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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제1부 기우뚱 굽은 직선 연필심의 온기 토마토의 주권 이팝나무 잔치 손톱 밑의 검은 대지 비밀번호의 고고학 격포의 서고 손익계산서가 없는 숲 가위질이 깊을수록 상처는 아문다 신두리 서체 주홍빛 대속 새벽 세 시의 거울 느티나무 원고지 새팥, 초록의 월경 보이는 안대 제2부 플라타너스 꽃을 빠뜨리는 강은 없다 빙점의 해독법 어부바 굳은살의 등사 발바닥 지도 씨앗의 집필 자물쇠의 독단 상무동, 빙판 위의 직립 부재의 건축학 혓바늘 붉은 영토 찻잔의 묵독 사막의 화병 소문의 해독 비어 있는 칸 귀의 외곽 제3부 여백의 골격 내 안의 중력 꺾임의 골조 지워진 정본正本 쓸모를 다했다는 선언 내 안의 비는 먼저 그친다 마이너스 각도 활주로의 바깥 내 안의 신神 이름 석 자 꾹꾹 얕은 도시 입김의 발성 2% 나를 처분하지 마라 돌아오지 않을 곡선 방부의 서사 제4부 벽의 숨통 침묵의 방향 단단한 씨앗 호응의 침묵 봄까치꽃의 장엄한 망명 피라칸사스의 비망록 생이가래 쇠못의 직립 건기의 바다 비대칭의 비행 부력의 시간 기술적 상상력과 생의 문장 실루엣의 꽁지발 눈부신 광대 작품론 나를 읽는 일 / 강나루 |
조경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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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우뚱
서로의 어깨를 밀어 넣으며 기우는 탑을 온몸으로 버텨내는 돌들이 있다 마음이 한쪽으로 울컥하는 날이면 마당 구석의 파편을 쥐어보았다 값싼 위로 대신, 묵직한 무게가 손바닥에 얹혔다 아버지가 쌓아 올린 장독대 옆 돌탑 흙에 반쯤 묻힌 작은 굄돌 하나가 위태로운 허리를 깊숙이 떠받치고 있다 슬며시 그 받침을 빼내는 순간 그들이 오래 버텨온 서사가 한꺼번에 무너진다 중심축이란 얼마나 많은 기우뚱함을 견뎌낸 침묵인가 허물어진 잔해 앞에 무릎을 꿇고서야 모난 것들이 빈 곳을 찾아 맞물린 채 필사적으로 지탱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버텨낸 것은 높이가 아닌 서로를 부여잡은 악력이었다 모서리는 어느 외로운 등의 온기가 된다 완벽해 보이던 나의 직각은 수많은 비틀거림을 감추어둔 오만이었다 홀로 가파르다 믿었던 벼랑은 누군가 기우뚱 내어준 곁의 다른 발판이었다 핏줄처럼 엉겨 붙어 가쁜 숨을 나누던 무더기 눈물겨운 균형이 무너지고서야 발밑이 보였다 그 좁고 어두운 틈새마다 아버지가 뼈를 깎아 만든 디딤돌이 나를 조용히 밀어 올리고 있었다 굽은 직선 속을 비워 바람을 통과시키는 대나무처럼 세월이 깊어지면 어머니도 유연해질 줄 알았다 오래 앓은 관절은 서서히 굳어가고 휠체어 위, 지나온 길들이 좁게 접혀 있다 허리를 낮춰 풍우를 받아내며 가파른 언덕을 평평하게 다져놓았던 발자취 해가 기울어 방 안의 빛이 낮아질 때 그림자마저 꺾이지 않으려 벽에 붙어 선다 광활했던 여정이 침대 틀만 한 크기로 누워 있다 주름진 손마디는 여전히 온화함을 건네는데 메마른 발은 밤새 뒤척이며 먼바다를 향해 뻗은 수평선을 닮아간다 한평생 굽은 허리는 스스로를 꺾지 않으려 안으로 말아 쥐던 마디였을까 생의 벼랑에서 휘어질지언정 부러지지 않겠다는 몸의 선언 그 