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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배움은 어리석을수록 좋다 : 수업론, 난관을 돌파하는 몸과 마음의 자세 - 아우름 05
수업론 : 난관을 돌파하는 몸과 마음의 자세 EPUB
샘터 2015.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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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목차

차례
여는 글 ? 한국 독자들에게
‘나’라는 감옥에서 벗어나는 길


0장. 초보 수업자를 위한 안내서
지금 왜 수업을 말하는가?

보상도 없고 처벌도 없다 / 해낸 후에야 알 수 있는 수업의 의미 / 수업은 ‘신체 단련’이 아니다 / 결승점을 알 수 없는 미지의 트랙을 달린다


1장. 난관을 돌파하는 삶의 자세, 하나
무도와 수업, 두려워 말고 머물지 말고

무엇을 어떻게 수업할 것인가
무적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무적이 되는가
‘약함’을 연구하다
‘안주’에서 벗어나기
생활 속에서 익히고 닦는 수련


2장. 난관을 돌파하는 삶의 자세, 둘
명상과 수업, 나 아닌 다른 사람이 되는 능력

명상이란 적절한 액자를 고르는 것
무도가가 본 명상의 이치
명상과 무도,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들


3장. 난관을 돌파하는 삶의 자세, 셋
신앙과 수업, 살아 움직이는 몸에서 시작하라

레비나스와 합기도
보이지 않는 것을 기다리는 마음
나를 사로잡은 레비나스의 변신론
희미한 신호를 감지하려는 노력
예배당을 청소하는 의미
성숙해진다는 것


닫는 글
세상에서 가장 약한 무도가가 살아가는 힘


저자 소개2

우치다 타츠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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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tsuru Uchida,うちだ たつる,內田 樹

‘거리의 사상가’로 불리는 일본의 철학 연구가, 윤리학자, 무도가. 도쿄대 불문과를 졸업한 뒤 에마뉘엘 레비나스를 발견해 평생의 스승으로 삼고 프랑스 문학과 사상을 공부했다. 도쿄도립대를 거쳐 고베여학원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가 2011년 퇴직하고 명예교수가 되었고 현재는 교토 세이카대학의 객원교수로 있다. 글을 통해 70년대 학생운동 참가자들이나 좌익 진영의 허위의식을 비판해 스스로를 ‘업계 내에서 신보수주의자로 분류되는 것 같다’고 하지만 헌법 9조 개정에 반대하고 아베 내각을 ‘독재’라는 강한 표현으로 비판하고 있고, 공산당 기관지와의 인터뷰에서 ‘마르크스의 가르침의 가장
‘거리의 사상가’로 불리는 일본의 철학 연구가, 윤리학자, 무도가. 도쿄대 불문과를 졸업한 뒤 에마뉘엘 레비나스를 발견해 평생의 스승으로 삼고 프랑스 문학과 사상을 공부했다. 도쿄도립대를 거쳐 고베여학원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가 2011년 퇴직하고 명예교수가 되었고 현재는 교토 세이카대학의 객원교수로 있다. 글을 통해 70년대 학생운동 참가자들이나 좌익 진영의 허위의식을 비판해 스스로를 ‘업계 내에서 신보수주의자로 분류되는 것 같다’고 하지만 헌법 9조 개정에 반대하고 아베 내각을 ‘독재’라는 강한 표현으로 비판하고 있고, 공산당 기관지와의 인터뷰에서 ‘마르크스의 가르침의 가장 본질적인 대목, 즉 사물의 근저에 있는 것을 파악한다는 의미에서 래디컬한 정당이 되기를 바란다’고 주문하는 등 진영의 논리를 넘어선 리버럴한 윤리학자의 면모가 강하다.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이라는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고 현재까지 공저와 번역을 포함해 100권이 넘는 책을 펴냈다. 2011년 그간의 저술 활동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놀랍고, 재미있고,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을 모토로 삼은 이타미 주조상을 수상했다. 주요 저서로 『망설임의 윤리학』 『레비나스와 사랑의 현상학』 『어른이 된다는 것』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 『사가판 유대문화론』(고바야시 히데오상 수상) 『하류 지향』 등이 있고 정신적 스승인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곤란한 자유』 『초월, 외상, 신곡-존재론을 넘어서』 『폭력과 영성』 『모리스 블랑쇼』 등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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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명대학교 일어일문학과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외국어전문학교 일한 통번역학과를 졸업했다. 일본도서 저작권 에이전트로 일했으며, 현재는 출판 기획자 및 전문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옮긴 책으로는 『니체의 말』, 『아들러 심리학을 읽는 밤』, 『배움은 어리석을수록 좋다』, 『사람들 앞에 서는 게 두려워요』, 『고양이가 추천하는 초보 집사의 필수 냥독서』, 『당신이 오래오래 곁에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바로 지금! 사이다 발언이 필요한 타이밍』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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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15년 05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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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용량
EPUB(DRM) | 2.50MB ?
ISBN13
9788946471078

