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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도서 약어표_26
일러두기_43 4책 ㆍ제1부(제1장~제10장) IV. 남경 수도원(1597년 7월 20일부터 1600년 5월 19일까지) 제1장 마태오 리치가 상서 왕충명(王忠銘)의 도움으로 라자로 카타네오 신부와 함께 남경으로 돌아가게 된 것에 대해(1597년 7월 20일부터 1598년 7월 10일경까지) 50 제2장 신부들이 처음으로 북경 황궁에 가고, 마태오 리치가 어떻게 남경 총독의 부름을 받게 되었는지에 대해, 그리고 북경으로 가는 길에서 겪은 일에 대해(1598년 7월 10일경부터 1598년 9월 7일까지) 66제3장 신부들이 이번에는 북경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몰라 다시 남경으로 되돌아가게 된 일에 대해서(1598년 9월 8일부터 1598년 12월 5일까지) 88 제4장 라자로 카타네오 신부가 어떻게 짐을 가지고 임청(臨淸)에서 겨울을 났는지, 마태오 리치 신부가 소주와 남경에서 어떻게 거주하게 되었는지에 대해(1598년 12월 5일부터 1599년 2월까지) 110 제5장 마태오 리치가 어떻게 남경에서 수학 강의를 하게 되었는지, 그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공신력을 안겨 주고 열매를 가져다주었는지에 대해서(1599년 2월 6일 이후부터 1600년 5월 19일 이전까지) 135 제6장 남창의 많은 주요 인사들이 마태오 리치와 대화하고 싶어 한 것에 대해(1599년 초) 166 제7장 마태오 리치가 우상 종파의 한 유명한 승려와 거룩한 신앙에 관해 논한 것에 대해(1599년 초) 182 제8장 임청에서 겨울을 지낸 우리 형제들이 황제에게 줄 물건을 가지고 어떻게 남경에 도착하게 되었는지, 남경에서 어떻게 좋은 집을 매입할 수 있게 되었는지에 대해(1599년 2월부터 6월 5일경까지) 197 제9장 라자로 카타네오 신부가 마카오에 어떻게 귀환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남창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이 점차 생겨나기 시작한 것에 대해서(1599년 6월 20일 무렵부터 1600년 3월경까지) 210 제10장 마태오 리치 신부가 디에고 판토하 신부와 두 명의 수사 종명인 페르난도와 에마누엘레 페레이라와 함께 어떻게 다시 북경으로 돌아오게 되었는지, 어떻게 산동의 제녕에 도착하게 되었는지에 대해(1600년 3월부터 6월까지) 227 ㆍ제2부(제11장~제20장) V. 북경 수도원(1601년 1월 21일부터 1602년 9월 21일까지) 제11장 우리가 임청(臨淸)과 천진위(天津衛)에서 겪은 일에 대해(1600년 6월부터 1601년 1월까지) 242 제12장 어떻게 중국의 황제가 신부들에게 진상품을 가지고 북경에 들어오라고 했는지, 첫 입성에서 일어난 일에 관해(1601년 1월부터 2월까지) 265 제13장 우리가 어떻게 주객사(主客司)의 지시를 받게 되었고, 외국 사절단들이 묵는 사이관(四夷館)에 들어가게 되었는지에 대해, 그리고 어떻게 거기에서 나오게 되었는지에 대해(1601년 2월 25일경부터 5월 28일까지) 297 제14장 신부들이 직접 황제에게 탄원서를 쓰게 된 경위, 예부의 관리들이 신부들에게 사이관 밖에 거주하도록 허락하고 북경의 고위 인사들이 방문하여 위로하다(1601년 6월부터 12월까지) 324 제15장 우리가 북경에서 사귄 풍모강(馮慕岡)과 이아존(李我存), 이 두 인사와의 깊은 우정(1601년 6월부터 12월까지) 341 제16장 이 시기에 우상 종파가 겪은 커다란 수치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닥쳐오는 엄청난 고통으로부터 구해 주신 것에 대해(1602년부터 1604년 5월 25일까지) 369 제17장 그동안 소주(韶州) 수도원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1599년 7월 초부터 1603년까지) 389 제18장 그동안 소주(韶州) 수도원에서 겪은 몇 가지 어려움에 대해(1599년부터 1603년까지) 418 제19장 