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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사람 서정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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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시인의 말

제1부 배꽃을 피우다

배꽃을 피우다
봄은 언제나 새봄이다
풍경
광대나물꽃
꽃과 명자 씨
명자와 명자
상사화
손톱 끝에 초승달
봄을 찍다
연두를 먹는다
호박꽃 연가
하루
감나무밭에서
파도
달 걸음
지문
하루를 정산하고


제2부 섬사람들

섬사람들
천사 섬 신안 이야기, 압해도
천사 섬 신안 이야기, 자은도
천사 섬 신안 이야기, 우이도
천사 섬 신안 이야기, 흑산도
천사 섬 신안 이야기
지금 신안의 바다는
송공항의 아침
송공산 분재공원에서
밤바다
신안 배 마을
신안 갈파랫국 & 바위옷 묵
전 지지는 날
기름 짜는 날
하숙생과 여자아이
기상대 할머니
천사들이 사는 섬
금어기 낙지가 하는 말


제3부 새벽

새벽
휘파람
감나무
안개비는 내리고
망모亡母
반닫이
어머니의 팔월
어머니, 문화센터 가는 날
탕 탕 탕
아버지 생각
울 어머니의 계산기
재봉틀을 돌려라
당당한 그 여자
휘파람 소리
죽음 앞에서
시한부
살아있음의 기쁨
인생 리필
유서 같은 일기를 쓰다


제4부 하루

하루
사이즈
사람의 욕심
딜리트
바벨탑
쓰레기
금이 금값이다
내비게이션에게 물어봐
인생 정년
개모차
노숙자
쏘맥 한잔
콩나물 해장국
비만을 치료하다
페이스북
세상의 저울
봄을 끓인다
검정 고무신


제5부 거울 속의 여자

거울 속의 여자
길
가을이 내 앞에 서 있네
그냥
병원에 가는 날
죽고 싶은 마음에
퇴원하는 날
병동에서 1
병동에서 2
시들지 않는 꽃
병문안
링거줄
마지막 한 장
까마귀 울음
자작나무
비에 젖은 가을
가을은 비로 온다
파랑새
새들은 지저귀는데
나의 커리어
내 인생 이모작
소나기
쇠솔딱새


작품론
사라지는 시간과 다시 오는 봄 / 강나루

저자 소개 1

시인·수필가 윤인자 - 1950년 전남 강진 출생. 전남 신안 거주. - 목포과학대학교 식품영양학과 식품영양학을 전공. - 2011년 《리토피아》 겨울호 시 등단, 2024년 《시와사람》 봄호 수필 등단. - 신안군의회 제6대 의원을 지냈다.(2010. 7. 1 ~ 2014. 6.30) - 리토피아 문소연 회원, 시와사람시학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한국문인협회 신안지부 편집부장을 맡고 있다. - 신안 배 고추장 명인. - 22년 제4회 대한민국 장류 발효 대전 고추장 부문 최우수상 수상. - 23년 제5회 대한민국 장류 발효 대전 된장 부문 우수상 수상. - 24
시인·수필가 윤인자

- 1950년 전남 강진 출생. 전남 신안 거주.
- 목포과학대학교 식품영양학과 식품영양학을 전공.
- 2011년 《리토피아》 겨울호 시 등단, 2024년 《시와사람》 봄호 수필 등단.
- 신안군의회 제6대 의원을 지냈다.(2010. 7. 1 ~ 2014. 6.30)
- 리토피아 문소연 회원, 시와사람시학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한국문인협회 신안지부 편집부장을 맡고 있다.
- 신안 배 고추장 명인.
- 22년 제4회 대한민국 장류 발효 대전 고추장 부문 최우수상 수상.
- 23년 제5회 대한민국 장류 발효 대전 된장 부문 우수상 수상.
- 24년 제6회 대한민국 장류 발효 대전 고추장 부문 금상 수상.
- 25년 제7회 대한민국 장류 발효 대전 고추장 부문 대상 수상.
- 대한민국 장류 발효 대전에 출품한 고추장 부문 4년 연속 수상.

