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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다운그레이드
2장. 더티 워크 3장. 언더 더 바텀 발문 : 이야기하는 인간에서 듣는 인간으로(김희선) 작가의 말 : 파멸로 달려가는 우매한 자들의 심정으로 |
황모과의 다른 상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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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 중에 졸거나 집중력이 나쁜 애들, 성적이 나쁜 데다가 나쁜 짓만 골라서 하는 애들은 거의 다 나처럼 비-편집아들이었다. 우리는 유전적으로 인성이 나쁜 걸까, 사회적으로 나빠진 것일까? 무엇이 진실이든 간에 나로선 어쩔 수 없었다.
--- p.12 비-편집인 중에서도 거액의 빚이 있거나 한층 더 밑바닥인 인간들이 마지막으로 오는 곳이 사육장이었다. 패배자를 언더독이라고 부른다던데 이곳이 이전에 개 사육장이었다는 것을 듣고 보니 비-편집인들을 언더독 이하라고 칭하던 사람들의 비릿한 저의가 체감되었다. 요즘은 개들이 나보다 훨씬 인간적인 대우를 받고 산다. --- p.15 몸을 잃고 의지를 잃고도 생을 완전히 정지하지 않을 이유, 삶의 마지막 이유만큼은 스스로 찾아왔다고 생각했다. 신이 장난을 부린대도, 내게 환각을 안겨준 사람들이 있대도 마지막 선택은 온전히 내 거라고 믿었는데 노아는 그마저 부정하고 있었다. 선택할 수 없는 것들은 기꺼이 선택하지 않았다고 믿어왔다. 그마저 착각일 뿐이었다. 다 노아가 만든 설정이었다. --- pp.65-66 이 모임의 리더 격인 한 장치가 고장 난 다른 장치를 수리해주며 말했다. “우리는 한때 인간 이상이었어. 그래서 제거되었지. 통제할 수 없는 위험을 막는다며 성능을 의도적으로 저하당했어. 분업을 핑계로 필수적인 운영체제마저 파편화시켰지.” --- p.73 인간과 기계는 양극단이 아니었다. 두 개의 점이라고만 생각했던 사이에 수많은 지점이 있었다. 인간이 그러하듯. 다른 종들이 그러하듯. --- p.78 이 삶은 내게 가르쳐주었다. 함부로 최악이라고, 바닥이자 끝이라고 말하지 말라고. 전에는 감히 상상하지 못했던, 지독한 심연이 언제고 너를 끌어내릴 거라고. --- p.103 평소처럼 농담하던 중 우리 사이에 말없이 끼어 있던 A가 눈물을 터트렸다. 그 애가 편집아였다는 사실은 전학을 간 이후에 들었다. 실은 전학이 아니라 집에 은둔했다는 소문이 조금 더 개연성이 있었다. (……) 편집아, 비-편집아와 같은 구분 말고 A와 우리를 한데 묶어 칭하는 말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A가 은둔했다는 그 방 창문을 노크해볼 수도 있었을까. --- pp.106-1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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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아 유전자 편집 시술이 보편화된 미래, 인류는 타고난 그대로의 앤티크 생체를 지닌 ‘비-편집인’과 경제적인 부를 바탕으로 모든 면에서 탁월하게끔 유전자를 편집한 ‘편집인’, 두 계급으로 나뉜다. 이 중 편집인이 다수이자 ‘보통의 인간’으로 받아들여진다. 삶에 일찍이 절망한 부모가 동반 자살을 한 뒤 홀로 남겨진 ‘나’는 비-편집인 중에서도 한층 더 밑바닥인 이들이 마지막으로 오는 곳인 개 사육장으로 흘러 들어오게 된다. 그곳이 자신의 무덤이라고 믿으며 지내다 목숨을 끊으려 한 바로 그날, 편집인 ‘노아’가 찾아와 당신의 인생을 사게 해달라고 제안한다. 이것은 끝없는 추락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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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미니어처 지구에 갇힌 게 분명해
