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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사람 서정시선

이 상품의 태그

책소개

목차

시인의 말


14 나무들 112
15 나무들 113
16 나무들 114
17 나무들 115
18 나무들 116
19 나무들 117
20 나무들 118
21 나무들 119
22 나무들 120
24 나무들 121
25 나무들 122
26 나무들 123
27 나무들 124
28 나무들 125
29 나무들 126
30 나무들 127
31 나무들 128
32 나무들 129
33 나무들 130
34 나무들 131
36 나무들 132
39 나무들 133
40 나무들 134
41 나무들 135
42 나무들 136
43 나무들 137
44 나무들 138
45 나무들 139
46 나무들 140
47 나무들 141
48 나무들 142
50 나무들 143
51 나무들 144
52 나무들 145
53 나무들 146
54 나무들 147
55 나무들 148
56 나무들 149
57 나무들 150
58 나무들 151
59 나무들 152
60 나무들 153
62 나무들 154
63 나무들 155
64 나무들 156
65 나무들 157
66 나무들 158
67 나무들 159
68 나무들 160
70 나무들 161
71 나무들 162
72 나무들 163
74 나무들 164
76 나무들 165
77 나무들 166
78 나무들 167
80 나무들 168
82 나무들 169
83 나무들 170
84 나무들 171
86 나무들 172
88 나무들 173

작품론
89 생태주의와 사랑을 위한 나무의 수사학 / 강경호

저자 소개 1

- 전남 순천 출생 - 조선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졸업(문학박사) - 1995년 《시와산문》으로 등단 - 서울시인상,?국제PEN광주문학상, 광주시장상, 서울시인상, 광주시문학상 수상 - 한국문인협회, 국제PEN클럽, 한국녹색시인, 광주문인협회, 광주시인협회 회원, 원탁시, 기픈시, 시누대, 가교 동인 - 시집?『꿇어 앉히고 싶은 남자』, 『나를 묶어주세요』, 『강물이 흐를수록 잠은 깊어지고』, 『새벽이 환하게 오고 있다』?외 - 평론집 『현대시의 시간과 공간인식』 외 2권 - 전) 조선대학교, 동신대학교 외래교수, 한국연구재단연구원
- 전남 순천 출생
- 조선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졸업(문학박사)
- 1995년 《시와산문》으로 등단
- 서울시인상,?국제PEN광주문학상, 광주시장상,
서울시인상, 광주시문학상 수상
- 한국문인협회, 국제PEN클럽, 한국녹색시인,
광주문인협회, 광주시인협회 회원,
원탁시, 기픈시, 시누대, 가교 동인
- 시집?『꿇어 앉히고 싶은 남자』, 『나를 묶어주세요』, 『강물이 흐를수록 잠은 깊어지고』, 『새벽이 환하게 오고 있다』?외
- 평론집 『현대시의 시간과 공간인식』 외 2권
- 전) 조선대학교, 동신대학교 외래교수, 한국연구재단연구원
- 현) 광주 YWCA신협 상임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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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6년 09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128쪽 | 125*200*20mm
ISBN13
9788956658667

책 속으로

나무들 112



백일홍 나무는 변덕이 심해
오늘 피었다가 내일 지는 변덕 말고
내일 피었다가 모레 지는 슬픔 말고
세 번씩이나 사랑을 하고
세 번씩이나 꽃잎으로 유혹하고
그것도 모자라 전신을 몽땅 내어주고 시간을
낚는 저 재간둥이 좀 봐
세 번 피고도 사랑을 멈출 줄 모르는
그래서 너의 마음까지 송두리째 내어주고도
마냥 슬픈 미소를 지어야하는
하늘이 뚫려있어 눈물 꽃이 피어 있네
땅이 솟아올라 꽃봉오리를 키웠을까
하늘하늘 멀어지는 너와 나의 이야기들이
가을 들녘에 황금빛으로 풀어져내려
나의 작디작은 꽃잎으로
고백하고 싶어 사랑하고 싶어
배일홍 나무는 백일마다 새로 태어나
태어난 날부터
사방으로 번져나가는 너와 나

너의 처절한 순정에 닿고 싶어





나무들 113



너를 쓰지 않으면 입이 고프다
입안에 쓴물이 고이고
너를 말하지 않으면 생각이 쓸쓸하다
머리가 텅비고 가슴에 슬픔이 고인다
너의 목소리조차 그립다
나만이 기억할 수 있는 너의 암호
너는 오늘도 사방으로 너의 촉수를
드리우고 나를 건성건성 바라본다
나에게 범람한 초록물이 너를 적신다.