혹독한 필법 속에서도 어머니는 몸속에 푸른 붓 한 자루 꼿꼿하게 세우셨다 경직된 무릎이 마침내 가닿은 세상의 끝 구부러진 생이 대지를 향해 곧게 펴지는 날 지상에 묶여 있던 휠체어의 바퀴 자국 위로 푸른 잎사귀들이 돋아나고 어머니의 고요한 숨결은 방문을 넘어 대나무 숲으로 곧게 뻗어간다 연필심의 온기 방바닥 모서리에 곰팡이가 피어 있다 벽시계 초침은 내 숨소리를 앞지르고 낡은 보일러는 밤새 차가운 쇳소리를 낸다 내가 가진 악기라고는 마른기침뿐 묵묵히 연필을 쥔다 삶은 단 한 줄의 선으로도 요약되지 않아 창문으로 길게 뻗어가는 그림자 새벽 두 시, 희미한 전등 아래 지면의 살을 파고드는 촉마다 어두운 상처 위로 뜨거운 불꽃이 피어난다 부러진다는 것은 더 깊고 예리해지겠다는 선언 꺾인 연필심에 검은 수혈이 시작되고 그 마찰만이 숨통을 트는 유일한 선율이었다 백지의 우주는 무한히 넓어지고 창백한 새벽은 나만의 팽팽한 악보가 된다 바스러지는 가루, 그 소멸을 따라 문장들이 눈을 뜬다 어둠 속에서 낯선 세상의 가장자리를 겨눈다 뼈마디에 온 생의 무게를 실어 꾹꾹 눌러쓰는 글자는 하얀 종이를 결코 떠나지 않는다 토마토의 주권 누군가는 과일이라 하고 누군가는 채소라 한다 햇빛을 가리는 차광막 아래 흙을 더듬어 뿌리를 뻗고 줄기는 노끈을 붙잡아 하늘로 오른다 몸속에 한 계절을 밀어 넣는 동안 시간의 행적 속으로 푸른색을 지우며 붉음이 도착한다 바람이 매서운 날에도 가느다란 꼭지는 둥근 세계를 놓지 않는다 속에서부터 번지는 선혈의 빛깔 터질 듯 팽팽한 긴장이 구체球體로 밀집한다 세간이 내린 무수한 오역을 삼키며 구형球形의 심장은 달아올랐다 매끄러운 외피 속에서 과육이 차오르고 멍든 상처는 마침내 지상의 성좌가 된다 어떤 틀에도 갇히지 않는 연대기는 짓눌릴수록 더욱 붉게 터지는 피의 서사시다 세상이 그어놓은 경계선을 비웃듯 홀로 무르익은 것을 온몸으로 증명할 뿐 어떤 각주도 필요치 않은 온전한 자태가 된다 분류학의 좁은 철창을 부수고 나온 핏방울 그 자체의 빛이야말로 눈부신 법 여름의 마지막 햇살 아래 누구의 허락도 없이, 스스로 타오르는 태양이 된다 이팝나무 잔치 막차가 지나간 정류장에 늦봄이 내린다 보도블록 위 이팝나무가 일제히 불을 켠다 어머니의 손때 묻은 사발에 담기던 고봉밥들이 김이 모락모락 나듯 자욱하게 넘쳐난다 허기마저 현실의 속도에 맞추려는 날들 무상의 만찬이 차려진다 걸음을 늦춘다 내일이라는 막막함이 밀물처럼 밀려와도 꽃 몇 송이 기꺼이 어깨 위에 내려앉는 순간 참 가볍다 오래 얹혀 있던 무게가 꽃잎처럼 흩어지는 밤 달빛 아래 차오르는 순백의 식탁들 내면의 고요를 가만히 가라앉히며 값을 치를 수 없는 은혜로운 잔치가 흐드러진다 도시가 매긴 단가를 넘어서는 성찬 앞에서 쏟아지는 흰 쌀밥 같은 위로를 기꺼이 받아먹는다 목구멍을 타고 흐르는 백색의 온기가 골목을 가득 채우고 잎사귀마다 푸르고 뜨겁게 박동하는 이 찬란한 결핍의 중심 삼킨 눈물이 이팝꽃 향기로 다시 피어 마침내, 나의 생이 환하게 완성된다 손톱 밑의 검은 대지 여섯 사람이 누운 병실에 새벽의 숨소리만 낮게 떠 있다 돌아누운 노인의 환자복 아래로 흙을 밟고 서던 깡마른 다리가 평생 깊은 고랑을 닮아 있다 창밖엔 밤새 눈이 내리고 플라스틱 눈금 안에서 한 방울씩 낙하하는 링거액이 메마른 들판을 적신다 소리 없이 지워지는 당신의 겨울 들녘 이불 밖으로 나온 뭉툭한 손톱 밑엔 아직 거칠고 검은 한 점이 박혀 있다 일군 땅이 시트 위에 좁은 이랑으로 눕는다 대지를 쥐던 악력은 차츰 힘을 잃는데 