책 속으로

다행히 나는 25세 때 합기도의 다다 히로시(多田宏) 선생님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내게 ‘삼장법사’ 같은 분이었지요. 무엇보다 그때 나는 진심으로 경의를 표할 수 있는 연장자와 참으로 오랜만에(어쩌면 태어나 처음으로) 만났습니다. 그때의 안도감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나쁜 짓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가슴을 쓸어내렸지요(참 이상하지요. 특별히 그 누구도 내게 나쁜 짓을 하라고 강요한 것도 아닌데 말이죠).
여하튼 다다 선생님과 만나 합기도라는 ‘뭔지 모르는 것’을 수업하게 되었습니다. 선생님도 ‘뭔가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은 했지만 대체 어떤 식으로 대단한지는 좀처럼 말로 설명할 수 없었지요.
무도 수업을 시작한 지 40년이 흘렀습니다. 지금도 합기도가 무엇인지 다시금 물어도 잘 모릅니다. 그러나, 바로 그런 것이라 생각합니다. 수업이라는 건 수업하는 주체인 자신이 점차 변화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제 ‘알았던’ 것을 오늘이 되어 ‘알 수 없게’ 되기도 하지요.
(여는 글 - 한국 독자들에게)


한마디로 말해, 수업이라는 것은 ‘닥치고 시키는 대로 하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지금 젊은 사람들에게 그렇게 말해 봤자 일단 알아듣지 못합니다. 무슨 일이든 그 실용성과 가치에 대해서 대략적으로 제시하도록 요구해야 한다고 어린 시절부터 교육받아 왔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이른바 ‘소비자’라 불리는 사람에게는 마땅한 행동입니다. 소비자는 상품에 대하여 반드시 스펙을 요구하게 마련이니까요. 상품을 집어 들고 가장 먼저 묻는 것은 ‘이것은 무엇에 쓰는 물건입니까?’라는 질문입니다. 그런 소비자의 질문을 받고서 ‘써보면 안다’고 답하는 장사꾼은 없겠지요(만약 있다고 해도 그런 상품을 사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용도가 모호한 상품은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여하튼 지금 아이들은 그렇다고 믿습니다. 실제로 가정은 물론 학교에서는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아이들이 무언가를 하려고 하면 ‘그것을 하면 이런 좋은 일이 있다’고 설명하며 이익을 좇아 움직이도록 교육시킵니다.
(지금 왜 ‘수업’을 말하는가?)


적을 없애기 위해서는 적을 없애는 게 아니라 ‘이게 적’이라 생각하는 ‘나’를 지우면 됩니다. 논리적으로 그것으로밖에 풀 수 없습니다.
‘나를 지운다.’
참 말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달성할 수 있을까요?
‘나를 지운 나’에 대하여 자기점검을 하고 얼마만큼 달성했는지를 체크하여 성과가 있다면 자화자찬하는 한 영원히 ‘나’를 벗어던질 수 없습니다. 따라서 자기점검 금지, 자기평가 금지, 자화자찬 금지!
그렇다면 대체 무엇을 단초로 ‘나’의 변화(원하건대 ‘성장’)를 점검할 수 있을까요? (중략)
그것은 일단 ‘의사(意思)를 갖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의사’라고 해도 좋고, ‘계획’이라 해도 좋고, ‘예단’이라 해도 좋고 혹은 ‘쓸데없는 근심’이라 해도 좋습니다. 어떻게 말하든 그것은 미래에 대한 예견을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미래를 예측하지 않는 것’, 그것이 여하튼 무적을 탐구하기 위한 첫걸음을 내디딜 때에 실마리가 되는 ‘나’의 조건입니다.
(어떻게 무적이 되는가)