나무들 114



가물가물
너의 시선이 머문다
곧 잡힐 것 같았던 마음이
바람을 닮아 어지럽다
무엇하나 제대로 알지 못하고
아직도 너에게 가는 길은 멀기만 하다
손을 뻗으면 거기에 서 있는데
닿을 듯 만져질 듯 그 자리에 있는데
오늘도 텅 빈 숲에서 우두커니 서 있다





나무들 115



눈물이 나는 것은 오늘
내일 일이 아니다
일상이 되어버린 눈물을
시야가 흐려질 때까지 흘리고 나면
숲에서 바람이 일렁거렸다
바람이 눈물을 닦아주면
그리움은 그리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잊는다는 것은 그리움을
되돌려 보내는 것이다
바람을 다독여 잠 재우는 일이다
당신이 나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말을 내게 들려줄 때마다
회초리 들어 그리움을 때리는 일이다





나무들 116



해년마다 되풀이 되는 음모
언제나 사랑한다는 말 뒤에
이별이 따르고
바람이 바람을 밀어낸다
잎들이 입술을 닫아버리고
기진맥진한 체온계에는
노란불이 켜진다
말이 없는 세상
나부끼는 말들
사라진 사람들
데롱데롱 매달린 얼굴
너 때문에 떠날 수 없다
여름이기를
무성한 얼굴들 기억하고 싶어





나무들 117



장맛비가 할퀴고 간 자리에
여전히 서있다
아랫도리가 물컹한 시선들에
둘러싸여 있지만
나는 나무고 뿌리로부터 나를
지탱한다는 믿음은 여전하다
흔들리고 있는가
켄타우로스(BA.2.75)* 의 공격도 잘 견디고 있는가
1번 단순형이 2번 쌍봉낙타형*을 넘어서면
정점 규모가 커지고 유행기간이 길어지겠지
나는 다시 갇혀진 채 거친 호흡을 내뿜을 수밖에
코로나 청정국 호주 뉴질랜드도 BA.5변이 직격탄을 맞았다
80억 인구가 숨을 곳이 없는데 그보다 수천억배인
우리들은 뿌리를 하늘로 세우고 물구나무로 서
있어야 하나
태풍이 지나간 한참 뒤 켄타우로스의 눈물을 말리고 있다


✽켄타우로스(BA.2.75)는 코로나 19의 오미크로의 변종(BA.5) 중 가장 강력한 전파력을 가지고 있다.




나무들 118



나뭇가지들이 어느새 숲을 이루었다
작년 이맘 때 쯤에 잘려나간 가지들이 다시
살아 돌아 온 것일까
똑같은 모습을 하고 똑같은 자리에
서있는 나무들의 능청스러운 얼굴 위로
처연한 슬픔이 재빠르게 지나간다
내가 너를 기억하고 있는데 또 니가
마른 나를 기억할 진데
우린 무엇을 위해 억척스럽게 다시
이 기나긴 길 위에서 서성대는 것일까
초록 바람이 일렁이고 잊혀 진 사람들을
떠올릴 때마다 슬픔이 타들어 간다
그리고 우리들이 서로 모르는 사람처럼
스쳐지나갈 때 나뭇잎들도 숲의 기억을
지운다





나무들 119



내가 아직 여름일 때
무성한 너의 잎들을 건성으로
지나쳤어
니가 그대로 여름으로 서 있을 때
나는 가을로 갈 채비로 분주 했지
너를 알아보기까지
너를 알아볼 수 없을 때 까지
나는 여름나무로만 서있어서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목을 길게 빼고
기다리만 하는 누군지도 모르는 너를
그리고 나는 너를 만난 순간
여름 나무가 되었지
가을이 벌써 지나갔는데도
철지난 여름나무로





나무들 120



말하고 싶다
전화도 걸고 싶다
그동안 잘 있었는지
아프지는 않았는지
지금은 뭘하고 있는지
궁금한 것이 넘치고 흘러 나는
한없이 작아진다
그의 안부가 그토록 그리운 것은
그에게 말을 걸고 싶어설까
그가 툭 나를 잡았을 때
나는 언제나 당신을 사랑할 겁니다
라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나는 그냥 뿌리쳤지만
그때 나는 둔감했던걸까
사랑은 뭘까
그가 말을 걸어도
나를 보아도 무심코 지나칠 수 없는
그런 느낌이 오래 머무르는 것이
사랑이라면
가슴이 요동치고 입술이 마르고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
고백하고 싶다
천만번 말을 거는 마른 나뭇가지가
고백은 독백이 아니다고
희게 희게 나뭇가지들이 탈색될 때까지
오래 기다리는 것이라고

출판사 리뷰

| 작품론 |


생태주의와 사랑을 위한 나무의 수사학
- 허갑순 시집 『나무들 3』 시세계


강 경 호
(한국문인협회 평론분과 회장)


