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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장 너머 버베나
작가의 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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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늙은 연인의 밀회 따위가 아니었다. 이 순간의 공기에는 그보다 더 섬뜩하고 잘못된 무언가가 깃들어 있었다. 여자가 자세를 바로잡으면서 등에 가렸던 것들이 서서히 드러났다. 여자의 두 손이 있었고, 두 손 아래에 축축하게 젖은 수건이 있었고, 수건 아래에 그늘이 있었고, 그늘 아래에는 경악으로 부릅뜬 눈이 있었다. 늙은 남자였다. 살갗은 밀랍 인형처럼 미끈하게 덩어리진 느낌이었고, 에나멜 코팅만큼이나 진득한 침이 입가에 번들거렸다. 도무지 살아 있는 것 같지 않았다.
--- p.22 “내가 지금까지 한 이야기를 더해보자. 첫째, 망각은 인간이 자신을 지키는 방식이다. 둘째, 한 인간의 죽음은 다른 인간에게 충격적인 사건이다. 그러면 인간이 죽음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죽은 사람을 잊어버려야 해요.” --- p.27 게다가 패거리가 경찰서에 드나든 것도 절반쯤은 이 자식 때문이었다. 부잣집 도련님들이 수업 도중 도망칠 때 쓰는 샛길을 알려주면서, 지갑이 두둑할 거라고 귀띔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정작 일이 터졌을 때는 아무 책임도 지지 않으려 했다. 한마디로 말해서 얌체 같은 애였다. 하지만 어떤 얌체는 손해 볼 일이라면 무엇이든 피해 가느라 미움마저도 교묘하게 지나치는 듯했다. 얄미움이 진짜 원망으로 변하기 직전에 멈추는 법을, 심술과 장난을 번갈아 건네는 법을 아는 것이다. 마치 본능처럼. --- pp.43~44 소목이 잠자코 신발을 벗자 나울은 창턱을 넘어올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소년은 소녀에게 안겨 부드럽고 풍요로운 더위 속으로 끌려들어갔다. 세제인지 향수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방에서 버베나 꽃 향기가 진동했으며 그 향은 열기의 다른 형태였다. 지옥을 거닐다가 갑자기 꽃이 만발한 천국으로 옮겨진 기분이었다. 새하얀 잠옷과 베갯잇과 이불이 있는 천국. --- pp.47~48 그러니까 죽은 이를 잊는다는 것은 함께했던 시간을 툭 잘라내는 것과는 다르다. 그건 오히려 시간을 아주 빠르게 감아서 핵심만을 남기는 일에 가깝다. 부패한 시체가 뼈다귀로 변하듯이, 현존은 망각을 거쳐 이야기의 씨앗으로 변한다. 삶의 역동에 비하면 훨씬 간략하고 명쾌한 이야기로. 영웅의 업적은 교과서 한 단락으로 움츠러들고 위대한 제왕의 삶조차 두 페이지 분량으로 쭈그러들고 만다. --- p.84 “추운 거 알면서 왜 그렇게 입고 나왔어?” 질문을 던지기도 전부터 소목은 자기 외투를 벗어 건네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처음부터 나울의 외투였다. 나울은 고맙다는 말도 없이 태연스레 외투를 걸치더니 또 웃었다. 여자애들은 원래 웃음이 많다지만 이 여자애는 정말로 실없이 웃는다. 자기에게 외투를 돌려준 상대가 누구든지 간에 그럴 것이다. 그러면 그 누구는 괜한 생각을 하겠지. --- p.52 |
“기억한다는 건 함께한다는 거고, 존재한다는 건 기억된다는 거래.”