그것은 오랜 세월 교단에 서면서 깨달은 경험지(經驗知)와도 부합합니다. 대다수 사람들은 학생들의 무지를 두고 지식 부족 때문이라고만 생각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가르치는 입장이 되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학생들은 지식이나 정보, 기술이 부족한 게 아닙니다. 인간은 내버려 둬도 놀랄 만큼 엄청난 기세로 지식을 익히고 정보를 받아들이고 기술을 습득합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배움’에 대한 근원적인 충동이 분명 존재합니다.
무지란, 그것을 방해하는 힘이지요. 배움을 저지하고 억제하려고 부단히 노력합니다.
따라서 많은 사람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대학 교육이란, 무언가 유용한 지식이나 기술을 ‘덧셈’으로 보태는 것이 아닙니다(그렇다고 믿는 교사도 적지 않지만요). 그것이 아니라 ‘배움’에 대한 충동의 자연스러운 발로를 방해하는, 학생들 자신의 ‘무지에 대한 안주’를 해제하는 것이지요.
학교 교육이 달성해야 하는 첫 번째 과제는 학생들의 머리를 지식으로 그득 채우고 끈끈하게 옭아매는, 생동감 넘치는 ‘배움’의 운동을 방해하는 쓰레기 정보를 ‘벗는’ 것입니다.
(‘안주’에서 벗어나기)


여우도 타조도 아닌 방식으로,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만 할까요?
‘명상’이 이 물음에 대한 기술적인 대답이 될 것입니다.
명상이란, 예비적 고찰에서 살펴보았듯이 ‘액자 설정’에 관한 기법입니다. ‘지금?여기?나’라는 부동의 정점에서 벗어나 ‘지금’이 아닌 시간, ‘여기’가 아닌 장소, ‘내’가 아닌 주체의 자리로 이동하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지금?여기?나’가 조우한 사태를 관찰하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이해하고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을 합니다. 그것이 무도적인 의미의 명상입니다.
(무도가가 본 명상의 이치)