- 시집 : 『에덴의 꿈』 『스토리가 있는 섬 신안 島』
『시가 열리는 과수원』
- 시·산문집 : 『간이역을 지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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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6년 09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160쪽 | 125*200*20mm
ISBN13
9788956658650

책 속으로

배꽃을 피우다



꽃샘추위가 방향을 잃고
정신을 못 차리는 4월
배꽃은 거친 껍질을 뚫고 꽃눈을 틔운다
잎이 나기 전, 꽃이 먼저 딱딱한 나무를 쪼고 나와
무서리에 얼굴이 시려 움찔하다가
고개를 내밀어 망을 본다
철없는 배꽃 몇 송이 쭈뼛
어미 배꽃이 망을 보다가 신호를 보낸다
아직은 조금 빨라 기다려 서리가 내렸어
조용히 쉰 목소리로 아이들에게 전한다
말썽꾸러기 고집 센 아이 개구쟁이
몇 놈들이 말을 듣지 않고
얼굴을 내밀었다가 감기에 걸렸다
기침 소리에 일제히 잠에서 깬
배꽃들도 뒤이어 얼굴을 내밀고
쫑긋쫑긋 귀를 세우며 일제히 꽃을 피운다.





봄은 언제나 새봄이다



시베리아 벌판 같은 바람이 지나가고
따스하고 인자한 어머니 품 같은
새봄이 오고 있다

봄은 언제나 새봄이다
수수억 년 해마다 새봄으로 오겠지
아지랑이 등을 타고 새소리 꽃향기를 몰고
다시 태어나듯 언제나 생명의 계절이다

마른나무들을 깨워 울창한 숲을 만들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달고 달랫빛으로 온다
온 들녘 향긋하고 푸짐한 밥상 차려
몇 차례 다녀갈 꽃샘추위 아랑곳하지 않고
쑥과 달래 냉이 키워 연두 초록 수를 놓는 새봄,
아침이슬 쪼르륵, 물방울이 맺힌다





풍경



창밖엔 비가 내리는데

베란다 창문으로 바라보이는 정원

사진 한 컷 찍어낸다

바람이 부니 나무들이 일제히 흔들리는

풍경, 동영상으로 찍힌다.





광대나물꽃



두 귀 쫑긋 세우고
지천으로 피었다가 줄기처럼 뻗으며
보랏빛 꽃을 피우는 광대나물꽃
농부들에겐 잡초여서
밭둑에 버려지는 신세
할머니는 살짝 데쳐서 된장국도 끓이거나
된장에 조물조물 나물로 무쳐내면
풋풋한 냄새가 나면서 맛이 좋았다
관절에 좋다 하시며
오늘도 바구니 들고
광대나물 캐러 밭으로 나가신다.





꽃과 명자 씨



꽃을 너무 사랑하고 좋아하는 명자 씨
오늘은 일손 놓고 창가에 정원을 들인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동기화된 꽃들이 베란다에 피고 지고 모여 산다
37년 결혼 생활 서른일곱 번의 결혼기념일에
꽃 한 송이 받아본 적 없는 명자 씨
에고 멋대가리라고는 찾아봐도 눈곱만큼도 없는 양반
시장 보러 가서 파란 플라스틱 통마다 가득 담긴
꽃집 앞에서 서성인다 오늘이 결혼기념일이다
그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지 뭐
그래서 명자 씨는 꽃무늬 옷을 즐겨 입는다
봄엔 개나리 철쭉이 그려진 티나 블라우스 몸뻬바지
여름엔 해바라기 능소화 그려진 셔츠와 몸뻬바지
가을엔 국화 천일홍, 겨울엔 동백꽃 시클라멘 그림으로
온몸을 꽃으로 감싸 입는다 양말까지도
나들이복도 장미꽃 리본이 달린 모자에 잔꽃들이 만발한
꽃무늬 들어간 재킷에 큰 꽃 치마 멋지게 차려입고
그 위에 향수 살짝 뿌리고 나가면
그림 꽃에서 꽃향기가 온몸에서 멀리 퍼진다.





