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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계절의 얼굴
두 얼굴·12 입덧 중·13 봄 프리즘·14 뒷모습·16 그 자리·17 화관을 씌운 이 누구냐·18 석양의 집·19 귀뚜라미 통신·20 철골소심·22 빗방울 연가·24 낙하의 시간·26 까치밥·28 12월의 영산홍·29 얼음폭포·30 오대산 설경·31 2부 삶의 맨얼굴 찬란한 정원·34 수중 분만·35 침묵의 내막·36 코로나 천사 ― 2019년 겨울의 대구·37 산 위에서 부는 바람·38 노랑나비 그 아이·40 간격·41 소문·42 숨·44 그대의 마지막 춤·45 태양의 아들 ― 까뮈의 이방인·46 몸탑·48 제4악장·50 수목장 배웅·52 꽃씨 사설·53 3부 시대의 얼굴 입석묘지·58 ‘위하여’의 행방 ― 영화 [동주]를 보고·60 묵란도 아버지·62 무게 중심 1·64 무게 중심 2·65 삐끗 ― 2017년, 여름·66 바다의 입술·68 변신·70 섬진강 꽃길·71 귀향·72 월급날 ― 1989년 10월·74 그녀의 시 독법·75 파킨슨 아저씨·76 사라진 제국·78 공양·80 4부 신앙의 얼굴 해탈의 순간·82 구토·83 흔적·84 무심차·86 해탈의 문 ― 싯다르타, 헤르만 헷세·88 사순절·90 공현公現·92 원죄·93 빛나는 약속·94 고백·95 그날 아침 ― 요한 21. 1-14·96 구름 프란치스코·97 동백꽃 대관식·98 부활절 아침·100 그럴 수·102 해설 | 이동순_미시微視로 껴안는 따뜻한 시적 탐색·1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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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여름의 밑그림이듯 봄이 가을을 그리고 있다 꽃이 열매의 얼굴이듯 헐벗음 또한 무성함의 얼굴이다 무성한 꽃인 당신 헐벗은 열매인 당신 ---「두 얼굴」중에서 몇 날을 굶었나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누가 다녀갔나 봉곳봉곳 아랫배가 불러온다 시를 품지 못해 전향을 한다는데 불임의 가지 끝에 선 나도 울컥울컥 시의 기미를 토해내는 그대가 마냥 부럽다 북풍과 폭설의 겨울 행간을 딛고 살갗 찢으며 나올 첫 행 그 만개할 아픔을 위하여 연둣빛 태동을 타고 봄 멀미에 취한 삼월의 나무들 ---「입덧 중」중에서 미동도 없는 대치 상태 얼음 풀린 새벽 강가에 엎드려 미세한 움직임 하나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시간 초침 소리가 렌즈에 기록되는 찰나 한 줄기 빛 잡아라 숨을 멈추고 피사체에 초점을 맞추는 순간 펼쳐지는 저 날개 깃과 깃 사이 팽팽한 힘줄에 빛이 고일 때 고공비행의 첫발이 세차게 물살을 찬다 수십 갈래 빛살로 출렁이는 강의 가슴을 딛고 긴 겨울 둥지를 떠나는 고니 떼의 비상 빛의 각도에 따라 무한 자유가 부챗살처럼 펼쳐진다 그래, 내 안의 렌즈를 닦자 우주의 빛이 내 몸에 들이치게 상한 다리에 힘을 모아 바닥을 차고 일어서자 햇살 스펙트럼 생애에 빛나는 일곱 빛깔의 무지개를 걸자 ---「봄 프리즘」중에서 꽃이나 피우지 말지 농염 향기나 뿜지 말지 사향 앉았던 자리마다 질펀한 꽃물 옷고름 푼 채로 돌아서는 뒤꼭지나 보이지 말지 손이나 흔들지 말지 ---「뒷모습」중에서 꽃이 진 자리 꽃잎 받치던 그 자리 적막이 어룽어룽 깃을 틀고 있다 잠든 꽃잎 깨워 수시로 젖 물렸을 갓 돋은 햇순을 업고 무수히 밤새웠을 저 캄캄한 에미 등짝에 철부지 사월 햇살이 올라타 줄넘기를 한다 무성한 꽃잎이 지자 가려져 있던 꽃받침을 꽃받침 받쳐 들었던 여린 가지를 그 가지 받치느라 핼쑥해진 둥치를 환하게 열어 보이는 꽃이 지는 한낮 내가 피어 있는 동안에는 보이지 않던 바닥에 내려서야 비로소 보이는 그 자리 ---「그 자리」중에서 부서진 청석을 쌓아 쇠줄로 옭아맨 석벽 위 유월의 베튜니아가 이엉으로 얹혔다 스위스 계곡의 산장마다 창가에서 나팔 불던 그 