1. 나무의 수사학
나무는 예로부터 자연적이면서도 신화적이고 상상적인 존재이다. 인간 가까이에 있으면서 윤리적·도덕적 의미를 함축해 왔으며, 사회·문화·정치·경제적으로도 의미 있는 식물이다. 자크 브로스는 『나무의 신화』(이학사, 주향은 옮김)에서 나무를 “인간의 의식을 포착할 수 있는 길이며, 우주에서 생기를 부여하는 통로”라고 하였으며, 인간이 나무를 통해 “자신과 모든 생명의 기원을 발견”한다고 하였다. 또 나무와 마주하여 몽상하면서 인간은 “동적인 동시에 매우 정적인 상상력을 길어 올린다”고도 말했다. 이처럼 나무는 인간 정신성의 다양한 층위에서 삶의 모습을 밝히는 존재로 형상화되었다. 조선시대에 사군자를 선비의 표상으로 삼은 것도 이와 궤를 같이한다.
‘나무’는 인간 가까이에서 늘 함께하는 대표적인 자연물이기도 하지만, 나무의 생태 그 자체가 시적 상상력을 유발하기 좋은 대상이다. 더불어 나무를 통해 인간의 삶을 들여다보고 통찰하고 성찰하기에 적절한 까닭이다. 특히 나무는 봄·여름·가을·겨울 등 사계절에 따라 변화하면서도 늘 그 자리에서 변하지 않는다. 척박한 환경에서 불모를 극복하는 생명력과 상처의 치유와 재생력, 하늘로 향하는 비상 등 인간의 삶에서 만나는 생로병사의 과정을 모두 읽어낼 수 있는 것이 나무이다. 그러므로 현대 한국 시문학에 나타난 나무의 상상력은 시인들에 의해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되어 왔다.
허갑순 시인의 「나무들」 연작 시편은 지금까지 우리 문학사에서 찾아보기 드물 정도로 나무에 대한 상상력을 펼쳐 왔다. 이번 시집 『나무들 3』의 연작이 ‘112’번째부터 시작하는 데서 볼 수 있듯이, 무려 170여 편에 이르는 이른바 ‘나무시’에 대해 끈질기게 천착해 왔다.
「나무들」 연작은 생태주의를 지향하는 전통적인 차원에서도 읽히지만, 현대적으로 ‘나무’의 의미를 해석한다. 식물로서의 ‘나무’는 물론, 그것을 통해 인간의 삶을 비유적으로 반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허갑순 시인의 시는 개별 작품마다 나무를 의인화하여 생명성, 존재 규명, 사랑의 세계를 모색하고 있어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필자는 허갑순 시인의 이번 시집이 보여주는 흐름을 따라가며 시적 메시지를 규명하고자 한다. 결론적으로 필자가 허갑순 시인의 시집 『나무들 3』에서 “나무라는 객관적 상관물을 통해 형상화한, 타자와 하나가 되고 싶지만 끝내 하나가 될 수 없는 인간의 사랑”을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이를 통해 시인의 시적 정서와 목소리를 보다 깊이 들여다볼 수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상실과 불가능성을 견디면서도 지속되는 사랑”을 ‘나무’를 통해 끊임없이 사유하고 있는 것이 이번 시집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나무’는 단순한 생태적 생명체일 뿐만 아니라 일관되게 시적 화자의 분신으로서 사랑을 나타내는 중요한 대상이다. “너를 쓰지 않으면 입이 고프다”, “너를 말하지 않으면 생각이 쓸쓸하다”(「나무들 113」)는 진술에서 보듯 사랑은 이미 말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대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렇지만 사랑은 타자에게 도달하지 않는다. “손을 뻗으면 거기에 서 있는데/ 닿을 듯 만져질 듯”(「나무들 114」)하면서도 화자는 “텅 빈 숲에서 우두커니 서”(「나무들 114」) 있다. 그러므로 이 시집에서의 사랑은 ‘성취된 사랑’이라기보다 닿을 수 없는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가 되고자 하는 욕망’을 끊임없이 노래하고 있다.
시집 후반에 이르면서 사랑의 문제는 생명·부활·세계의 문제로 확대되는 양상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허락’, ‘아담과 이브’, ‘선악과’, ‘성전’, ‘기도’ 등의 기독교적 색채가 등장하며, 나무는 “하나님의 은총이 깃든 성전”, “생명들이 넘쳐나는” 존재로 형상화된다. 그러므로 이 시집은 생태주의에 대한 모색이라는 관점에서 읽을 수도 있고, 사랑에 대한 갈망을 천착하는 시선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특히 사랑에 대한 시인의 해석은 개인적 사랑에서 시작하여 궁극적으로는 ‘상실 이후에도 생명은 어떻게 사랑을 지속하는가’라는 질문으로 나아간다. 즉 ‘나무는 자연이 아니라 관계’라는 명제의 관점에서 허갑순 시인의 이번 시집을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2. 생태학적 상상력
인간과 자연을 이분화시킨 서구에서는 인간 우위의 시선으로 자연을 인식하였다. 그러나 지구를 하나의 생명체로 보고 모든 생명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특히 서구의 자본주의는 자연을 하나의 물질적 가치로 환산하였다. 그 결과 인간은 자연을 무분별하게 파괴하여 지구적 위기에 이르게 되었다. 오늘날 맞고 있는 기후온난화 현상을 비롯한 여러 가지 지구적 위기가 인간중심주의에서 비롯되었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새로운 패러다임인 ‘생태중심주의(Ecocentrism)’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즉 생태주의적 관점은 인간과 자연을 대립적 관계 또는 재화적 가치를 지닌 물질적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공존의 관계·유기적 관계로 파악하는 관점이다. 이러한 생태중심주의는 생명질서의 감각을 하나로 하기 위한 인간의 요구에 해답을 제시하는 새로운 생태학적 세계관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생태중심주의는 자연의 생존권을 인정하고 인간과 자연의 윤리적 관계를 회복하려는 생명운동으로, 생명위기가 가져올 비관적 예언을 중시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관점은 인간중심주의에서 생태중심주의로의 전환을 요구한다.
그러나 허갑순 시인의 시 한편에서는 이에 머물지 않고, 앞에서 밝혔듯이 ‘나무’라는 기표 이면에 함의된 의미를 인간의 삶에 대입함으로써 단순한 생태주의를 넘어선다.
허갑순 시인의 ‘나무들’은 앞에서 말했듯 자연으로서의 ‘나무’이자 ‘사랑’을 향한 대상의 은유적 표상으로 나타난다.