명자와 명자



오늘은 명자 씨가 화단 밭을 정리한다

죽은 가지들을 베어 내고 풀도 매고

새로운 봄꽃들도 심고 봉선화, 채송화 씨앗도 뿌리고

명자를 만났다 작년에 갔던 명자가 어느새

빨간 입술을 바르고 고운 자태로 명자 앞에 나타났다.

명자야 반가워 나도 명자야 근데 너는 왜 이리 이쁘다니

한참 명자와 명자가 만나 도란도란 얘기를 나눈다

그동안 묻어둔 이야기를 한참 동안 나누고 화단의 명자를 두고

명자 씨는 엉덩이를 털털 털며 일어서 다른 얘들을 만나러 간다.




상사화



우린 언제쯤 만날 수 있을까요
당신은 잎으로 나는 꽃으로 태어나
서로 마주 보며 행복한 웃음 한번 웃어볼까요
사랑합니다 고백도 하고 만져도 주고
그러나 난 봄이 되면 잎으로 피었다가
여름 땡볕 머리에 이고 살다가
뜨거움에 못 이겨 노랗게 뜬 몸뚱이
땅속에 사그라들어
당신이 오시기 전에 갑니다
나 떠난 후 당신은 빨간 족두리 쓰고
소나무 밑 그늘에 꽃으로 아름답게 피어
오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며 내 생각 하겠지요
한여름 알뿌리만 키우다
또다시 땅으로 사라지겠지요.





손톱 끝에 초승달



여름은 지나갔는데
아직 봉숭아 꽃물이 배어 있다
손톱을 두어 번 더 깎아야
봉숭아 꽃물 흔적이 지워질 것 같은데
한겨울 지나 다시 봄, 여름이 오면
아주머니는 오늘도 줄어든 꽃물을 보며
소녀처럼 가슴이 울렁거린다
벌써 여름을 기다리며 마음이 바쁘다
손톱 끝에 초승달 같은 봉숭아 꽃물
아쉬워 손톱 깎지 않고 길게 그냥 둘까.





봄을 찍다



봄인가 싶더니
어느새 봄이 지고 있다

봄이 가기 전에 카메라에 담아 두자
개나리, 철쭉, 민들레, 할미꽃
노랑꽃, 빨강꽃, 분홍꽃, 하얀꽃
거기에 내 마음도 담아 보자

산과 들 물감으로 물들인
연두 연두 남겨 두자
내년 봄에 꺼내어 비교해 보자.




연두를 먹는다



따가운 여름 햇살 아래
몸집을 키우고 익히며
알알이 속삭이는 언어들

별빛이 내리는 밤에도
청초한 이슬이 내리는 아침에도
따가운 햇살을 받으며 자란

알알이 내 입속에 구르며
꿈같은 달콤함 새콤함
입안 가득 퍼지는 진한 향기
내 사랑하는 친구 샤인 머스캣

나는 그 이름으로 시를 쓰며
연두를 먹는다.

출판사 리뷰

▣ 작품론


사라지는 시간과 다시 오는 봄


강나루(문학평론가)


1. 사라지는 시간
윤인자 시인은 시집의 첫머리에서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다/ 사라지고 있다/ 그래서 세상이 뒤집힌다/ 나는 시 앞에 뒤집히고 싶다”고 말한다. 시간은 흔히 강물처럼 흐르는 것으로 비유된다. 흘러간 시간이라고 하면 지나간 시간이 멀어지는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그런데 시인은 ‘흐른다’는 익숙한 표현을 버리고 ‘사라진다’고 한다. 흐르는 것은 어느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가면서 계속 이어지지만, 사라지는 것은 한때 있었던 것이 더 이상 그 자리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강하다. 그렇다면 시인이 느끼는 시간은 단순히 지나가는 시간이 아니라 한번 지나가면 되돌릴 수 없는 시간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이 시집의 표제는 『봄은 언제나 새봄이다』이다. 시간은 사라지고 있지만 봄은 ‘언제나’ 온다고 한다. 한쪽에서는 소멸을 말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반복을 말하는 셈이다. 실제로 이 시집에는 겨울이 지나면 다시 꽃을 피우는 나무와 봄나물들이 있는가 하면,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유년과 늙어가는 몸, 죽은 어머니와 암을 앓는 몸도 함께 나타난다. 자연과 인간은 같은 시간 속에 살지만 그 시간을 살아가는 방식은 같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처음부터 관념적인 명제로 제시되지 않는다. 지나가는 봄을 카메라에 담고, 파도가 지운 발자국을 바라보고, 오래된 물건 속에서 어머니의 시간을 떠올리는 일상적인 장면들에서 시작된다. 시인은 시간이 사라진다고 말한 뒤, 그 사라지는 시간 앞에서 사람이 무엇을 남길 수 있는가를 먼저 바라보고 있다.