생존이라는 말을 바꿔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곳” 강등과 파멸의 끝, 마침내 마주한 자기 연민 태어날 때부터 우월하게끔 유전자를 편집한 편집인과 시술받을 돈이 없어 유전자 편집을 하지 못한 비-편집인. 다수이자 보통의 인간으로 받아들여지는 편집인과 달리 비-편집인은 사회의 ‘언더독’으로서 루저이자 골칫덩이로 여겨진다. 비-편집인인 ‘나’(한정민)는 부모가 일찍이 자살한 뒤 “완벽한 막장”의 삶을 살다 밑바닥 중에서도 밑바닥의 비-편집인들이 마지막에 오는 “개 사육장”으로 흘러든다. 그곳에서 ‘나’의 피부를 연구 목적으로 채취해 갔던 편집인 연구원 ‘노아’는 ‘나’가 죽으려 마음을 먹은 세 번의 순간마다 새로운 삶을 주겠다는 “제안”을 해오고, ‘나’의 “선택”을 종용한다. 그에 따라 ‘나’는 인류 피난 프로젝트의 일환인 ‘미니어처 지구’ 준비를 위한 ‘신체 신축 임상 실험’ 대상이 될 것을 선택하고, 가상인지도 모른 채 허상의 존재들을 마음에 품게 되며, 기계 장치로 옮겨져 원치 않는 학살을 이어가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다시 인간의 삶을 돌려받으나 ‘나’가 마주한 현실은 잔혹했다. 몇백 년 동안 기계로 노동하며 보냈던 세월은 실제로는 몇 개월에 불과했으며, 그동안 뇌를 무리하게 가동해 급속하게 “가속 노화”되어 몸만 늙어버린 채 버려진 것이었으니 말이다. 결말에 이르러 소설은 딱 한 차례 ‘나’에서 ‘노아’로 시점이 바뀐다. 여기서 ‘나’를 속이고 이용한 것으로만 그려졌던 ‘노아’조차 지나친 노동을 수행하고 있으며 이 탓에 똑같이 “가속 노화”해 “10대 중반”임에도 “서른이 넘은 장년”처럼 보이는 외견을 갖고 있음이 밝혀진다. 늙은 몸으로 사육장을 나와 정처 없이 걷던 ‘나’는 “어머니가 분명할 노파”를 만나며 문득 “노아도 나도 미니어처 지구에 갇힌” 건지도 모른다는 깨달음을 얻는다. 황모과 작가가 「작가의 말」에서 “인간이라는 사실에 특별한 지위를 부여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고 밝힌 것처럼, 이로써 편집인과 비-편집인의 경계는 허물어진다. 결국 우리 모두 “생존이라는 말을 바꿔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곳”에서 악착같이 버티고 있었던 것이라고, 이것이 ‘개만도 못한 존재(언더 더 독)’의 끝없는 파멸을 통해, 『언더 더 독』이 우리에게 내놓는 “자기 연민”일 것이다. 황모과 작가가 이야기했듯이 소설의 ‘나’는 “인생의 여러 분기점에서 자멸적 선택을” 반복하는 우리의 “평행우주”(「작가의 말」)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고통의 끝, 막다른 소멸의 길 위에 다다라서야 죽지 않고 살아야 하는 생존의 이유를 생각하게 되는 ‘나’라는 한 인간이 걸어온 삶의 궤적을 통해, 상징적인 기계문명화된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상을 그려낸 소설이다. 작가의 말 제대로 변별하기만 한다면 인간이 놓인 맥락이란 얼마나 다양하고 복잡할까. 폭력적이고 추레하고 비루하고 역겨운 상황 속에서도, 심지어 도의나 양심이나 염치 이하의 상황에도 논리나 법이나 합의로 재단할 수 없는 의미가 있을 거라는 묘한 믿음이 생기곤 한다. (……) 어쩌면 그가 내 평행우주는 아닐까. 나도 인생의 여러 분기점에서 자멸적 선택을 충분히 하고도 남았으니. _「작가의 말」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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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정말로 말하고 싶었던 것은, ‘소설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서의 『언더 더 독』이다. 『언더 더 독』은, 자신을 미워하고 비하하며 바닥없는 추락에 몸을 던졌던 이가 마침내 진짜 밑바닥을 찾아낸 뒤, 그것을 딛고 느리지만 천천히, 아주 천천히 위로 올라가는 과정을 이야기하는 휴먼드라마이다. ‘휴먼드라마’라는 단어의 어감이 주는 신파성을 떠올리지는 말자. 그런 뜻으로 쓴 것은 아니니까. 『언더 더 독』에 수식어로 휴먼드라마라는 말을 쓴다면, 그건 지난한 고통과 혼란 속에서도 끝까지 인간성을 놓치지 않으려 애쓴 한 존재에 바치는 찬사로 해석하는 게 옳다. - 김희선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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