나뭇가지들이 어느새 숲을 이루었다
작년 이맘 때 쯤에 잘려나간 가지들이 다시
살아 돌아 온 것일까
똑같은 모습을 하고 똑같은 자리에
서있는 나무들의 능청스러운 얼굴 위로
처연한 슬픔이 재빠르게 지나간다
내가 너를 기억하고 있는데 또 니가
마른 나를 기억할 진데
우린 무엇을 위해 억척스럽게 다시
이 기나긴 길 위에서 서성대는 것일까
초록 바람이 일렁이고 잊혀 진 사람들을
떠올릴 때마다 슬픔이 타들어 간다
그리고 우리들이 서로 모르는 사람처럼
스쳐지나갈 때 나뭇잎들도 숲의 기억을
지운다
- 「나무들 118」 전문

시적 화자는 “작년 이맘 때 쯤에 잘려나간 가지들이” “어느새 숲을 이루었다”고 한다. 나무는 잘려나가도 다시 잎을 틔우고 가지를 뻗어가는 생명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똑같은 모습을 하고 똑같은 자리에/ 서있는 나무들”이라는 구절은 늘 푸른 생명력으로 그 자리에 붙박여 살아가는 변함없는 존재에 대한 연민과 함께 슬픔을 형상화한다. 그러므로 “처연한 슬픔이 재빠르게 지나간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나무의 생태성을 화자는 인간의 삶에 대비시켜 “우린 무엇을 위해 억척스럽게 다시/ 이 기나긴 길 위에서 서성대는 것일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나무를 통해 제기된 실존에 대한 이 근원적인 물음은 나무와 인간의 생명을 동일시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초록 바람이 일렁이고 잊혀 진 사람들을/ 떠올릴 때마다 슬픔이 타들어 간다”고 하여, 화자는 나무와 인간의 생명성을 존재가 지닌 슬픔의 감각으로 읽는다. 또한 “우리들이 서로 모르는 사람처럼/ 스쳐지나갈 때 나뭇잎들도 숲의 기억을/ 지운다”고 함으로써 ‘재생하는 자연’의 풍경에서 오히려 되돌릴 수 없는 인간의 시간과 살아남기 위해 기억을 지워야 하는 존재의 비애를 묘파하고 있다. ‘나무’와 ‘인간’의 생명성에 대한 각각의 사색을 펼쳐 보여준다.
다음의 「나무들 126」은 나무를 의인화하여 나무의 생태적 특성을 인간 존재의 삶에 대비시킨다.

겨울나무도 춤을 춘다
절제된 동작으로
허공에 포박된 채
가지와 가지의 경계선을
넘나든다
언제나 같은 자리 그곳에서
춤을 춘다
굵은 가지들의 무거움과
작은 가지들의 가벼움들이
뭉쳐 뭉쳐서 오묘한 춤사위를
사람이 나무를 흉내낸다
나무가 사람을 따라 춤을 춘다
가지마다 서로를 손잡아주면서
땅으로 곤두박질치지 않게
가슴으로 보듬어 준다
겨울로 접어들자
- 「나무들 126」 전문