2. 사라지는 것의 흔적
윤인자의 시에서 사라지는 시간은 먼저 기록하려는 마음으로 나타난다. 봄은 해마다 돌아오지만 지금 눈앞의 봄은 곧 지나갈 것이며, 지나간 뒤에는 같은 모습으로 다시 만날 수 없다. 이러한 계절의 사라짐과 그것을 붙잡아 두려는 마음이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작품이 「봄을 찍다」이다.

봄인가 싶더니
어느새 봄이 지고 있다
봄이 가기 전에 카메라에 담아 두자
개나리, 철쭉, 민들레, 할미꽃
노랑꽃, 빨강꽃, 분홍꽃, 하얀꽃
거기에 내 마음도 담아 보자
산과 들 물감으로 물들인
연두 연두 남겨 두자
내년 봄에 꺼내어 비교해 보자.
- 「봄을 찍다」 전문

봄은 시작되자마자 지고 있다. 그래서 화자는 꽃과 산과 들을 카메라에 담는다. 특히 “거기에 내 마음도 담아 보자”는 말은 사진의 대상이 자연 풍경에만 머물지 않음을 보여준다. 사진 속에는 봄을 바라보던 자신의 마음과 시간도 함께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의 “내년 봄에 꺼내어 비교해 보자”는 말도 주목된다. 내년에도 개나리와 철쭉은 피고 산과 들은 다시 연두로 물들 것이다. 그렇지만 내년의 봄을 올해 찍은 사진과 ‘비교’해야 한다는 것은 두 봄이 같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계절은 돌아오지만, 지금의 계절이 되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사진은 봄을 멈추게 하지 못하지만, 그 봄이 한때 있었다는 사실은 남겨 둘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작품에서 카메라는 자연을 촬영하는 도구이면서 지나가는 시간을 기록하는 장치가 된다.
그러나 남겨놓은 흔적이라고 해서 모두 오래 지속되는 것은 아니다. 「천사섬 신안 이야기, 자은도―백길 해수욕장」에서 여름날 수많은 사람이 남겼던 발자국은 겨울 바다에서 보이지 않는다. “포개고 또 포개”졌던 흔적을 파도가 “치우고 또 지워”버렸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화자는 사람이 사라진 겨울 백사장을 걸으며 다시 자신의 발자국을 남긴다. 파도가 곧 지울 것을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지워질 것을 알면서도 다시 흔적을 남기는 것이다.
「지문」에서는 이러한 사라짐이 더욱 간결하게 나타난다. 첫눈 위에는 강아지와 고양이, 참새와 까치, 그리고 화자의 발자국이 찍힌다. 시인은 그것들을 ‘지문’이라고 부른다. 지문은 한 존재가 다른 존재와 다르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고유한 표지이다. 그러나 작품의 마지막에서 “따뜻한 햇살이 하나둘 지문들을 지운다.” 존재의 흔적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남아 있는 시간은 짧은 것이다.
이렇듯 「봄을 찍다」의 사진은 사라지는 것을 남기려 하고, 백길 해수욕장과 「지문」의 발자국은 남겨진 것마저 다시 사라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윤인자의 시에서 기록은 시간을 보존하여 되돌리는 일이라기보다 한때 존재했던 것의 자리를 기억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사라지는 시간을 막을 수 없기에 그 시간이 지나간 자리에 사진과 발자국과 시를 남기는 것이다.
그러나 자연은 흔적을 지우면서 동시에 다시 생명을 일으킨다. 눈밭의 지문을 지우던 따뜻한 햇살은 겨울을 지나 봄을 불러오는 햇살이기도 하다. 사라지는 것의 흔적을 바라보던 시선은 이 지점에서 사라진 자리에서 다시 시작되는 자연의 시간으로 옮겨간다.