붉은 입술들 입술과 입술이 포개져 깨어진 청석의 몸 사이로도 철심을 타고 피가 돈다 감옥이었던 수도원이었던 내 마음이 홍조를 띠는 아침 쇠도 돌도 녹여 피를 만드는 붉은 꽃 몇 포기 그대 ---「화관을 씌운 이 누구냐」중에서 일제히 고개 들었을 때 사진기 플래시 터지듯 반짝 뒷모습 풍덩 떨어져 들어가는 그때였어 산기슭 나무들이란 나무는 모두 숨을 멈추었다니까 숨 떨어지는 석양이 나무들 가슴에 빠알갛게 도장 찍는 순간이었어 넌 내꺼야 점 찍어 두고 싶었던 때가 있었지 모든 이파리들 물기 거두어가는 계절 사람도 그렇게 가고 단풍 든 가을 숲이 석양의 집이었다는 걸 그제야 알았지 ---「석양의 집」중에서 어디서 온 전화벨 소리 입안에 꽈리 문 듯 꽈- 또르르 말복을 어찌 알고 울음 채비했을까 방 안에 뛰어든 어린 가을 한 마리 손수건 보쌈하여 배롱나무 꽃덤불에 던져 주었다 꽈- 또르르 꼬- 또르르 말복 0시 50분 여름의 뒤통수에 채근질이다 그 소리에 놀라 화들짝 보랏빛 강을 건너는 진분홍 배롱나무 ---「귀뚜라미 통신」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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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시집의 표제가 된 시작품 「바다의 입술」은 우선 특이한 바다 이미지로부터 출발한다. 한국현대시사에서 가장 신선하고 생동감이 느껴지는 바다 이미지는 정지용(鄭芝溶, 1902~1950) 시인의 바다가 으뜸이 아닌가 한다. 지용은 바다의 파도를 ‘푸른 도마뱀’에 비유했다. 기상천외하고도 그 생기로움이 끓어 넘치는 그야말로 절창이다. 어느 누구도 추종을 불허한다. 과연 어느 시인이 지용의 파도 표현을 능가할 수가 있는가. 그만큼 지용의 시적 문맥에서는 고유의 완강한 성채(城砦)를 쌓았다. 이런 표현 수준에 대해 친구였던 이상(李箱, 1910~1937) 시인이 탄복했었다. 지용은 ‘달아나려고’의 문맥도 ‘달아날랴고’로 짐짓 의고체(擬古體) 형태를 쓰고 있다. ‘흰 발톱에 찢긴/ 산호보다 붉고 슬픈 생채기’는 또 어떠한가. 시인은 무심한 파도에 유정한 기운을 불어넣어 놀랍고도 처연한 인간의 효과로 되살아나게 한다. 이런 능력은 언어의 연금술사만이 쓸 수 있는 방식이다.
바다는 뿔뿔이 달아날랴고 했다 푸른 도마뱀 떼같이 재재발랐다 꼬리가 이루 잡히지 않았다 흰 발톱에 찢긴 산호(珊瑚)보다 붉고 슬픈 생채기! 그런데 손영숙 시인의 파도 시를 읽으며 나는 놀란 가슴을 진정하지 못한다. 파도의 거품 하나하나를 하고 싶은 말이 제각기 담긴 갈망의 입술로 읽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엄청난 입술들이 지금도 바닷가에서는 어떤 절규를 줄곧 허공에 날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말뜻을 제대로 알아듣는 이는 없다. 그저 바닷가에 가서 대책 없이 파도 소리만 멍하게 듣고 돌아올 뿐이다. 하지만 청력과 감각이 특별히 뛰어난 시인이 하나 있어 파도가 형성해내는 거품을 입술에 비유하고 그 입술에서 어마어마한 말을 쏟아내고 있는 광경을 보고 듣는다. 고향이 마산인 손영숙 시인이니 마산과 관련된 지난 시기 민주화운동의 슬픈 경과를 비롯해서 여러 젊은이의 죽음까지도 호출해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시작품의 파도 이미지는 지용의 경지에 상당히 근접해간 수준으로 놀라운 시적 깨달음을 경험했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동동 입술이 뜬다 파도 속 거품만큼 많은 입술 입술마다 가득 말을 물고 있다 우르르 달려와서 자르르 쏟아 놓는 말 푸푸 거품을 물고 있다 -시 「바다의 입술」 부분 시인의 말 시, ‘어떻게’보다 ‘왜’에 오래 머물렀다 씨는 뿌렸지만 저마다의 마음뜰에서 어떤 꽃으로 피어날지 알 수 없다 그대들께서 정원사가 되어주시기를…. 2023년 시월 와룡산 자락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