 시간 떨어진 비교적 안정된 곳이었지만 뉴스에서 본 지도의 빨갛게 표시된 전투 지역들이 그리 멀지 않아 보였다. 배송이 좀 늦어질 수 있다고 했지만 그 부품용 아코디언은 생각보다 빨리, 무사히 도착했다. --- pp.50~51 문제는 낙찰받은 아코디언이었다. G는 8월 내내 그 아코디언을 기다렸다. 유독 올여름에는 전 세계에 기상이변이 많았다. 유럽도 다르지 않았다. 뉴스에는 중남부 이곳저곳에서 번지고 있는 산불 영상과 함께 온열 질환으로 사망한 노년층의 인구가 그래프로 떴다. 그는 그 프랑스 판매자가 사는 지역이 빨갛게 표시된 것에 놀라는 동시에, 이런 상황에서 악기 배송이나 걱정해도 되는 것인지 죄책감을 느꼈다. 뉴스 속 세상은 빠르게, 눈에 띄게 변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세상은 놀라울 만큼 일상적이었다. --- pp.51~52 8월이 끝나갈 무렵 드디어 프랑스인의 바캉스도 끝났다. G는 예의상 하루를 더 기다렸다가 메시지를 보냈다. 금방 답이 왔다. G는 자신이 맞게 읽은 건지 다시 확인했다. 미안하다고, 그냥 안 사면 안 되겠느냐는 메시지였다. --- p.53 위쪽의 뚜껑이 열리며 안에서 반짝이는 이빨의 검은 아코디언이 모습을 드러냈다. 조심스럽게 들어 무릎에 올려놓자 비로소 전체 형태가 보였다. 부드러운 곡선으로 마감된 검은색 몸체는 펭귄이나 범고래를 연상케 했고, 오른쪽은 복잡한 무늬를 새긴 금속 덮개로 덮여 있었다. 그 밑에 자개로 된 버튼들이 조금씩 다른 빛을 반사하며 빼곡하게 박혀 있었다. --- pp.70~71 바람통이 벌어지며 주름 안쪽을 마감한 붉은 천과 하얀 천이 드러났다. 두 아코디언이 크고 느릿한 소리로 공간을 채우자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직 연습 중이라는 두 사람의 이중주는 숨이 넘어갈 듯 멈췄다 다시 이어지곤 했다. --- p.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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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사람들의 작은 행복을 지지하는 이야기의 큰 힘
“악기는 연주하는 사람 곁에 있어야지요.” 싱어송라이터이자 에세이스트, 번역가 김목인의 소설 『마르셀 아코디언 클럽』이 위즈덤하우스의 단편소설 시리즈 위픽으로 출간되었다. 김목인은 “담백함과 사려 깊음”(박정용 대중음악평론가)이 묻어나는 가사와 사운드로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꾸준히 언급되는 싱어송라이터이다. 또한 다수의 산문집을 쉴 새 없이 발표한 성실하고 왕성한 에세이스트이자 오션 브엉 등을 아름답고 리드미컬한 문장으로 옮긴 번역가이기도 하다. 『마르셀 아코디언 클럽』은 노래와 글을 ‘지어’ 내 곁에 있을 법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채롭게 전해온 ‘작가’ 김목인의 담백하고 사려 깊은 화법, 성실한 태도, 왕성한 창작열, 아름답고 리드미컬한 문장이 한데 어우러진 소설이다. 서울의 한적한 골목에 아코디언 연주자 마르셀 아졸라의 이름을 딴 ‘마르셀 아코디언 클럽’ 사무실이 있다. 회원 L은 군산의 한 식당에서 “절반은 악기 같고, 절반은 타자기 같은 모습”으로 놓여 있던 장식용 아코디언을 식당 주인으로부터 양도받는다. 20여 년 전 자기 소유의 아코디언을 영화 소품으로 빌려줬다가 돌려받지 못한 회원 G는 어느 날 이베이 검색을 하다가 마르셀 아졸라가 연주하던 카바뇰로 아코디언의 경매에 참여하게 된다. 