3. 사라지면서 돌아오는 시간
표제작 「봄은 언제나 새봄이다」에는 겨울과 봄이 뚜렷하게 대비되어 있다. 겨울은 “시베리아 벌판 같은 바람”으로 나타나지만, 그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는 다시 생명을 키우는 봄이 찾아온다. 시인은 해마다 반복되는 이 계절을 오래된 봄이 아니라 언제나 ‘새봄’이라고 부른다.

시베리아 벌판 같은 바람이 지나가고
따스하고 인자한 어머니 품 같은
새봄이 오고 있다
봄은 언제나 새봄이다
수수억 년 해마다 새봄으로 오겠지
아지랑이 등을 타고 새소리 꽃향기를 몰고
다시 태어나듯 언제나 생명의 계절이다
마른나무들을 깨워 울창한 숲을 만들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달고 달랫빛으로 온다
온 들녘 향긋하고 푸짐한 밥상 차려
몇 차례 다녀갈 꽃샘추위 아랑곳하지 않고
쑥과 달래 냉이 키워 연두 초록 수를 놓는 새봄,
아침이슬 쪼르륵, 물방울이 맺힌다
- 「봄은 언제나 새봄이다」 전문

“수수억 년” 동안 봄이 되풀이되어 왔다면 오래되고 익숙한 봄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연에서 반복은 이미 있었던 것을 그대로 되돌려놓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지난해의 꽃잎이 다시 나뭇가지에 붙는 것이 아니라 새 꽃눈이 생기고, 떨어졌던 잎이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잎이 돋는다. 그래서 봄은 해마다 반복되면서도 그때마다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낸다.
「배꽃을 피우다」에서는 이러한 생명의 과정이 “거친 껍질을 뚫고 꽃눈을 틔”우는 모습으로 구체화된다. 배꽃은 딱딱한 나무를 “쪼고” 나오며, 먼저 얼굴을 내민 꽃들은 무서리와 꽃샘추위를 겪는다. 그러다가 마침내 “쫑긋쫑긋 귀를 세우며 일제히 꽃을 피운다.” 봄은 저절로 주어지는 평온한 계절이라기보다 추위를 통과하여 다시 생명을 내놓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자연의 순환이 사라진 것을 모두 되찾게 해주는 것은 아니다. 「상사화」에서는 잎과 꽃이 해마다 돌아오지만 서로 만나지 못한다. 잎이 먼저 나와 있다가 사라진 뒤에야 꽃이 피고, 꽃 역시 다시 땅속으로 사라진다. 그래서 시인은 “당신이 오시기 전에 갑니다”라고 말한다. 다음 해에도 잎과 꽃은 되풀이하여 나타나겠지만 그들의 어긋난 시간은 고쳐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윤인자의 자연에서 순환은 과거를 회복하는 일이 아니다. 사라진 자리에서 새로운 생명이 다시 시작되는 방식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봄이 언제나 ‘새봄’인 것도 지난해의 시간이 되돌아왔기 때문이 아니라 지난해의 소멸을 지나 새로운 생명이 다시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연의 시간을 함께 살아가는 인간 또한 과연 같은 방식의 ‘되돌아옴’이 가능한가 하는 데에 인식이 닿는 것이다.

4. 돌아오는 계절과 돌아오지 않는 생애
「감나무밭에서」의 화자는 붉게 익어가는 대봉감을 바라보면서 “사람도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대봉과 노을처럼 울긋불긋 물들여 가는 중이다”라고 생각한다. 노년을 쇠락의 시간으로만 보지 않고 한 생이 색을 얻으며 익어가는 시간으로 바라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감나무와 사람은 같은 방식으로 늙지 않는다. 감나무는 겨울을 지나 다시 잎을 내고 다음 가을이면 또 열매를 맺는다. 사람에게는 지나간 유년과 젊음이 같은 방식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자연의 계절은 반복되지만 한 사람의 생애는 한 방향으로 진행된다. 이러한 인간 시간의 모습을 「휘파람 소리」가 잘 보여준다.