--- 본문 중에서

출판사 리뷰

본문 엿보기

여는 글 ? 한국 독자들에게
‘나’라는 감옥에서 벗어나는 길

한국 독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우치다 타츠루입니다. 《배움은 어리석을수록 좋다》를 구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원제목이 《수업론(修業論)》인 이 책은 현대 일본에서는 꽤 ‘반시대적’인 책입니다. ‘시대착오적’이라고 평할 정도이지요. 그러나 그러한 책이 일본에서 꽤 팔린 것을 보면 그런 ‘반시대적’인 교육론에 대한 수요가 어느 정도는 존재한다고 볼 수 있겠지요. 일본의 경우, 학교교육을 맡은 선생님들 사이에서 비교적 호평을 받았습니다. 한국에서도 그럴까요?
이어서 나올 ‘여는 글’에도 썼지만 ‘수업(修業)’이라는 말은 ‘자신이 앞으로 무엇을 배울지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시점에, 무엇을 가르쳐 줄지 좀처럼 알 수 없는 사람 밑에서, 무언지 알 수 없는 것을 배우는’ 이상한 구조를 가집니다. 이것을 ‘개방적이고 역동적’이라 받아들이는가, 아니면 ‘불합리하고 비논리적’이라 받아들이는가로 사람은 ‘수업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갈리지요.
나는 ‘수업하는 사람’입니다. 특별히 ‘수업하는 사람’이 인간으로서 우위에 있고 ‘수업하지 않는 사람’은 그렇지 않다는 건 아닙니다. ‘자신이 하는 일의 의미를 하나부터 열까지 명확히 이해하고 싶다. 누군가의 의미를 알 수 없는 지시에 비판 없이 따르는 일은 도저히 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이 세상에는 있지요. 그런 사람의 신념에 대하여 특별히 이의를 제기할 생각은 없습니다. ‘모쪼록 그런 태도로 앞으로도 계속 살아가세요’라며 미소를 머금고 손을 흔들어 줄 따름이지요. 그것은 ‘나는 개를 좋아하고 당신은 고양이를 좋아한다’는 다분히 본질적인 경향에 속한 것이지 결코 좋다, 나쁘다의 문제가 아닙니다.
나는 ‘수업을 좋아하는’ 인간입니다. 그것은 후천적 자질이 아니라 분명 선천적으로 타고난 경향입니다. 누군가에게 온몸을 맡기고 싶다, 누군가 내 머리를 눌러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때때로 발동하지요.
‘스승 아래서 수업받고 싶다’는 열의가 절정에 달한 것은 내 나이 25세 때의 일이었습니다. 그 무렵의 나를 아는 사람에게 물으면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치다요? 아, 묘한 데가 있는 녀석이죠.” 아마 대부분 지인들의 입에서는 이런 인물평이 자연스레 나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내가 봐도 ‘묘한 놈’이었으니 말입니다. 여하튼 반항적이고 공격적인 데다 제법 달변이었지요. 매우 활동적이고, 누구든 개의치 않고 덤벼들었지요. 그러나 ‘이렇게 살다가는 조만간 터무니없는 일을 당할지 모른다’는 불안만큼은 분명히 갖고 있었지요. 누군가 이런 삶을 멈춰 주었으면……, 그러나 대체 어느 누가 나의 폭주를 멈춰 줄까요?
한국에도 잘 알려져 있겠지만, 《서유기》라는 중국 고전이 있습니다. 주인공인 손오공은 손쓸 수 없을 만큼 매우 난폭한 자였지만 삼장법사를 만나 머리에 ‘금고아’라는 금속 띠를 두르게 되지요. 손오공이 나쁜 짓을 하면 강하게 죄어 꼼짝 못하게 만드는 장치이지요. 20대이던 나에게는 금고아를 머리에 채워 줄 누군가가 필요했지요.
다행히 나는 25세 때 합기도의 다다 히로시(多田宏) 선생님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내게 ‘삼장법사’ 같은 분이었지요. 무엇보다 그때 나는 진심으로 경의를 표할 수 있는 연장자와 참으로 오랜만에(어쩌면 태어나 처음으로) 만났습니다. 그때의 안도감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나쁜 짓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가슴을 쓸어내렸지요(참 이상하지요. 특별히 그 누구도 내게 나쁜 짓을 하라고 강요한 것도 아닌데 말이죠).
여하튼 다다 선생님과 만나 합기도라는 ‘뭔지 모르는 것’을 수업하게 되었습니다. 선생님도 ‘뭔가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은 했지만 대체 어떤 식으로 대단한지는 좀처럼 말로 설명할 수 없었지요.
무도 수업을 시작한 지 40년이 흘렀습니다. 지금도 합기도가 무엇인지 다시금 물어도 잘 모릅니다. 그러나, 바로 그런 것이라 생각합니다. 수업이라는 건 수업하는 주체인 자신이 점차 변화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제 ‘알았던’ 것을 오늘이 되어 ‘알 수 없게’ 되기도 하지요.
나는 누군가 ‘머리를 눌러 주기’를 (나도 모르게) 절실히 원하는 젊은이였습니다. 따라서 스승과 수업할 곳을 얻었다는 것에 진심으로 힘을 얻었습니다.
‘자유롭고 싶다.’ ‘내 개성을 마음껏 발휘하고 싶다.’ 젊은이들은 누구나 이런 말을 입에 담지요. 그러나 나의 젊은 시절을 돌이켜보면,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욕망의 노예였고 개성이라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여하튼 나는 그랬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자유도 개성도 ‘아무래도 좋은’ 것으로 느껴지는, 질펀하여 바람이 잘 부는 환경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 주는 게 분명 도움이 됩니다.
수업의 길을 선택함으로써 나는 ‘나’라는 감옥에서 벗어났습니다. 그 청량감을 가능한 한 많은 젊은이가 경험해 보길 바랍니다.


