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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의 조선 당쟁사
‘주자학’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야만과 퇴행의 역사 양장
이한우
21세기북스 2025.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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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top100 3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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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머리말: 조선 당쟁과 주자학의 역학관계
들어가는 말: 조선(朝鮮)의 탄생과 성리학의 역할

제1부 당쟁의 근원

제1장 당쟁의 뿌리, 주희
제2장 송나라 도학자(道學者)들의 정치 도구 ‘국시(國是)’를 들여오다
제3장 주자학자들의 도통(道統) 타령에 숨은 뜻

제2부 선조, 조선 당쟁의 본격화

제4장 왜 하필 선조 때 당쟁의 불꽃이 피어올랐나?
제5장 동인과 서인이 부침(浮沈)하는 선조 전반기
제6장 서인의 행동대장 조헌이 소를 올려 조정을 뒤흔들다
제7장 정여립의 난에 숨어 있는 비밀
제8장 동인의 소멸, 집권 서인의 몰락
제9장 임진왜란과 당쟁

제3부 당쟁의 시대, 신하의 나라

제10장 당쟁 최대 수혜자이자 피해자인 북인 영수 정인홍
제11장 문묘 종사(文廟從祀)의 정치학
제12장 교하 천도론과 궁궐 조성, 장릉 천장에 숨겨진 치열한 당쟁
제13장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몰락하고 서인이 득세하다
제14장 인조반정으로 ‘신하 나라’ 조선이 탄생하다
제15장 당인(黨人) 이귀의 정치적 이력
제16장 인조 시대 서인의 분열

제4부 탕평의 실패

제17장 효종 때 본격 산림 정치 시대가 열리다
제18장 현종 때 생사를 건 두 차례 예송(禮訟) 논쟁이 일어나다
제19장 서인 영수 송시열을 제압하는 어린 임금 숙종의 강명(剛明)
제20장 당인(黨人) 송시열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네 장면
제21장 숙종 때 이합집산하는 신하들
제22장 말년의 숙종, 소론에서 노론으로 기울다
제23장 영조 탕평책의 허와 실
제24장 정조 탕평책의 허와 실

나가는 말: 비변사와 당쟁

저자 소개1

LEE,HAN-WOO,李翰雨

1961년 부산 송도해수욕장 근처에서 태어나 여름만 되면 팬티만 입고 송도해수욕장을 오가던 개구장이였다. 중학교 때는 가방에 책 대신 야구 글러브를 넣고 다닐 정도로 야구에만 미쳐 있었고, 고등학교 때는 영화 [친구]에 나오는 교사 못지않은 선생님들한테 자주 맞아 졸업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1981년 고려대학교에 입학해 데모하다 얻어맞는 여학생을 보고 충격을 받아 학생운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겁이 많아서인지 결국 혁명가의 꿈을 접고 공부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1985년 대학원에 들어가 철학을 공부했다. 마르크스에 대한 미련이 컸지만 대학원 과정 때 우연히 접하게 된 하이데거에
1961년 부산 송도해수욕장 근처에서 태어나 여름만 되면 팬티만 입고 송도해수욕장을 오가던 개구장이였다. 중학교 때는 가방에 책 대신 야구 글러브를 넣고 다닐 정도로 야구에만 미쳐 있었고, 고등학교 때는 영화 [친구]에 나오는 교사 못지않은 선생님들한테 자주 맞아 졸업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1981년 고려대학교에 입학해 데모하다 얻어맞는 여학생을 보고 충격을 받아 학생운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겁이 많아서인지 결국 혁명가의 꿈을 접고 공부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1985년 대학원에 들어가 철학을 공부했다. 마르크스에 대한 미련이 컸지만 대학원 과정 때 우연히 접하게 된 하이데거에 매료되어 석사학위 논문으로 [마르틴 하이데거에 있어서 해석학의 문제]를 썼다.

집안 사정이 어려워 1985년부터 번역을 시작해 첫 작품으로 《헤겔 이후의 역사철학》을 냈다. 그 후 지금까지 평균 1년에 한 권 정도 번역 작업을 해왔다. 심지어 1988년부터 1990년까지 번역병으로 근무할 때에는 네 권을 번역해 계급마다 한 권씩 번역한 셈이 됐다. 번역은 나의 운명을 바꿔놓기까지 했다. 1990년 제대 후 아르바이트를 하기 위해 찾아간 곳이 [중앙일보]의 《뉴스위크》였다. 그때 정식기자로 일하지 않겠냐는 제의를 받고 ‘번역하는 기자’로 첫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기자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는데 삶은 점점 그쪽으로 몰고갔다. 1991년 《월간중앙》에 김용옥의 《대화》를 비판한 것이 계기가 돼 [문화일보] 학술 담당기자로 자리를 옮겼다. ‘번역하는 기자’에서 ‘기사 쓰는 기자’로 탈바꿈한 것이다. [문화일보] 기자 생활 만 3년째 되던 1994년 12월에 [조선일보]의 제의를 받았다. [조선일보] 학술 출판 담당기자로 일하면서 한국 지식인 사회의 명암을 볼 수 있을 만큼 봤다. 2001년부터 1년 동안 독일 뮌헨에서 연수 생활을 하면서 촌티도 많이 벗었다. [조선일보] 국제부에서 일했고, 지금은 경제사회연구원 사회문화센터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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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5년 04월 02일
판형
양장 ?
쪽수, 무게, 크기
516쪽 | 152*225*35mm
ISBN13
9791173571626