바람이 부는 휘파람 소리
가을을 닮은 소녀는 휘파람을 잘 불었다
아버지는 계집애가 무슨 휘파람이냐고 나무라셨지만
계절이 깊어갈수록 휘파람 소리는 처연해졌다
감기가 심해 목소리가 안 나와도
소녀의 휘파람 소리는
문풍지가 심하게 우는 날, 파리한 음색으로
눈 내리는 밤의 바람을 휘감았다
학교 가는 길, 심부름 가는 길
찬바람처럼 뜨거운 기운을 품고 휘파람은
열세 살이 되도록 멈추지 않았다
언제부터일까
휘파람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문득,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전깃줄에서 휘파람새가 하루종일 울고 있었다
가던 길 멈추고 노래 들었다
늙어가며 찬바람만 가슴에서 부는 가슴에
열세 살 소녀가 어느새 곁에 다가왔다
잃어버린 휘파람 소리가
문풍지처럼 팔순 소녀의 가슴에 떨려왔다.
- 「휘파람 소리」 전문

작품의 전반부에는 휘파람을 불던 열세 살 소녀가 있고 후반부에는 늙어가는 팔순의 화자가 있다. 두 시간을 이어주는 것은 전깃줄의 휘파람새이다. 새의 울음소리를 듣는 순간 오래전에 사라진 자신의 휘파람이 되살아나고 열세 살의 소녀가 현재의 자신에게 다가온다. 그러나 화자가 다시 열세 살이 된 것은 아니다. “팔순 소녀”라는 말에는 현재의 노년과 기억 속의 유년이 겹쳐 있을 뿐이다. 실제의 시간이 되돌아온 것이 아니라 하나의 소리가 지나간 시간을 기억 속에서 불러낸 것이다. 자연에서는 계절의 질서가 반복되지만, 인간에게 유년은 기억으로만 돌아온다.
「망모(亡母)」에 이르면 돌아올 수 없는 시간은 죽음의 문제와 이어진다. 평생 “일만 하시다가” 늙은 어머니는 생전에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 화장품을 죽은 뒤에야 얼굴에 바른다. 화자는 그렇게 누워 있는 어머니를 바라본 뒤 “어머니, 먼 길 떠나시네”라고 한다. 꽃이 졌다가 다음 해 다시 피어나는 자연과 달리 어머니에게 주어진 육체의 시간은 여기에서 끝난다. 그러나 사람이 떠난 뒤에도 그가 사용하던 물건은 남아 있다. 「반닫이」에서 친정집 창고에 놓여 있는 반닫이는 어머니의 혼수품이다. 세월이 흘러 열쇠는 녹슬었지만, 시인은 그 안에 “어머니의 험난한 세월”이 “차곡차곡 누워 깊은 잠에 빠”져 있다고 느낀다. 어머니가 실제로 반닫이 속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순간 어머니의 손길과 생활의 시간이 되살아나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봄을 찍다」의 사진과 「휘파람 소리」의 소리, 「반닫이」의 낡은 사물은 서로 닮아있다. 모두 지나간 시간을 현실로 되돌리지는 못하지만 사라진 것이 있었던 자리를 잊지 않게 한다. 인간에게 자연과 같은 반복의 시간이 허락되지 않기 때문에 기억과 기록이 그 빈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시집의 시간은 지나간 날을 기억하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자신의 몸이 병들면서 어쩌면 죽음이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현재의 생과 직접 맞닿을지도 모르겠다는 데 생각이 이어지면서, 시간에 대한 시선도 조금씩 달라진다. 이제 문제는 사라진 과거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에서 아직 사라지지 않은 오늘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로 옮겨간다.

