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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6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 제6
권7 항우본기(項羽本紀) 제7 권8 고조본기(高祖本紀) 제8 권9 여태후본기(呂太后本紀) 제9 권10 효문본기(孝文本紀) 제10 권11 효경본기(孝景本紀) 제11 권12 효무본기(孝武本紀) 제12 |
LEE,HAN-WOO,李翰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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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고가 전에, 일찍이 호해에게 글과 감옥의 율령, 법률과 관계된 일을 가르친 바가 있어서 호해는 개인적으로 조고를 총애했다[幸之]. 고(高)는 마침내 공자 호해, 승상 사와 음모를 꾸며서 시황이 봉해둔 공자 부소에게 보낸 편지를 뜯고 부순[破去] 뒤, 승상 사가 사구에서 시황의 유조(遺詔)를 받은 것처럼 해서 아들 호해를 세워 태자로 삼았다. 또 공자 부소와 몽염(蒙恬)에게 보내는 편지도 조작해서 만들어, 죄목을 열거하며[數] 이에 죽음을 내렸다[賜死]. 이 이야기는 「이사열전(李斯列傳)」에 갖춰져 있다.
---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 제6」 중에서 항왕은 한밤중에 일어나 장막 안에서 술을 마셨다. 우(虞)라는 이름의 미인(美人-후궁의 호칭)이 있어 늘 총애를 받으며 따라다녔고 또 추(騅)라는 이름의 준마가 있어 늘 그것을 타고 다녔는데, 항왕이 마침내 강개한 심정으로 스스로 시를 지어 읊었다. “힘은 산을 뽑고 기개는 온 세상을 덮을 만한데[力拔山兮氣蓋世] 때가 불리하니 추(騅)가 나아가지 않는구나![時不利兮騅不逝] 추가 나아가지 않으니 어찌해야 할까?[騅不逝兮可奈何] 우(虞)야! 우야! 너[若=汝]는 어찌할꼬?[虞兮虞兮奈若何]” 노래를 여러 차례 부르니 미인이 창화(唱和)했다[和之]. 항왕이 몇 줄기[數行] 눈물을 흘리자, 좌우에 있던 자들도 모두 눈물을 흘렸고, 아무도 우러러 쳐다볼 수가 없었다. --- 「항우본기(項羽本紀) 제7」 중에서 태사공(太史公)이 말한다. “효혜황제와 고후 때는 여민(黎民-백성)이 전국시대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군주와 신하가 모두 억지로 일삼지 않는 원칙[無爲] 속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혜제는 팔짱만 끼고 있고 고후가 여자 군주로서 황제를 대행할[稱制] 때도 모든 정치가 안방을 나서질 못했으나 천하는 편안했다[晏然]. 형벌을 쓰는 일도 드물었고, 죄인도 이에 드물었다. 백성이 농사에 힘을 쓰니, 입고 먹는 것이 갈수록 풍족해졌다[滋殖].” --- 「여태후본기(呂太后本紀) 제9」 중에서 효문황제께서 천하를 다스리실 때는 (지역을 가로막는) 관문과 다리[關梁]를 두루 통하게 하셨고 먼 나라라고 해서 달리 여기지 않으셨다. 비방죄와 육형을 폐기하시고 장로들에게 큰 상을 내리셨으며, 고아와 자식 없는 늙은이를 거둬 진휼함으로써 그 은택이 뭇 백성에게까지 미치게 하셨다. 즐거움과 욕심을 줄이시고[減] 헌상하는 것을 받지 않으셨으며, 형벌이 처자식에게는 미치지 않게 하시고[不帑] 죽을죄라도 주살하지 않으셨다. 이익을 사사롭게 취하지 않으셨고, 궁형(宮刑)을 폐기하셨으며, 미인들을 궁 밖으로 내보내셨고, 뛰어난 사람들[絶人]을 중하게 여기는 세상을 만드셨다. --- 「효문본기(孝文本紀) 제10」 중에서 건장궁(建章宮)을 지을 때는 규모가 천문만호(千門萬戶)였다. 전전(前殿)의 크기도 미앙궁(未央宮)보다 높았다. 