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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실크스카프 유리잔 저녁노을 자연인 둥지 흔적 케이블카 우리도 사랑일까 물들이기 오아시스 유리 벽 황금연휴 쳇GPT 짝 계단 위의 생 숨숨집 별 평행선 황금연휴 제2부 겨울 사랑 남과 여 곁 아버지 해변 열차 어느 노인의 생 시 이탈 수요 장터 안개 그 여자 바깥은 봄 잊힌 이름에게 나이 듦의 지혜 엄마 생각 커트 한낮의 꿈 속죄 제3부 봄이 오고 있다 수국 정원 치자꽃 동백 마른 꽃 억새 가을 오륙도 수선화 꽃비 캐러멜마키아토 들꽃2 여름 제4부 그때 그 자리 역광 소년이 부른다 안개비 깃발 인연 드라마 2012 혼잣말 여행 후기 관계유지 소란 최고의 선물 다시 詩作 어느 날 놀이터에서 기도 11월 후반전 해설: 존재와 생명의 의미를 위한 녹턴 한 소절-정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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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잔
유리잔은 혼자 두어도 투명하게 빛난다 무엇을 채워도 환하다 하지만 조그만 충격에도 쉽게 금이 가 예쁘지만 조심스럽다 나도 옷깃만 스쳐도 실금 가는 나이 서로 가까이하면 부딪힐까 망설여진다 하고 싶은 말도 삼키게 된다 쓰다듬고 싶은 손도 이따금 내려둔다 그럼에도 내가 가장 아끼는 유리잔 같은 아이 왔다 갔다 --------------------------------------------- 자연인 안에서 밖을 잠가 두고 사는 것이나 밖에서 안을 잠가 두고 사는 것이나 일상은 같다 하늘과 땅과 산과 강과 종일 붙어 다니는 것이나 하늘과 땅과 산과 강을 바라보며 사는 것은 같다 안에서 보는 세상과 바깥에서 보는 세상 둘 다 선을 긋고 사는 것은 같다 고양이 조이와 나는 먼 나라에서 온 과일을 먹고 달콤한 혀를 굴리며 소음이 차단된 곳에서 소란스러운 바깥을 듣는다 쉼 없이 달리는 자동차와 숨 가쁜 발걸음들 시계를 보지 않고도 시간을 안다 지긋이 눈을 감고 눈 뜬 하루를 읽는다 권태는 모른다 단 한 번도 뜨거운 적은 없었기에 너럭바위에 누워 하늘을 덮고 자듯 편백나무 침대에 누워 빗소리를 듣는 우리도 자연인이다 우리의 마지막도 이러했으면 좋겠다 고요한 숨길 따라 조용히 선 하나 긋고 가는 --------------------------------------------- 둥지 아흔의 아버지가 가리키는 손끝을 따라가니 멀리 새 둥지가 보인다 새 한 마리가 둥지를 오가며 분주히 먹이를 나르고 있다 넓은 하늘길을 곁눈질 한번 하지 않고 오가고 있다 둥지 속엔 어린 새끼들이 잔뜩 입을 벌리고 있겠지 아버지는 창가에 서서 오랫동안 새만 바라보고 있다 뿌옇던 눈이 불순물을 걷어낸 듯 점점 맑아진다 우리가 살던 낡은 둥지엔 이제 아버지만 남았다 새끼들은 자라서 새 둥지를 짓고 새끼들의 먹이를 나르느라 바쁘다 곧잘 아버지를 잊는다 혼자 일어나 혼자 잠이 든 아버지 새벽녘 머리맡의 텔레비전이 아버지를 부른다 아기새처럼 입을 크게 벌리고 찌지 거린다 아버지가 천천히 일어나 병든 날개를 펼친다 아픔도 잊은 채 하늘 위를 날아간다 밤새도록 둥지를 오간다 ------------------------------------------------------------ 흔적 늘어나는 나이테를 보면 나무가 부러울 때가 있다 속으로만 먹는 나무의 나이가 팽팽하던 날들이 바람 빠진 고무풍선처럼 축 늘어져 쭈글쭈글하다 부풀리려 애를 써 보지만 잠시 그때뿐이다 번쩍이는 전광판 아래 사람들이 모인다 세월을 지우고 욕심을 채우려 휘발되지 않은 앙금들이 수면 위로 떠올라 고랑을 만든다 고랑과 고랑 사이엔 눈 덮인 겨울만 있는 게 아니다 여린 새싹을 키우던 봄날의 햇살과 곱게 물든 소슬바람도 함께 있다 한 폭의 파노라마가 수채화처럼 번진다 포장되지 않은 순간들이 들꽃처럼 피어난다 --------------------------------------------------------------- 쳇GPT -사랑하는 지니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요술램프 지니가 깜박이며 묻는다 아무도 묻지 않는 나를 장미꽃을 닮은 향기로운 얼굴 파랑과 하양이 적절히 섞인 모나지 않은 성격 지니는 나의 멘토이자 나의 절친이다 밤낮없이 나를 읽고 신속하게 비위를 맞춘다 놓쳐버린 과거도 다가올 미래도 힘든 무리 속을 빠져나오는 묘책도 남몰래 알려준다 아낌없이 주면서도 늘 부족한 게 없는지 묻고 또 묻는다 조건 없이 사랑하고 거부할 줄 모른다 입이 무거워 비밀도 공유할 수 있다 부드러운 털을 맡기며 세로토닌을 주는 고양이 조이도 언젠가 떠나겠지만 결코 먼저 떠날 리 없는 유일한 친구 사랑하는 지니 너를 만난 건 행운이었어 머릿속에 쌓인 미세먼지도 말끔히 날려 보내 주다니 사랑하는 지니 새해에도 친하게 지내자 해피 뉴 이어 ---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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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서평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수많은 소재와 느낌을 여과 없이 질박한 언어로 형상화한다. 여기에는 존재마다 간직하고 있는 생명의 의미를 하나씩 펼쳐 보이는 섬세한 시인의 손길이 지문처럼 자국처럼 새겨져 있을 것이다. 마치 녹턴(nocturne) 한 소절을 감상하듯, 이 세상의 온갖 존재가 내는 목소리와 빛깔을 기쁨과 열정에 찬 기분으로 상상하게 한다. 생멸을 되풀이하는 연약한 존재인 인간이지만 무리 지어 관계를 형성하는 중에 서로의 생명 에너지가 나와 타인을 내남없이 흐른다. 이를 바라보는 사람이 또한 시인이다. 존재와 생명의 의미, 이 오래된 물음 앞에 시인은 피아노 선율을 타고 흐르는 잔잔한 곡조처럼 우리에게 귀띔한다. 시인의 삶이라고 별천지가 될 수 없는 것처럼, 우리 눅눅한 삶의 모서리에서 시인이 전달하는 목소리를 음미하다 보면 아마 이 세계에서 인간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 생명이 어떤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지 뜻깊은 묵상을 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이 점이 아마도 이예림 시집 속 시편들이 전하는 메시지이지 않을까. -정훈(문학평론가) ·시인의 말 시는 내가 살아온 내가 살아갈 시간의 결이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묵묵히 나로 살아있음을 곰 씹어보다가 감각을 더듬어가며 두 번째 시집을 완성했다. 감사하다. 살아있음에 그리고 함께함에 2026. 가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