책 속으로

이렇게 되면 임금과 재상의 관계도 바뀐다. 국시 이전에는 사안별로 임금이 옳고 그름을 판단했다면 국시 이후에는 임금이 한쪽 당을 고르는 권한만 있고 옳고 그름을 판정하는 권한은 그 당에 속하게 된다. 당연히 누가 군자이고 누가 소인인지도 임금이 아니라 당이 결정한다. 임금의 권한은 그저 자기가 선택한 당을 군자당, 선택을 받지 못한 당을 소인당으로 삼는 것뿐이다.
---「제2장 | 송나라 도학자(道學者)들의 정치 도구 ‘국시(國是)’를 들여오다 - 85쪽」중에서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사헌부·사간원에 포진해 있던 동인 세력들의 일대 반격이 시작됐다. 이이의 불교 관련설, 이이의 형이 연루된 불미스러운 소문 등이 모두 까발려졌다. 또 박순·이이·성혼은 모두 심의겸의 문객이라고 몰아세웠고 박순과 이이는 성혼을 ‘산림고사(山林高士)’라고 치켜세우고 반대로 성혼은 박순과 이이를 일러 ‘일대현신(一代賢臣)’이라고 찬사를 보내는 등 서로 노는 꼴이 볼 만하다고 인신공격성 공세를 강화했다. 선조는 단호했다.
---「제5장 | 동인과 서인이 부침(浮沈)하는 선조 전반기 - 150쪽」중에서

당초 동서 붕당이라고 할 때 동인 쪽에는 이황과 조식의 문인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었고 서인 쪽에는 이이·정철·성혼의 문인들이 포진해 있었다. 이후 세자 건저의 사건을 계기로 서인에 대한 일대 숙청이 이뤄져 서인들은 인조반정을 일으킬 때까지는 권력 중심에서 철저하게 소외되었다. 대신 정여립 사건과 겹쳐서 서인에 대한 치죄(治罪)의 정도를 놓고 동인 내부에서 온건파와 강경파가 분열하게 되었다. 이황 계통의 사람들은 온건파인 남인을 형성했고 조식 계통의 사람들은 강경파인 북인을 형성했다. 임진왜란 때도 류성룡이 이끄는 남인은 화친을 주장했고 이산해가 이끄는 북인은 주전론을 내세웠다.
---「제9장 | 임진왜란과 당쟁 - 225쪽」중에서

인조 정권은 절대다수 서인과 극소수 남인 참여로 이뤄졌다. 그런데 문제는 정사공신 책봉과 더불어 이미 서인 내에 큰 균열이 생겼다는 것이다. 정변에 참여한 서인은 공서(功西), 정변에 참여하지 않은 서인은 청서(淸西)로 나뉘었다. 공서는 아무래도 인조의 뜻을 받들며 통치 안정을 위해 남인이나 심지어 북인까지도 정권에 참여시키려 했다. 청서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차지해야 할 자리를 다른 당파가 가져간다는 것은 안 될 말이었다. 그 중심인물이 김상헌(金尙憲, 1570~1652년)이다.
---「제14장 | 인조반정으로 ‘신하 나라’ 조선이 탄생하다 - 304~305쪽」중에서

그러나 이미 단 한마디로 정곡을 찌르는 일언가파(一言可破)의 숙종은 제4라운드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단하의 수정본을 읽은 숙종은 “(영의정 김수흥이) 선왕(先王)의 은혜를 망각하고 (송시열이 제기한) 다른 의논을 부탁했다는 말이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 실려 있는데 지금 이 행장에는 끝내 싣지 않았으니, 이는 무슨 뜻이냐?”고 몰아세웠다. 마침내 이단하로서는 피하려야 피할 데가 없었다.
---「제19장 | 서인 영수 송시열을 제압하는 어린 임금 숙종의 강명(剛明) - 397쪽」중에서

이처럼 정조는 탕평으로 새로운 정치를 꿈꾸었지만 특정 당파 앞에 사실상 굴복하면서 자기 시대를 마무리했다. 게다가 안동 김씨 김조순(金祖淳, 1765~1832년)과 사돈을 맺어 안동 김씨 외척 정치 시대를 본인 손으로 열어놓았다. 그로 인해 당쟁 시대가 끝나고 외척 세도정치 시대가 열렸다.