남경 수도원의 발전과 서 바오로 박사의 개종에 대해(1600년 5월부터 1604년 2월까지) 450 제20장 마카오 콜레지움의 새 원장 발렌티노 카르발료 신부가 어떻게 마누엘 디아즈 신부를 중국 내륙으로 보내게 되었는지에 대해, 마태오 리치가 그의 편으로 선교 물품을 보내기 위해 그를 북경으로 부르게 된 것에 대해, 황궁에서 그리스도교가 순조롭게 출발하게 된 것에 대해(1600년 2월 1일부터 1602년 9월 21일까지) 4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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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 상서는 우리의 일과 관련해서, 남경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보면서, 신부들로부터 받은 선물이 많은데다 그들과의 약속을 물릴 수도 없는 상황이라 함께 북경으로 가기로 했다. 거기에서 친분이 있는 태감들을 통해 선물을 주고 황제를 알현할 수 있는 길을 찾아보기로 하였다. 그는 남경성의 여섯 상서의 축하를 모아 황제의 생일에 맞추어 북경으로 길을 재촉했다. 그의 짐과 선물은 하인 두 명과 함께 수로로 운반했다. 그는 신부들에게 자기 식구들과 함께 짐을 싣고 가는 배에 올라 수로로 갈 것을 제안했다. 그들이 탄 배는 매우 빠른 배로 가볍다고 해서 마선(馬船)이라고 불렀다. 가는 동안 배 안에서 편안하게 지낼 수 있도록 큰 방이 있는 배를 빌렸다. 신부들과 자기 식구들이 넓게 쓸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 p.67 조 총독은 친구 왕 상서가 잘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중국의 풍습에 따라 선물을 보냈는데, 거기에는 자기가 인쇄한 이 〈세계지도〉도 한 장 있었다. 왕 상서는 그것을 보고 마태오 신부가 보여 준 것과 너무도 비슷하여 즉시 사람을 보내 신부를 자기 관저로 불렀다. 그리고 다른 여러 문인 학자들에게 ‘지도’를 보여 주며 “보시오, 우리 중국에도 그대의 지도에서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은 세계의 전 지역에 대한 정보와 그 외의 것들에 대한 설명이 적힌 지도가 있소. 그러니 중국에서 그대가 이 분야의 첫 번째 저자는 아니오”라고 말했다. 신부는 ‘지도’를 보고 즉시 자신의 것임을 알았다. 그리고 자기가 그 저자임을 밝히고, 모든 것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신부가 조경에 있을 때 세계지도를 인쇄한 적이 있는데, 바로 그것이라는 것이다. --- p.70 소주 수도원에는 론고바르도 신부가 혼자서 프란체스코 마르티네스[황명사(黃明沙)] 수사와 있었고, 다른 한두 마카오 출신의 젊은이들은 오랫동안 신부가 중국에 오지 않는 것을 보고 자기들 외에는 동반할 사람이 없다고 느꼈다. 하느님의 도움으로, 또 남경과 북경 두 황실에서 우리가 얻은 공신력 덕분에 그곳[소주]에도 그리스도교가 발전할 수 있도록 관청에서 거룩한 복음을 선포하는 데 가장 필요한 권한을 우리에게 주었다. 이에 그 도시의 주요 인사 몇 사람이 그리스도교를 믿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매우 드문 경우였다. --- p.390 이렇듯 여성들에 관한 사례도 많았고, 후에 두세 가지, 귀족 부인 사례에서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들은 깊은 신앙심으로 마치 수도원의 수녀처럼 헌신적이었다. 작은 고을들에서 기대 이상의 큰 성과를 올린 것뿐 아니라, 도시에서도 나름의 성과가 있었다. 도시는 오랜 세월 복음에 문을 닫아걸었고, 변두리에서부터 타오른 불꽃이 도시로 들어가 많은 개종자를 냈다. 거기에는 평민들뿐 아니라. 지방의 주요 인사들과 문인 및 부유한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p.404 1603년 서광계는 볼 일이 있어 다시 남경으로 왔고, 조반니 다 로챠 신부를 방문했다. 신부는 그에게 성당을 보여 주었고, 그는 그 안에 모셔진 〈아기를 안은 성모 성화〉를 보고 경배했다. 