클럽의 서기인 J는 『마르셀 아졸라의 일대기』라는 제목의 소책자를 집필 중이다. 경매에 낙찰돼 기대감에 한껏 도취된 G의 기분과 달리, 프랑스인 판매자는 배송이 어렵다, 바캉스다 하며 거래를 취소하려 하고, G와 J는 판매자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 ‘봉주르’ ‘봉소아’를 구분해가며 포기하지 않고 메시지를 보낸다. 아코디언 수리를 위해서라면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에서도 부품을 구하는 이들의 악기에 대한 열정! 이들은 과연 마르셀 아졸라가 연주하던 ‘it’ 아코디언을 얻을 수 있을까. 작품은 작가의 상상 속 한 장면에서 시작되었다. “어느 날 마음에 한 장면이 떠오르더니 계속 생각이 났다. 서울 어느 변두리 한 동네의 피아노 학원에 어른 한 명이 앉아 있고 주위로는 아이들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는 자기 아코디언이 배송되길 기다리며 빌린 아코디언으로 더듬더듬 연주하고 있었다. 그 표정은 부러울 만큼 행복해 보였고, 그 행복은 그의 악기가 도착한 날에 최고조에 이른다.” ‘작가의 말’에서 작가는 소설의 소재를 정하는 데 있어 심상치 않은 사회 곳곳의 징후와 세계정세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그러나 “조그만 행복을 꾸려가는 상상 속 사람들을 들여다보고 싶어” 이 작품을 썼다고 밝힌다. 소설은 보통 사람들의 ‘작은’ 행복을 지지하는 이야기가, 읽는 이에게 알 수 없는 ‘큰’ 힘이 되는 경험을 선사한다. 팬데믹, 기상이변, 전쟁…… 세상이 뒤흔들려도 잔잔한 일상은 계속되고, 악기는 연주하는 사람 곁에 있어야 한다. 1년 동안 50편의 이야기가 50권의 책으로 ‘단 한 편의 이야기’를 깊게 호흡하는 특별한 경험 위즈덤하우스는 2022년 11월부터 단편소설 연재 프로젝트 ‘위클리 픽션’을 통해 오늘 한국문학의 가장 다양한 모습, 가장 새로운 이야기를 일주일에 한 편씩 소개하고 있다. 연재는 매주 수요일 위즈덤하우스 홈페이지와 뉴스레터 ‘위픽’을 통해 공개된다. 구병모 작가의 『파쇄』를 시작으로 1년 동안 50편의 이야기가 독자를 찾아갈 예정이다. 위픽 시리즈는 이렇게 연재를 마친 소설들을 순차적으로 출간한다. 3월 8일 첫 5종을 시작으로, 이후 매월 둘째 수요일에 4종씩 출간하며 1년 동안 50가지 이야기 축제를 펼쳐 보일 예정이다. 이때 여러 편의 단편소설을 한데 묶는 기존의 방식이 아닌, ‘단 한 편’의 단편만으로 책을 구성하는 이례적인 시도를 통해 독자들에게 한 편 한 편 깊게 호흡하는 특별한 경험을 선사한다. 위픽은 소재나 형식 등 그 어떤 기준과 구분에도 얽매이지 않고 오직 ‘단 한 편의 이야기’라는 완결성에 주목한다. 소설가뿐만 아니라 논픽션 작가, 시인, 청소년문학 작가 등 다양한 작가들의 소설을 통해 장르와 경계를 허물며 이야기의 가능성과 재미를 확장한다. 또한 책 속에는 특별한 선물이 들어 있다. 소설 한 편 전체를 한 장의 포스터에 담은 부록 ‘한 장의 소설’이다. 한 장의 소설은 독자들에게 이야기 한 편을 새롭게 만나는 특별한 경험을 선사한다. 위픽 시리즈 소개 위픽은 위즈덤하우스의 단편소설 시리즈입니다. ‘단 한 편의 이야기’를 깊게 호흡하는 특별한 경험을 선사합니다. 이 작은 조각이 당신의 세계를 넓혀줄 새로운 한 조각이 되기를, 작은 조각 하나하나가 모여 당신의 이야기가 되기를, 당신의 가슴에 깊이 새겨질 한 조각의 문학이 되기를 꿈꿉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