5. 다시 오지 않을 오늘의 발견
「죽음 앞에서」의 화자는 암 선고를 받은 뒤 농약병 뚜껑을 열어놓을 만큼 깊은 절망을 경험한다. 그러나 차마 마시지 못하고 울어버린 뒤 “사는 날까지 살다가/죽으면 죽고 그날까지 포기하지 말고/괴로워도 살아 보자”고 마음먹는다. 이 말만을 놓고 보면 죽음 앞에서 삶을 선택한 의지가 중심에 놓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유서 같은 일기를 쓰다」에 이르면 이러한 결심이 간단하게 지속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화자는 사람들 앞에서는 “건강한 척”하지만 밤마다 유서 같은 일기를 쓰며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억지로 밥과 죽을 먹는 일조차 “희망도 없이 생명 연장”을 하는 것처럼 느끼며, “죽을힘을 다해 살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위로를 “참 쉽게 하는 말”이라고 받아들인다. 이러한 고백이 있기 때문에 윤인자의 투병 시편을 단순한 생명 찬양이나 극복의 의지로 읽기는 어렵다. 살아야 한다는 마음과 죽고 싶다는 마음이 함께 있고, 몸의 고통은 정신적인 결심만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흔들림을 지나고 난 뒤에야 살아 있다는 사실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진다. 「살아있음의 기쁨」은 바로 그 변화가 가장 뚜렷한 작품이다.

지나간 날들은 사라지고
추억만 남는 것
새로운 오늘을 행복하게 사용하고 싶은 것은
내일은 또 다른 오늘이지만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날마다 아침에 일어나 오늘도 눈을 떴다는
살아 있음을 감사하며
몸을 일으켜 기지개 크게 켜고
입이 찢어지게 하품을 하며 몸을 푼다
항암 약과 마약성 진통제를 챙겨 먹고
지팡이에 의지하며 바닷가로 향한다
갈대밭의 개개비들이
벌레를 잡아먹고 아침 이슬에 젖은 날개를
주둥이로 빗어 내리며 햇빛에 말리고 있다
강변둑 이슬 머금은 들국화가
청초하고 슬퍼 보이는 것이 나를 닮았다
가을 하늘은 높고 청새알처럼 푸르다
다시 오지 않을 오늘을 어떻게 잘 살 수 있을까
내일은 저 바다와 하늘을 볼 수 있을까
하루하루가 두렵지만,
아침마다 살아 있다는 것이 행복하다
내게 주어진 오늘 하루
이 기쁨을 어떻게 사용할까.
- 「살아있음의 기쁨」 전문

작품은 “지나간 날들은 사라지고/추억만 남는 것”이라는 말에서 출발한다. 앞에서 살펴본 사진과 휘파람 소리, 반닫이가 모두 사라진 시간의 기억과 관계했다면 여기에서는 그 사실을 직접 진술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화자의 시선은 곧 과거에서 현재로 움직인다. 지나간 날을 되돌릴 수 없기에 “새로운 오늘을 행복하게 사용하고 싶”다고 한다.
항암제와 마약성 진통제를 먹고 지팡이에 의지한다는 것은 몸의 고통이 사라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 몸으로 바닷가에 나가 개개비와 들국화, 가을 하늘을 바라본다. 그러면서 “내일은 저 바다와 하늘을 볼 수 있을까”라고 묻는다. 늘 그 자리에 있던 바다와 하늘이지만 다시 볼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게 되자 오늘의 풍경은 이전과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특히 마지막의 “이 기쁨을 어떻게 사용할까”라는 표현은 살아 있음을 바라보는 태도의 변화를 보여준다. 화자는 얼마나 오래 살 수 있는지를 묻지 않는다. 남아 있는 오늘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를 묻는다. 시간의 관심이 지나간 날을 기억하는 데서 현재의 하루를 살아내는 쪽으로 이동한 것이다.
따라서 이 작품에서 살아 있음의 기쁨은 병을 이겨냈기 때문에 생겨난 감정이라고 하기 어렵다. 병과 두려움은 그대로 남아 있다. 다만 내일을 확신할 수 없다는 사실이 오늘을 이전과 다르게 보게 한다. 사라지는 시간은 한편으로 상실을 만들지만, 다른 한편으로 지금의 하루도 한 번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간의 변화는 시집의 끝부분에서 다시 봄의 모습과 만난다.