“겨울나무도 춤을 춘다”라고 하는 것은 물리적으로는 바람이 불기 때문이다. 추운 환경에서도 춤을 추는 모습을 “절제된 동작”, “허공에 포박된 채”라고 표현한 것은 한곳에 붙박여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절제된 동작’이다. 생태 환경을 극복하고 “가지와 가지의 경계선을/ 넘나”드는 것에서 우리는 오히려 ‘나무의 정신성’을 읽는다. “굵은 가지들의 무거움과/ 작은 가지들의 가벼움”을 통해 “오묘한 춤사위를” 보여주며 흔들리지만, “사람이 나무를 흉내낸다”고 하는 대목에서 어려운 조건에서도 자신의 길을 가는 나무가 “가지마다 서로를 손잡아주”는 인간 세계의 지향을 꿈꾸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인간은 “땅으로 곤두박질치지 않”는 나무의 모습을 닮고자 한다. 그것은 또한 “겨울”이라는 지난한 인간의 삶을 나무에게서 발견하는 것이다.
이 작품은 소나무나 사군자에서 인간의 결핍과 성찰을 배우고자 했던 옛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실천하려는 정신성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시 정신은 ‘성장성’, ‘교훈성’의 메시지를 드러낸다.
위에서 살펴본 작품들은 나무가 지닌 생태적 특성에 주목하는 생태주의적 지향만을 추구하지 않고 견인주의, 즉 보다 나은 자신의 삶을 이끌고자 하는 형이상학적 생태주의의 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장맛비가 할퀴고 간 자리에
여전히 서있다
아랫도리가 물컹한 시선들에
둘러싸여 있지만
나는 나무고 뿌리로부터 나를
지탱한다는 믿음은 여전하다
흔들리고 있는가
켄타우로스(BA.2.75)의 공격도 잘 견디고 있는가
1번 단순형이 2번 쌍봉낙타형*을 넘어서면
정점 규모가 커지고 유행기간이 길어지겠지
나는 다시 갇혀진 채 거친 호흡을 내뿜을 수밖에
코로나 청정국 호주 뉴질랜드도 BA.5변이 직격탄을 맞았다
80억 인구가 숨을 곳이 없는데 그보다 수천억배인
우리들은 뿌리를 하늘로 세우고 물구나무로 서
있어야 하나
태풍이 지나간 한참 뒤 켄타우로스의 눈물을 말리고 있다
- 「나무들 117」 전문

「나무들 117」에서도 앞서 살펴본 강인한 나무의 특성을 보여준다. 나무는 하늘에 자신의 길을 낼 수 있는 ‘여름’을 맞지만, 때로는 “장맛비가 할퀴고” 간다. 온갖 시련을 맞으면서도 생명활동을 멈추지 않는다. 이때 시적 화자는 나무의 생존 방식을 기억한다. “나는 나무고 뿌리로부터 나를/ 지탱한다는 믿음은 여전하다”는 신뢰를 통해 흔들리면서도 버텨낸다. 장맛비뿐만 아니라 코로나19라는 불모적 조건에서도 “우리들은 뿌리를 하늘로 세우고 물구나무로 서/ 있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한다. 그러나 생을 위협하는 코로나19가 ‘켄타우로스’로 표지화된 조건 속에서도 “눈물을 말리고 있”다고 함으로써 생명성을 상징하는 나무처럼 인간 또한 이를 극복하는 태도를 드러낸다.
이밖에 「나무들 135」에서는 생명활동이 멈춘 계절인 ‘겨울’이라는 극한의 시간 속에서도 미래를 꿈꾸는 인간의 모습을 포착한다. 즉 “빈가지들이 기억을 털어낸다”고 한다. 그것은 무성한 계절의 푸른 잎에 투사된 수많은 생의 기억들을 털어내는 것이지만, 더불어 낙엽을 통해 털어내는 행위는 “추억들을/ 소환하는” 행위로도 읽을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작품에서 ‘판타지’처럼 “꿈꾸는 겨울나무는 뜨거운/ 약속”, 즉 새로운 봄날을 꿈꾸는 것이다. 이런 나무의 습성 또한 어려운 환경에서 또다시 미래를 꿈꾸는 인간의 삶을 닮았음을 복기한다.
「나무들 127」에서는 “어둠부터 아침까지/ 눈이 내”려 새 둥지가 바람에 날아갈지도 모른다. 이때쯤 “지구는” 나무들의 숲에 기도를 들려주고 “새들의 둥지에 새하얀 눈이/ 쌓인다”. 어려운 환경을 견뎌내는 나무들의 모습에는 시련에 대한 응전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
살펴보았듯이 허갑순 시인의 시는 나무가 지닌 생태주의적 사유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단순히 식물학적 상상력에 머물지 않고, 이를 인간의 삶에 대입함으로써 인간 존재의 윤리적 문제와 맞닿아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측면은 그가 바라보는 ‘나무들’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너머에 있는 보이지 않는 형이상학을 지향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3. 사랑의 합일을 위한 나무의 변주
허갑순 시인의 시집 『나무들 3』의 연작 시편들을 하나의 작품으로 살펴볼 때 일관된 흐름이 감지된다. 그 중심에는 ‘사랑’이라는 관념, 즉 누군가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의 마음을 호소하는 시적 화자의 뜨거움이 자리하고 있다. ‘사랑 실종’의 상황에서도 한결같이 사랑의 대상에게 다가가고자 하는 눈물겨운 노력이 시적 에너지로 작용하고 있다.