소중한 존재를 잃고 싶지 않은 소년과 소녀가 상실을 받아들이는 법 《개의 설계사》 《세계는 이렇게 바뀐다》 단요 신작 단편소설 2022년 청소년 소설 《다이브》로 작품 활동을 시작하여 2023년 문윤성SF문학상과 박지리문학상을 동시에 수상하며 독보적인 존재감을 드러내고 가장 주목받는 신예 작가로 자리매김한 단요의 신작 소설 《담장 너머 버베나》가 위즈덤하우스의 단편소설 시리즈 위픽으로 출간되었다. 인적이 끊긴 지 오래된 2층짜리 벽돌집 담장 아래 소년들이 숨어든다. 밤을 새우기 위해 누군가는 용기를 내 집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때. 가장 작고 가벼운 소년 ‘소목’이 등 떠밀려 나무를 타고 올라가 2층 창문을 들여다보고, 그곳에서 소목은 난생처음 죽음을 두 눈으로 목격한다. 소목이 사는 세계는 죽음을 기준으로 나뉘어 죽음을 겪거나 겪지 못한 자, 죽음으로 인해 변하거나 변하지 않은 자들이 서로를 곁눈질하며 살아간다. 많은 이들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망각을 선택하고, 이들은 죽은 사람을 잊어버리거나 좋을 대로 기억하는 방식으로 망자를 취한다. 반면 어떤 죽음을 영영 잊지 못하는 사람들은 ‘바깥자리’로 밀려나 형사나 탐정, 공증인이 되거나 비극의 주인공이나 낭만적인 연인이 되어 기억을 다루는 일들을 한다. 폐가에서 죽음을 목격하고 뛰쳐나가는 소목의 뒤로 죽음에 관한 기억들이 따라붙는다. 한참을 달린 소목이 이른 곳은 폐가와는 달리 생명력으로 가득한 또 다른 2층 주택. 소목이 유일하게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나울’이 살고 있다. 4년 전 공원에 불현듯 나타난 소녀는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은 뒤 사라졌고, 소목이 나울의 흔적을 쫓다 포기할 무렵 소목을 제외한 모든 기억을 잊어버린 채 다시 소년 앞에 섰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죽음을 잊을 수 없었던 소년과 죽음을 잊어버린 소녀. 나울은 소목에게 기억학 숙제를 위해 노인이 죽은 폐가로 자신을 데려가달라고 조른다. “기억한다는 건 함께한다는 거고, 존재한다는 건 어떤 형태로인가 기억되는 거래.” 소중한 존재를 잃고 싶지 않은 소목과 나울 두 사람은 상실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고자 다시 한번 담장 위로 올라선다. ‘단 한 편의 이야기’를 깊게 호흡하는 특별한 경험 위즈덤하우스는 2022년 11월부터 단편소설 연재 프로젝트 ‘위클리 픽션’을 통해 오늘 한국문학의 가장 다양한 모습, 가장 새로운 이야기를 일주일에 한 편씩 소개하고 있다. 구병모 〈파쇄〉, 조예은 〈만조를 기다리며〉, 안담 〈소녀는 따로 자란다〉, 최진영 〈오로라〉 등 1년 동안 50편의 이야기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위픽 시리즈는 이렇게 연재를 마친 소설들을 순차적으로 출간하며, 이때 여러 편의 단편소설을 한데 묶는 기존의 방식이 아닌, ‘단 한 편’의 단편만으로 책을 구성하는 이례적인 시도를 통해 독자들에게 한 편 한 편 깊게 호흡하는 특별한 경험을 선사한다. 위픽은 소재나 형식 등 그 어떤 기준과 구분에도 얽매이지 않고 오직 ‘단 한 편의 이야기’라는 완결성에 주목한다. 소설가뿐만 아니라 논픽션 작가, 시인, 청소년문학 작가 등 다양한 작가들의 소설을 통해 장르와 경계를 허물며 이야기의 가능성과 재미를 확장한다. 시즌 1 50편에 이어 시즌 2는 더욱 새로운 작가와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시즌 2에는 강화길, 임선우, 단요, 정보라, 김보영, 이미상, 김화진, 정이현, 임솔아, 황정은 작가 등이 함께한다. 또한 시즌 2에는 작가 인터뷰를 수록하여 작품 안팎으로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1년 50가지 이야기 축제를 더욱 풍성하게 펼쳐 보일 예정이다. 위픽 시리즈 소개 위픽은 위즈덤하우스의 단편소설 시리즈입니다. ‘단 한 편의 이야기’를 깊게 호흡하는 특별한 경험을 선사합니다. 이 작은 조각이 당신의 세계를 넓혀줄 새로운 한 조각이 되기를, 작은 조각 하나하나가 모여 당신의 이야기가 되기를, 당신의 가슴에 깊이 새겨질 한 조각의 문학이 되기를 꿈꿉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