그 동쪽에는 봉궐(鳳闕)이 있었는데 높이가 20여 장(丈)이었고, 그 서쪽에는 당중(唐中)이 있었는데 둘레가 몇십 리나 되는 호권(虎圈)이 있었다. 그 북쪽에는 대지(大池)와 점대(漸臺)를 만들었는데, 대(臺)는 높이가 20여 장으로 그 이름을 태액(泰液)이라 했으며, 못 가운데는 봉래(蓬萊)·방장(方丈)·영주(瀛洲)·호량(壺梁)의 섬들을 두고 바다에 있는 신산(神山)·거북·물고기 따위의 상징을 배치했다. 그 남쪽에는 옥당(玉堂), 벽문(璧門), 큰 새 등의 조각이 있었다. 이에 신명대(神明臺)와 정한루(井幹樓)를 세웠는데, 높이가 50장이 넘었고 수레가 다니는 길[輦道]이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 「효무본기(孝武本紀) 제12」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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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들이 탐독한, 시대를 뛰어넘는 위대한 통찰
공자를 계승하여 ‘군군신신(君君臣臣)’에 초점을 맞춘 역사 읽기 『사기』는 핵심적인 면에서 공자 사상과 맞닿아 있다. 즉, 군군신신(君君臣臣)의 원리를 밝히는 데 서술의 원칙을 두었다. 그 구성을 보면, ‘본기’는 황제, ‘세가’는 제후, ‘열전’은 신하의 기록이다. 여기서 제후는 신하인 동시에 임금이다. 이렇듯 사마천이 파악한 역사는 나라의 기록이며 군신(君臣)의 기록이다. 군신 간의 의견 충돌과 의견 합치 등을 빚어내는 인간 내면을 조명한다. 그래서 사기는 2000년이라는 시간 거리를 뛰어넘어 지금도 펄떡펄떡 생동감이 넘친다. 또한, 사리(事理)와 사세(事勢), 정(正)과 중(中), 예(禮)와 명(命)의 차이를 분명하게 밝히며, 공자의 현실주의적 제왕학을 계승한다. 사리(事理)는 상도(常道)와 정(正)과 예(禮)로, 사세(事勢)는 권도(權道)와 중(中)과 명(命)으로 흐른다. 사마천은 역사 서술을 통해 임금이란 기본적으로 권도를 발휘하는 자리이고, 신하는 상도를 따르는 자리임을 분명히 드러냄으로써 공자 사상의 본질을 관통하고 있다. 「본기(本紀)」: 역대 제왕들의 행적 천하를 실질적으로 지배했던 항우나 여태후를 포함하는 파격 「본기(本紀)」에서는 전설 속의 황제부터 사마천이 살았던 당대인 한 무제 시기까지 역대 제왕들의 행적을 시간 순서대로 기록했다. 정치사의 핵심이자 국가의 근간이 되는 연대기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단순히 황제들의 기록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마천은 제왕뿐만 아니라 천하를 실질적으로 지배했던 항우나 여태후를 본기에 포함하는 파격적인 구성을 선택했다. 형식적인 지위보다 역사의 실제 주도권을 중시하는 실제적이고 독창적인 역사관을 보여준 것이다. 「본기」는 권1-1권12이며 총 12권이다. 『이한우의 사기 (2)』는 「본기」 두 번째 책으로 권6-권12를 옮겼다.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 최초로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의 업적과 진나라의 멸망까지 항우본기(項羽本紀): 진나라 멸망 후 실질적인 패권을 잡았던 항우의 기록 고조본기(高祖本紀): 한나라를 세운 유방(한 고조)의 파란만장한 성공 신화와 건국사 여태후본기(呂太后本紀): 여태후가 고조 사후 실권을 잡고 통치한 시기의 기록 효문본기(孝文本紀): 한나라의 기틀을 다진 성군 문제(文帝)의 기록 효경본기(孝景본기): 문제의 뒤를 이어 문경의 치를 완성한 경제(景帝)의 기록 효무본기(孝武本紀): 사마천 당대의 황제이자 한나라의 전성기를 이끈 무제(武帝) 시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