---「제24장 | 정조 탕평책의 허와 실 ? 508쪽」중에서

출판사 리뷰

주자학의 전파와 함께 선조 때 시작된 당쟁의 역사
“유암한 군주 아래, 그들만의 나라를 꿈꾸다!”

당쟁의 기원에 대해 대표적인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는 중종반정 이후 공신으로 자리 잡은 훈구파와 새롭게 정치에 진출한 신진 사림파의 대립을 당쟁의 출발점으로 보는 시각이다. 그러나 실제로 당쟁은 훈구파와 사림파의 단순한 대결이 아니었다. 사림 내부의 투쟁, 즉 온건 사림과 급진 사림 간의 충돌과 이합집산이 핵심이었다. 둘째는 선조 때 이조전랑(吏曹銓?) 추천 문제를 둘러싼 동인과 서인의 대립을 당쟁의 시작으로 보는 견해다. 하지만 동인과 서인의 분열 자체가 중요한 것이었지, 이 충돌은 당쟁의 일부에 불과했다. 따라서 이 두 가지 견해만으로는 당쟁의 본질을 설명하기 어렵다.

조선 당쟁은 주자학의 전래와 함께 시작되었다. 선조 대에 이르러 주자학이 본격적으로 확산되면서 당쟁의 불씨가 지펴졌다. 공자의 정치철학을 담은 『논어』와 『주역』의 핵심인 ‘강명한 군주론’ 아래에서는 군주를 배제한 신하들 간의 당파 싸움은 원천적으로 부정된다. 즉, 강명한 군주가 존재하는 한 당쟁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공자의 철학을 다르게 해석한 주자학이 전파되고 조선 사대부들의 의식을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당쟁은 있을 수 있는 일이자 당연한 일로 변했고, 왕이 중용한 신하에 대해 ‘소인’이라는 낙인을 찍으며 불경(不敬)조차 서슴지 않았다. 주자학의 시대가 곧 당쟁의 시대가 된 것이다.

이 책은 이렇듯 조선의 당쟁을 단순한 권력 다툼이 아니라, 사상적 변화와 구조적 문제에서 비롯된 필연적 결과로 바라본다. 당쟁의 본질과 그 파급력을 깊이 파고들며, 역사적 사건을 통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교훈을 전한다.

권력을 잡은 당파는 결국 분화하고,
탕평이 무너진 자리에 척신 의존 정치만이 남다!

조선의 정치에는 선조 이전부터 주자학적 관념이 깊숙이 자리하고 있었다. ‘국시(國是)’ 와 ‘공론(公論)’ 을 바탕으로 임금과 사대부가 함께 나라를 다스린다는 원칙이 유지되었다. 그러나 적통(嫡統)이 아닌 선조가 즉위하고, 주자학자들이 정치에 본격적으로 개입하면서 당쟁이 본격화되었다. 선조가 기묘사화로 희생된 조광조에게 시호를 추증한 것은 사림 세력의 복권이자 당쟁의 서막이었다.

당쟁의 핵심은 권력 장악 여부였다. 선조 대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분열한 이후,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북인은 다시 소북과 대북으로 나뉘며 권력을 놓고 끊임없이 충돌했다. 반정과 왕권 변화에 따라 서인은 정권을 잡았지만, 내부에서 소론, 노론, 시파, 벽파 등으로 분화되며 당쟁은 더욱 복잡해졌다.

당쟁이 지속된 이유는 정치적 형세와 인적 자원 때문이었다. 서인-노론-벽파 계열에 인재가 몰리면서 지속적으로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고, 왕 역시 이들에게 의존하면서도 자신의 세력을 만들려 했다. 이 과정에서 서인 내부에서는 소론, 노론 내부에서는 시파가 분리되는 등 당쟁은 끊임없이 재편되었다.

조선 임금들도 당쟁을 극복하려 했다. 영·정조는 ‘탕평’을 내세웠지만 방식이 달랐다. 영조는 당파 간 균형을 맞추려 했고, 정조는 왕권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접근했다. 그러나 두 임금 모두 집권 후반부로 갈수록 척신 정치에 의존하는 모습을 보이며 당쟁을 완전히 해결하지는 못했다.

조선 당쟁사의 흐름을 날카롭게 파헤친 저자의 연구와 통찰을 통해 우리는 당쟁의 본질을 이해하고, 오늘날의 정치적 갈등과 권력 구조를 성찰할 수 있다. 당쟁이 조선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또 무너뜨렸는지 돌아볼 때, 현재의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 있다. 당쟁의 역사는 과거의 일이기만 한가? 혹은, 우리는 같은 문제를 다른 방식으로 반복하고 있지는 않은가?

리뷰/한줄평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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