한마디로 말해, 수업이라는 것은 ‘닥치고 시키는 대로 하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지금 젊은 사람들에게 그렇게 말해 봤자 일단 알아듣지 못합니다. 무슨 일이든 그 실용성과 가치에 대해서 대략적으로 제시하도록 요구해야 한다고 어린 시절부터 교육받아 왔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이른바 ‘소비자’라 불리는 사람에게는 마땅한 행동입니다. 소비자는 상품에 대하여 반드시 스펙을 요구하게 마련이니까요. 상품을 집어 들고 가장 먼저 묻는 것은 ‘이것은 무엇에 쓰는 물건입니까?’라는 질문입니다. 그런 소비자의 질문을 받고서 ‘써보면 안다’고 답하는 장사꾼은 없겠지요(만약 있다고 해도 그런 상품을 사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용도가 모호한 상품은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여하튼 지금 아이들은 그렇다고 믿습니다. 실제로 가정은 물론 학교에서는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아이들이 무언가를 하려고 하면 ‘그것을 하면 이런 좋은 일이 있다’고 설명하며 이익을 좇아 움직이도록 교육시킵니다. (중략)
달리는 동안에 ‘나만의 특별한 트랙’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새로운 트랙, 다른 코스를 계속하여 달립니다. 더불어 어느 수준에 다다르면, 또다시 새로운 트랙이 눈앞에 나타나지요. 그렇게 또 다른 트랙을 달리기 시작하는 것이죠.
트랙은 매번 길이도 감촉도 제각기 다릅니다. 본디 ‘어디를 향하는지’가 다릅니다. 불현듯 정신을 차리고 보면, 아무도 없는 곳을 홀로 달리고 있습니다. 한때 트랙을 함께 달리던 경주 상대는 어디로 갔는지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수업이라는 건 그런 것입니다.
수업을 하는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를 그것을 ‘해낸 뒤’라야 말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게조차 설명할 수 없는 것을 타인에게 설명할 수는 없지요. 남에게 설명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남과 우열을 비교하고 강약이나 잘하고 못함을 논할 수는 없습니다.
수업은 상업적인 거래와는 다릅니다. ‘노력’을 대가로 내놓으면 사용 가치가 명시된 ‘상품’을 건네받는 단순한 과정이 아닙니다. 따라서 소비자로 키워진 아이들로서는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시장과 상품밖에 본 적이 없는 아이는 수업이 갖는 의미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 책은 그런 아이들에게 수업이란 어떤 것인지를 이해시키기 위해 썼습니다.
(pp.16~18 지금 왜 ‘수업’을 말하는가?)


적을 없애기 위해서는 적을 없애는 게 아니라 ‘이게 적’이라 생각하는 ‘나’를 지우면 됩니다. 논리적으로 그것으로밖에 풀 수 없습니다.
‘나를 지운다.’
참 말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달성할 수 있을까요?
‘나를 지운 나’에 대하여 자기점검을 하고 얼마만큼 달성했는지를 체크하여 성과가 있다면 자화자찬하는 한 영원히 ‘나’를 벗어던질 수 없습니다. 따라서 자기점검 금지, 자기평가 금지, 자화자찬 금지!
그렇다면 대체 무엇을 단초로 ‘나’의 변화(원하건대 ‘성장’)를 점검할 수 있을까요? (중략)
그것은 일단 ‘의사(意思)를 갖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의사’라고 해도 좋고, ‘계획’이라 해도 좋고, ‘예단’이라 해도 좋고 혹은 ‘쓸데없는 근심’이라 해도 좋습니다. 어떻게 말하든 그것은 미래에 대한 예견을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미래를 예측하지 않는 것’, 그것이 여하튼 무적을 탐구하기 위한 첫걸음을 내디딜 때에 실마리가 되는 ‘나’의 조건입니다.
(pp.62~63 어떻게 무적이 되는가)