너를 쓰지 않으면 입이 고프다
입안에 쓴물이 고이고
너를 말하지 않으면 생각이 쓸쓸하다
머리가 텅비고 가슴에 슬픔이 고인다
너의 목소리조차 그립다
나만이 기억할 수 있는 너의 암호
너는 오늘도 사방으로 너의 촉수를
드리우고 나를 건성건성 바라본다
나에게 범람한 초록물이 너를 적신다.
- 「나무들 113」 전문

이 작품은 짧지만 강렬하게 허갑순 시인이 왜 「나무들」에 천착하는지를 잘 말해준다. 시적 대상인 ‘너’를 향해 “입 안에 쓴물이 고이”는 간절함 속에서 “너를 말하지 않으면 생각이 쓸쓸하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그립고 사랑하는 ‘너’에게 사랑과 그리움의 마음을 전하지 않으면 “머리가 텅비고 가슴에 슬픔이 고이고”, “목소리조차 그립”기 때문이다. ‘나무’로 표상되는 시적 대상에 대해 “나만이 기억할 수 있는 너의 암호”에서 보듯 화자는 ‘너’를 속속들이 기억하는 존재이지만, “너는 오늘도 사방으로 너의 촉수를 드리우고” 있다. 그렇지만 나무는 “나를 건성건성 바라”볼 뿐이다. 이렇듯 어긋난 사랑이지만 “나에게 범람한 초록물이 너를 적신다”고 한다. 화자의 의식 속에서 ‘나무’, 즉 ‘너’의 기표인 초록물이 나를 적시고, 또다시 내 사랑의 마음이 오히려 너를 적신다고 함으로써 간절하고 애달픈 사랑이 시적 대상을 향하고 있음을 전하고 있다.
이 작품은 식물로서의 나무를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시적 체계 속에서 ‘사랑’을 노래하기 위한 장치로 ‘나무’를 시적 표상으로 내세우고 있다.
「나무들 133」은 앞에서 밝혔듯이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간절함을 호소하면서도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을 형상화하고 있다.

겨울 나무는 상실의 시대를
건너 뛴다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옮겨다니는 새들도
상실의 아픔을 이미 알고 있다
건너 뛰는 시간 만큼
잃어버리는 속도와 잊혀져 가는
아픔 사이에서 나는 너에게로
흘러가지 못한다
너는 내게 갇혀버린지 오래여서
끈적한 늪으로 남아있다
남아있다는 것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일까
늪이어서 더 이상 흐를수 없어도
보이지 않은 사람, 약속, 이별, 죽음
겨울나무는 아직도 아픔 속에서
상실이란 익숙한 영혼을 꿈꾸고 있다
너에게서 잊혀져가고 있는 겨울나무
- 「나무들 133」 전문

이 작품도 ‘겨울나무’를 노래하고 있다. ‘겨울’이라는 시공간은 ‘불모’, ‘상실’과 ‘아픔’을 나타내는 표지이다. 그러므로 시적 화자는 “겨울 나무는 상실의 시대를/ 건너” 뛰고, 가지를 옮겨다니는 새들이 “상실의 아픔을 이미 알고 있다”고 한다. 겨울나무는 이미 겨울의 의미를 온몸으로 체화하고 있다. 나무가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겨울’이라는 시간을 건너뛰고 있는 것이다. ‘겨울나무’로 은유화된 사랑하는 대상에게 다가가려는 시적 화자는 그동안 ‘나무’를 향한 사랑이나 그리움의 기억이 잃어버림과 잊혀짐의 간극에 놓이면서, 이윽고 겨울을 맞은 나무에게 흘러가지 못한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리고 “너는 내게 갇혀버린지 오래여서/ 끈적한 늪으로 남아있다”고 한다. 그것은 “아직 살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무’와 ‘시적 화자’ 사이에는 여전히 늪이 있어 더 이상 흐를 수 없고, “보이지 않은 사람, 약속, 이별, 죽음”이라는 아픔이 존재하기에 “상실이란 익숙한 영혼을 꿈꾸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너에게서 잊혀져가고 있는 겨울 나무”이지만, 화자는 사랑을 포기한 것이 아니다.

나는 너의 세상에서
너를 꿈꿀거야

너는 나의 세상에서
나를 꿈꿀 수밖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사로의 영혼에 깃들어

