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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 앞에는 늘 커다란 괄호
알맞은 의미를 찾은 후에야 가능해지는 마음들 김화진 소설가는 다른 사람들이 [주머니]에 숨긴 건 알 수 없어도 주머니가 있다는 사실은 잊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주머니’를 인식하는 것, 그리고 함께 고른 [실망]과 [변심] 모두 ‘사람을 궁금해하는 마음’ 안에서 이루어진다. 황유원 시인은 지속적인 고양감에 머물 수 있는 [고원]의 감각을 꿈꾸며 이를 삶과 시에 빗대는데(“고원에 올라 산책하면 어느 정도 높은 강도를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다. 지속적인 고양감 속에 머무를 수 있다. 하지만 언젠가는 고원에서도 내려가야 하는 게 우리의 인생”), 만년필이라는 창을 들고 교정지로 돌진하는 [프리랜서] 번역가이자 소속란을 쓸 일이 있으면 맞닥뜨리게 되는 [무소속]이라는 감각 앞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결연함과 쓸쓸함에 대해서도 현실감 있게 포착해낸다. 포개진 셔츠에서 [포옹]을 떠올린 정용준 소설가는 나와 너의 틈을 포옹으로 메우려는 시도에서 필연적으로 알게 될 서러움에 대해 알려준다. “더럽게 서글픈 떨어짐과 헤어짐”이 없느냐고 되묻는 장면에서 독자는 지금껏 안겨온·안아온 날들을 떠올리게 된다. 스스로를 다그치지 않고 “극도의 편안함을 추구”하기 위해 임선우 작가는 [인간만두]라는 단어를 만들어낸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고 자신이 만두소가 되었다고 상상하면 누구나 ‘인간만두’가 될 수 있다. 주변을 성실히 살피는 태도의 [본느], 안녕을 기원하는 [하지].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분법적으로 구획되는 ‘쓸모’에 대해 생각하는 [토머슨]도 있다. 이십사절기 중에서 낮이 가장 길고 밤이 가장 짧은 시기인 하지. (……) 낮과 밤이 공존해야 하는 것이 삶이라면, 최대한 밝게 살았으면 해서. (……) 이 땅에서 나름대로 살아가는 모든 생명에게, 삶이 부디 하지와도 같기를 바란다. _임선우, 〈하지〉, 90~93쪽. 권누리 시인은 자신이 단어를 다루는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게 된 계기로 어릴 적 엄마와 했던 끝말잇기를 든다. 상대가 계속 단어를 이어갈 수 있도록 배려하며 지속하던 끝말잇기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얘기하면서, 자신이 말놀이[펀pun]라는 유산을 “꼭 쥔 채 성장했음을” 고백한다. 김선형 번역가는 자신을 “울창하고 낯선 텍스트의 숲 어귀에 서서 막막하게 안을 들여다보던 이방인”이었다고 말한다. 낯선 단어를 알아가는 일은 개인의 “역사, 차이와 기벽에 부딪혀” 이탈되고 일탈하는 일이라면서, 이는 여전히 생경하지만 때로는 “영롱하다고, 경이롭다고”, “꼭 나만 아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김복희 시인은 함께하는 일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단어들을 골랐다. 죽을 때까지 피할 수 없는 [빛]은 윤동주 시인의 〈십자가〉에 있는 “쫓아오는 햇빛”으로 옮아가고, 인간적인 고통과 함께 살아가는 일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생명 반응이 없는(하지만 아닐 수도 있는) [귀신]이나 [인형]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서도. 빛은 저만을 위한 것이 아니랍니다. (……) 당신도 저도 죽는 날까지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빛과. _김복희, 〈빛〉, 158쪽. 어딘가 쓸쓸한 [명왕성]을 시로 쓰는 데는 포기했지만 여전히 어떤 비유로 명왕성을 이해하는 유선혜 시인은 자립하지 못하는 감각, 혼자서는 비어 있는 느낌으로 [것]에 대해 말하며, “끝내 빈칸을 채우지 못해 일인분의 몫을 견디지 못하는 의존명사로 남을까” 두려워서 글을 쓰는 걸지도 모른다고 자문한다. “미완성인 문장과 까마득한 괄호에 어울리는 의미” 발견하려고. 일본어, 북한어, 그리고 아리송한 요정의 주문 같은 단어를 보내온 정수윤 번역가는 [루리]라는 단어로 이름과 삶의 태도를 살핀다(“그러다가 루리를 발견했다. 루리의 빛도 닦기 나름. 나도 닦으면, 열심히 갈고닦으면, 빛이 날까, 반짝일까”). 김서해 소설가는 “슬픔을 말하는 단어가 있을 뿐 슬픈 단어는” 없다고 말하며, 어제 좌절해도 오늘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쥐여주기 위해 [흉충]이라는 말을 만든다. “하루 중 반짝거리는 기쁨의 한 조각을 얻었기에 그 밖의 긴긴 시간을 버틸 수 있었다.” 10명의 작가는 자신에게 흐르던 의미로 단어를 꿰어 보여준다. 이는 《나만 아는 단어》를 읽는 독자에게 송부하는 남김없이 아름다운 고백이다. 자기만의 ‘나만 아는 단어’를 쓰게 될 독자가 조심조심 걸을 수 있도록 “좋은 계단”을 놓아주는 마음이다. 작가들이 자신의 서사로 단어와 의미를 해체하고 실컷 헤집었듯 독자 역시 자신만이 지닌 ‘나만 아는 단어’ 안에서 입고 마시고 덮고 꿈꾸시기를. 희망이 필요하다면 발명하시기를(“빛은 희망이 필요한 이의 발명”) 위로가 필요하다면 꽉 안고 절대 놓지 마시기를(“안고 있는데 안고 싶다. 안겨 있는데 안겨 있고 싶다”). 차곡차곡 쌓아갈 ‘나만 아는 단어’를 갖고 새롭게 시작된 한 해를 풍요롭게 건너가시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