자신의 평소 세계관이 흔들리고 기존의 도량형을 적용할 수 없는 사태와 만났을 때, 우리는 무지로 무장합니다. 그것은 마치 여우에 홀리는 차원을 단연코 뛰어넘어 위기가 닥쳤을 때 가사 상태에 빠지는 것과 비슷하지요.
그것은 오랜 세월 교단에 서면서 깨달은 경험지(經驗知)와도 부합합니다. 대다수 사람들은 학생들의 무지를 두고 지식 부족 때문이라고만 생각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가르치는 입장이 되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학생들은 지식이나 정보, 기술이 부족한 게 아닙니다. 인간은 내버려 둬도 놀랄 만큼 엄청난 기세로 지식을 익히고 정보를 받아들이고 기술을 습득합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배움’에 대한 근원적인 충동이 분명 존재합니다.
무지란, 그것을 방해하는 힘이지요. 배움을 저지하고 억제하려고 부단히 노력합니다.
따라서 많은 사람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대학 교육이란, 무언가 유용한 지식이나 기술을 ‘덧셈’으로 보태는 것이 아닙니다(그렇다고 믿는 교사도 적지 않지만요). 그것이 아니라 ‘배움’에 대한 충동의 자연스러운 발로를 방해하는, 학생들 자신의 ‘무지에 대한 안주’를 해제하는 것이지요.
학교 교육이 달성해야 하는 첫 번째 과제는 학생들의 머리를 지식으로 그득 채우고 끈끈하게 옭아매는, 생동감 넘치는 ‘배움’의 운동을 방해하는 쓰레기 정보를 ‘벗는’ 것입니다.
(pp. 87~88 ‘안주’에서 벗어나기)

여우도 타조도 아닌 방식으로,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만 할까요?
‘명상’이 이 물음에 대한 기술적인 대답이 될 것입니다.
명상이란, 예비적 고찰에서 살펴보았듯이 ‘액자 설정’에 관한 기법입니다. ‘지금?여기?나’라는 부동의 정점에서 벗어나 ‘지금’이 아닌 시간, ‘여기’가 아닌 장소, ‘내’가 아닌 주체의 자리로 이동하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지금?여기?나’가 조우한 사태를 관찰하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이해하고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을 합니다. 그것이 무도적인 의미의 명상입니다.
(p.130 무도가가 본 명상의 이치)


무도에서 어느 정도의 수련 단계를 밟으면 그런 인습적인 안팎이나 주객의 경계가 차츰 애매해집니다. 자타의 경계를 넘어 ‘드나들’ 수 있게 되지요. 이 같은 ‘경계선이 애매해지는 감각’은 신앙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다다 선생님은 아마도 그 점을 지적하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 귀에 들리지 않는 것, 그럼에도 사실적으로 예리하게 다가오는 것이 있다는 실감 위에 신앙은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인간의 오감으로 감지할 수 있는 것만이 존재하는 모든 것이고, 감지할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식의 판단 위에 종교는 절대로 성립하지 없지요. 모든 신앙의 근간에는 이 ‘감지할 수 없는 것의 선명함’을 실감하는 경험이 존재합니다.
(p.163~164 보이지 않는 것을 기다리는 마음)


성숙을 이뤄 냈다고 하는, 성숙의 생생한 실감을 최종적으로 담보하는 것은 이지와 개념이 아니라, 살아 있는 신체입니다. 유아 적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고, 들리지 않았던 것이 들리고, 판별할 수 없던 향기나 맛을 알고, 과거에는 감지할 수 없었던 타자의 감정 변화를 예민하게 이해합니다. 그것이 성숙이라는 것이지요.
성숙이란 철저히 신체적인 경험입니다. (중략)
사회가 충분히 정의로우면서도 온화한 감촉을 갖기 위해서는 인간의 살아 있는 몸뚱이가 필요한 것이지요. 정의가 과도하게 공격적이 되지 않도록, 자애가 지나치게 방탕하지 않도록 균형을 잡을 수 있는 건 오직 살아 있는 육신의 인간뿐입니다.
(pp.177~179 성숙해진다는 것)

다음 세대를 생각하는 인문교양 시리즈 아우름(Aurum)
아우름은 다음 세대에 말을 거는 샘터의 인문교양서 시리즈입니다.
‘Aurum’은 라틴어로 ‘빛나는 새벽’이란 뜻입니다.
우리의 감성과 지성에 빛나는 새벽을 여는 책을 만들어갑니다.
세대를 아우르는 지혜, 앞 세대가 다음 세대를 껴안는 사랑을 담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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