네가 없어도
내가 없어서

슬퍼 하지마
그림자끼리 사랑해도 괜찮아
- 「나무들 159」 전문

이 작품은 사랑의 완전한 합일을 꿈꾸면서도 그 불가능성을 알고 있는 화자의 역설적 사랑을 보여준다. “나는 너의 세상에서/ 너를 꿈꿀거야”, “너는 나의 세상에서/ 나를 꿈꿀 수밖에”라는 진술은 서로의 존재 안으로 침투하려는 강한 욕망을 나타낸다. 특히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서로의 영혼에 깃들어”라는 표현은 사랑을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존재와 존재의 완전한 포개짐으로 상상하게 한다.
그러나 후반부의 “네가 없어도/ 내가 없어서”는 이러한 합일의 욕망을 반전시킨다. 사랑하는 주체와 대상이 모두 부재할 수도 있다는 인식이 개입하면서 사랑은 현실적 관계라기보다 기억이나 흔적의 차원으로 이동한다. 마지막의 “그림자끼리 사랑해도 괜찮아”는 특히 인상적이다. 여기서 그림자는 실체를 잃은 존재의 흔적이면서 동시에 서로 완전히 소유할 수 없는 관계의 은유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사랑의 완성을 합일에서 찾는 듯하다가, 오히려 불완전하고 부재한 상태에서도 지속되는 사랑을 긍정한다.
이밖에 시적 화자는 「나무들 125」에서 “새 잎이 돋고 눈부신 햇살 찰랑거릴 때/ 나무들 새봄을 되새김질하며 우리들 곁으로/ 돌아”올 것을 믿으며 여전히 사랑에 대한 믿음을 드러낸다.
「나무들 154」에서도 “내가 너를 떠나고/ 너도 나를 떠나고/ 돌아올 길 아득”하다고 한다. 그러므로 “맴돌다가 그림자만/ 데리고 집으로 돌아”온다고 함으로써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에 대한 슬픔의 감각을 되풀이하고 있다.
「나무들 147」에서도 “우리가 사랑이라 해도/ 나무는 움직일 줄 모른다”, “아무리 귀를 열어도 침묵만이/ 텅 빈 공간에 십자가처럼 걸려있을 뿐”이라고 한다. 한 자리에 붙박혀 있는 나무의 생태적 특징을 다가오지 못하는, 또는 다가올 수 없는 사랑의 관계로 치환하여 나무와 화자 사이를 형상화하고 있다.

4. 사랑의 지속성
한 곳에 붙박혀 평생을 살아가는 나무는 봄, 여름, 가을, 겨울 등의 사계에 따라 변화하지만 그 근본은 달라지지 않는다. 이러한 나무에서 시인은 사랑을 읽어낸다. 물론 그 사랑은 시적 화자와 그 대상이 연리지처럼 하나가 될 수 없는 관계이므로 거리를 둘 수밖에 없다. 인간도 이와 같아서 ‘나무’로 표상되는 사랑의 대상을 향해 끊임없이 변함없는 세레나데를 부른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사랑의 합일이 완성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사랑→접근→실패→이별→그리움→기억→다시 사랑’이라는 순환이 일어난다. 이는 계절의 순환에서 봄·여름·가을·겨울이 반복되는 것과 같다. 계절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관계의 시간이다. 봄은 귀환·부활·재생을, 여름은 무성함·욕망·사랑의 절정을, 가을은 이별의 예감과 물듦을, 겨울은 상실·고독·기억을 나타내며 순환한다. 그러면서도 시적 화자는 “나무라는 객관적 상관물을 통해 형상화한, 타자와 하나가 되고 싶어 하지만 하나가 될 수 없는 사랑”을 이어가고 있다. 결코 사랑을 포기하지 않고 사랑에게 다가가고자 하며, 사랑의 지속을 지향하는 것이 이번 시집에서 드러나는 허갑순 시인의 시적 여정이다. 시인이 이 위대한 사랑을 천착하는 것은 사랑이 어떠한 결말에 이르는 것보다 사랑을 지속하는 힘에 거룩하고 숭고한 가치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여기서 저기까지
이제 겨우 한 바퀴 돌았다

우린 다른 계절에서
다시 만날거야

그때
새로운 서사시를 쓸 수도

봄이 여름을
부르듯이

니가
나를 애타게 불러줘

아직은
여름이야 한가운데야
- 「나무들 161」 전문

계절의 순환 속에서 살아가는 ‘나무’는 “이제 겨우 한 바퀴 돌았다”고 한다. ‘봄·여름·가을·겨울’을 지나는 동안 “다시 만날거야”라는 진술이 말해주듯 한 번쯤 만났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린 다른 계절에서”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이렇듯 계절의 변주로 인해 만나고 헤어지는 것은 자연의 섭리이다. 자연의 섭리처럼 인간의 삶도 ‘만남→이별→만남’이 반복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런 까닭에 다시 만났을 때 “새로운 서사시를 쓸 수도” 있음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시적 화자는 “봄이 여름을/ 부르듯이” “니가/ 나를 애타게 불러” 주기를 기대한다. 그렇지만 앞의 수많은 작품에서 보았듯이 결코 완성된 사랑에 이르지 못한다. 이 작품의 마지막 연에서 “아직은/ 여름이야 한가운데야”라고 말하는 것도 ‘나무’가 생명활동을 하는 봄에 만났어야 함에도 여름 한가운데가 되도록 사랑을 만나지 못한 것을 의미한다. “니가/ 나를 애타게 불러줘”야 하지만, 시적 상황은 여전히 사랑이 지속되지 못함을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연장선에서 다음의 「나무들 155」도 함께 읽을 때 작품 간의 소통이 가능하며, 허갑순 시인의 시집 『나무들 3』에서 시인이 바라보는 지점이 어떤 것인지를 읽어낼 수 있다.