그 기회에 신부는 그에게 우리의 거룩한 신앙에 관한 몇 가지 것들을 이야기했고, 그는 매우 주의 깊게, 열심히 들었다. 그는 즉시 우리의 신앙을 따르고 싶다고 했고, 밤늦도록 남아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아직 인쇄하지 않은 『천주교요天主敎要』와 『천주실의天主實義』를 가지고 돌아갔다. 그는 밤새 이 두 권의 책을 모두 읽고, 책에서 가르치는 교리에 크게 만족했다. 그리고 다음 날 『천주교요』에서 가르치는 기도문들을 외워서 신부에게 와서 설명해 달라고 요청했다. 신년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가기 전에 세례받는 문제를 결정하고 싶어 했다. --- p.466~4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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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이탈리아 정부는 마태오 리치 서거 300주년을 기해, 동서양 문명의 가교가 된 ‘이탈리아의 위대한 아들’을 기억하기 위해 국가 주도로 이 책을 감수하여 발간하였다. 사업의 총책임은 예수회 소속 중국학자 델리야(Pasquale M. D’Elia S. I.) 신부가 맡았다. 델리야는 이후 30여 년간 원전에서 언급하고 있는 행로를 따라 중국 현지를 답사하고, 기록을 고증하는 한편, 그때까지 연구된 명말청초 동서양 문명교류사의 모든 기록을 각주에 담아 1942년(Volume I)과 1949년(Volume II)에 두 권의 책으로 출판하였다. 책은 다섯 책(冊)으로 구분한 리치의 원문 텍스트를 본문으로 하고, 델리야가 검증한 내용과 그때까지 연구된 학문적 자료들을 각주로 달아 방대하고 상세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따라서 책은 엄밀히 말해 ‘리치 원전과 델리아의 주석서 합본’이라고 할 수 있지만, 델리야는 그냥 『리치 원전, 그리스도교의 중국 진출기』로 편찬하여 소개하였다. 역자가 번역서로 사용한 판본은 바로 이것이다.
책의 내용은 리치가 세분하여 번호(number)를 단 그대로, 모두 1000번까지 있다. 이것은 리치가 성경을 비롯한 전통적인 고전서의 양식을 그대로 따랐다는 것을 말해 준다. 한편, 『리치 원전』은 본문과 각주의 비교를 통해 리치의 원저에 페레이라와 트리고가 이미 손을 댔고, 거기에 델리야가 다른 방식으로 손을 댄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원저자인 리치, 분실된 몇 개의 장(章)을 포르투갈어로 가필한 페레이라, 그것을 그대로 집대성하여 라틴어로 번역하여 유럽으로 가지고 갔던 트리고, 그리고 20세기 초, 이 판본들을 총 정리하여 『리치 원전』으로 소개한 델리야를 통해 본서를 둘러싼 중국학의 변천사를 엿볼 수 있다. 각주가 많아 읽기에 불편한 점이 있겠으나 학문적인 관점에서는 오히려 이 점이 더 중요하게 평가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것은 핵심 저자인 리치와 델리야가 다른 사람의 경험이나 견해를 빌려서 쓴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기가 직접 경험하고 느끼고, 연구한 소견을 담은 자료이기 때문에 원문 텍스트에서 읽히는 행간의 의미까지 깊이 있게 통찰할 수가 있다. 이탈리아인 마태오 리치(Matteo Ricci), 중국인 리마두(利瑪竇)의 열정과 성실함을 보면서 한 중국인 학자가 『기인십편』(리치 저) 발문에서 한 말, 리치의 말과 삶이 기이하고, 그야말로 “역설을 사는 사람”이라는 말이 여운으로 남았다. 베네딕토 데 고이스의 묘비명 “카타이를 찾다가 하늘을 발견했다”라는 대목에서는 한국교회의 기원이 떠올랐다. 서학, 서양 학문을 찾다가 천학, 그리스도교를 만난 우리의 이야기 말이다. 저자인 리치와 델리야가 쓴 이탈리아어 특유의 만연체 문장을 최대한 우리말의 통사구조에 맞게 옮기려고 노력했다. 가독성을 생각해서 용어를 쉽게 풀어 쓰려고도 노력했다. - 옮긴이의 말 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