6. 다시 오는 봄에서 새롭게 사는 봄으로
「살아있음의 기쁨」에서 화자는 오늘의 기쁨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를 물었다. 그런데 윤인자의 시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방식은 특별한 사건이나 거창한 결심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시집의 끝자락에 놓인 「봄을 끓인다」에서 화자는 집 앞에 돋은 쑥과 냉이를 캐어 돌아와 “봄을 맞이하고 봄을 데불고 집에 왔다/저녁 국으로 봄을 끓여야겠다”고 말한다.
겨우내 흙마루 밑을 드나들던 고양이는 새끼를 낳고, 논두렁에는 쑥과 냉이가 돋고 고랑에는 개구리알이 떠 있다. 봄은 여기에서 추상적인 생명의 관념이 아니라 집 앞에서 손으로 캐고 저녁에 먹을 수 있는 것이 된다. ‘오늘을 사용한다’는 것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직 움직일 수 있는 몸으로 나물을 캐고 밥을 준비하는 생활 자체가 살아 있는 오늘을 사용하는 일이다.
이러한 생활의 봄은 시집의 마지막 작품인 「검정 고무신」에서 또 다른 모습을 얻는다. 비가 계속 내리자 화자는 배꽃이 제때 수정되지 못할까 걱정하며 검정 고무신을 신고 과수원을 돌아본다. 여기에서 봄꽃은 아름다운 구경거리만이 아니다. 꽃이 제대로 피고 수정되어야 열매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한 해의 생활과 직접 관계된 꽃이다. 시집의 마지막이 이러한 노동의 자리에서 이루어진다는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밤부터 종일 비가 내린다
그치지도 않고 세지도 약하지도 않게
그 줄기 그대로 내린다
우산을 쓰고 검정 고무신을 신고
과수원을 한 바퀴 돌았다
비가 그쳐야 배꽃 시집을 보내는데
참 걱정이다. 꽃이 배란기를 넘겨 버리면
열매를 맺을 수가 없는데 꽃잎은 비에 젖어
한 잎씩 떨어지고 있다
까만 신발 위에 하얀 꽃잎이 수를 놓는다
황토투성이 된 고무 신발은 꽃잎이 풍경을 이루고
작은 풀씨는 꽃씨로 박혀 참 이쁜 신발이 되었다
검정 고무신이 꽃신이 되었다.
- 「검정 고무신」 전문

작품의 전반부에는 걱정이 놓여 있다. 비 때문에 배꽃이 수정 시기를 놓치면 열매를 맺지 못할 수 있다. 그런데 떨어지고 있는 하얀 꽃잎이 화자의 검정 고무신 위에 내려앉으면서 장면이 달라진다. 까만 신발에 흰 꽃잎이 “수를 놓”고, 황토투성이 고무신은 마침내 “꽃신”이 된다.
중요한 것은 검정 고무신이 실제로 다른 신발로 바뀐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비도 내리고 있고 농사에 대한 걱정도 그대로다. 황토 역시 신발에 묻어 있다. 삶의 조건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그 조건 속에서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따라서 검정 고무신이 꽃신이 되는 장면은 고단한 삶이 사라지고 아름다운 삶으로 바뀌었다는 뜻이라기보다, 고단한 현실 속에서도 꽃을 발견하는 시선에 가깝다.
이 장면에 이르면 『봄은 언제나 새 봄이다』의 ‘새봄’도 처음과는 조금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지난해의 꽃이 되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꽃이 피듯이, 사람 또한 지나간 생애를 되돌릴 수는 없지만 다시 주어진 오늘을 살아갈 수 있다. 「살아있음의 기쁨」의 물음이 「봄을 끓인다」와 「검정 고무신」에 이르러 구체적인 생활의 모습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시간은 여전히 사라진다. 질병과 고단함 또한 없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쑥과 냉이를 캐어 저녁 국을 끓이고, 황토 묻은 검정 고무신 위에 내려앉은 배꽃을 바라보는 동안 오늘은 이전과 다른 시간이 된다. 그렇다면 윤인자에게 ‘새봄’은 사라진 시간을 되돌려주는 계절이라기보다, 되돌아오지 않는 시간을 아는 사람이 다시 주어진 오늘을 새롭게 받아들이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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