나무야
바람이 아닐지라도
그냥 스쳐지나갈지라도
그 날 그 자리에 스쳐지나가는 바람도
나무야
못내 그리워한다면 사랑 한소절 빈 가지 위에라도 걸어두렴
아무도
찾아오지 않은 깊은 산골짜기를 지나가다 너를 알아볼 수 있도록
- 「나무들 155」 전문

허갑순 시인의 시집 『나무들 3』은 ‘나무’를 의인화할 때 시집의 속살과 속내를 읽어낼 수 있다. 그러므로 ‘나무’를 ‘인간’으로 대입시켜 읽어도 무방하다. 이처럼 인간의 사랑을 새롭게 읽어내고자 은유적 체계에 ‘나무’를 세워놓고 있는 것이다. 나무에 눈이 내려 쌓이듯, 계절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하는 나무와 인간을 비유적 수사로 형상화한다.
이 작품에서도 “그 날 그 자리에 스쳐지나가는 바람”은 나무가 맞는 바람인 동시에 인간의 삶 속에서 맞는 바람과 동일시 된다. ‘바람’의 시적 의미는 계절에 따라 다양한 시적 표지로 나타나지만, 이 작품에서의 ‘바람’은 ‘인연’을 뜻하는 시적 은유로 읽을 수 있다. 그러므로 “그냥 스쳐지나갈지라도/ 그 날”의 만남으로 인한 어떤 정서적 사건을 환기시키는 대상으로 ‘바람’에 의미를 부여한다. “그날 그 자리에 스쳐가는 바람도” “못내 그리워한다면 사랑 한소절 빈 가지 위에라도 걸어두”라고 한다. 그러면 “아무도/ 찾아오지 않은 깊은 산골짜기를 지나가다 너를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서정시가 지향하는 동일성의 시학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 시인의 태도는 시적 화자를 통해 어떤 형태로든 사랑을 지속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이제부터
우린 서로 몸을 바꾸자

너는 나로
나는 너로

너는 유성생식으로
나는 무성생식으로

퍼트리는거야
세상이 우리 차지야

나무들의 세상
나무들만 남은

포유류의 시대가 끝나면
나는 너를 나무로

서로 바라보다가
서로 바라보기만 해도

가득 찰거야
하나님 배부르시게

무화과나무 한그루
선악과나무 한그루

오지게
꽃피울거야
- 「나무들 160」 전문

이 작품에서는 앞에서 살펴본 「나무들 159」의 사랑이 한 단계 더 나아가 존재의 경계를 교환하고 생명의 방식 자체를 바꾸려는 상상력으로 확장된다. “우린 서로 몸을 바꾸자/ 너는 나로/ 나는 너로”라는 선언은 사랑을 감정적 교감이 아니라 존재론적 변신으로 제시한다. 특히 “너는 유성생식으로/ 나는 무성생식으로”라는 생물학적 어휘는 인간적 사랑과 식물의 번식 방식을 뒤섞으면서 인간과 나무의 경계를 해체한다.
“포유류의 시대가 끝나면”이라는 구절은 작품에 묵시록적 분위기를 부여한다. 인간 중심의 세계가 사라진 뒤 “나무들만 남은” 세계를 상상함으로써 인간중심주의를 전복하고 식물적 생명의 지속성을 부각한다. 그러나 그 세계는 단순한 종말이 아니라 새로운 생성의 세계이다. “서로 바라보기만 해도/ 가득 찰거야”라는 표현에서 생식은 육체적 결합을 넘어 시선과 존재 자체의 교감으로 변한다.
마지막의 “무화과나무”, “선악과나무”, “하나님”은 성서적 상상력을 끌어들인다. 특히 선악과가 인간 타락의 기원을 상징한다면, 여기서는 그것조차 다시 “꽃피”우게 함으로써 창세기의 질서를 새롭게 쓰려는 발상이 나타난다. “오지게”라는 구어적 표현은 이러한 신화적 장면의 엄숙성을 깨뜨리면서 작품 특유의 익살과 생명력을 더한다.
인간과 나무, 유성생식과 무성생식, 인간의 세계와 식물의 세계가 서로 뒤섞이면서 사랑은 개별적인 인간관계를 넘어 존재의 경계를 허물고 새로운 생명의 질서를 만들어내는 원리로 형상화된다. 따라서 「나무들 160」은 사랑의 흔적과 기억, 그리고 존재론적·생명론적 결합이라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사랑이 어떻게 소멸하지 않고 지속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러한 사랑의 지속성은 「나무들 161」에서 다시 계절의 순환과 결합한다. “니가/ 나를 애타게 불러줘”, “우린 다른 계절에서/ 다시 만날거야”라는 진술은 현재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그것이 끝나는 것은 아님을 말해준다. 사랑의 지속이란 사랑하는 두 존재가 마침내 하나가 되는 완성의 상태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타자와 하나가 되고자 하지만 끝내 하나가 될 수 없는 한계를 견디면서도, 그 상실과 부재 속에서 다시 사랑하고 기억하고 기다리는 것이 이 시집이 보여주는 사랑의 방식이다. 나무가 한자리에 서서 수많은 계절을 통과하고 다시 잎을 틔우듯 사랑 또한 실패와 이별을 지나면서도 소멸하지 않는다. 결국 『나무들 3』에서 나무는 자연의 생명성을 표상하는 동시에, 합일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상실과 기억을 견디며 지속되는 사랑을 형상화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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