야윈 핏줄로 거꾸로 흐르는 초침만이 채워진다 흉작의 시대에도 저 손가락은 늘 파종 중이었다 지상의 모든 계절을 거두고 나서야 비로소 마주한 생의 마지막 수확물 손톱 밑, 저 작은 흙 한 점 차가운 눈雪보다 뜨거운 색을 태운다 당신이 남긴 지문들이 조금씩 흐려져도 검은빛으로 굳어버린 자국은 몰아치는 겨울바람을 묵묵히 받아내는 단 하나의 대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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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론
작품론 나를 읽는 일 - 조선의 시집 『사막의 화병』 강 나 루 (문학평론가) 가끔 이력서나 자기소개서를 써야 할 때면 몇 줄 되지도 않는 빈칸 앞에서 오래 머뭇거리곤 한다. 이름이나 생년월일, 주소 같은 것은 생각할 것도 없이 적으면 되고 학력이나 경력도 있었던 일을 옮기면 그만인데, 나를 소개해보라고 하면 조금 난감해진다. 살아오면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생각하지 않은 것도 아닌데 막상 몇 줄로 적으려니 성격이 어떻고 무슨 일을 좋아한다는 상투적인 말밖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그렇게 써놓고 보면 틀린 말도 아니어서 더 곤란하다. 게다가 고작 그 몇 줄이 나인가 싶어진다. 다른 사람이 나를 설명하는 말을 들을 때도 비슷하다. 내가 생각하던 나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기도 하고, 처음에는 아니라고 생각하다가도 여러 사람이 같은 말을 하면 내가 정말 그런 사람인가 싶어진다. 자신에 대해서는 자신이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면서도 남의 말 몇 마디에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보면 자기 자신을 읽는 일도 생각만큼 간단하지 않은 모양이다. 조선의 시인의 열한 번째 시집 『사막의 화병』 권두의 「시인의 말」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시인은 “수식과 명함이 나를 재단할 때마다 불 꺼진 방에 홀로 앉아 내 사유를 쓰다듬는다”고 적었다. 수식과 명함은 한 사람을 설명하는 데 꽤 편리하다. 처음 만난 사람의 직업을 알게 되면 그 사람이 어떤 일을 하며 살아가는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고, 그 짐작이 관계를 맺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편리한 것은 자꾸 지나치게 사용하게 된다. 직함이 번듯하면 사람의 삶까지 번듯해 보이고 내놓을 만한 직함이 없으면 어딘가 부족한 사람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시인이 끝내 지켜낸 것이 “이름도 직함도 아닌” 한 사람의 영혼이었다고 쓴 데에는 그런 불편함이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이번 시집의 시편에는 사람을 판단하고 분류하고 잘라내는 상황이 자주 나타난다. 이력서의 빈칸과 불합격 통보, 소문과 오명, 병원의 검사 결과, 숫자와 가격표, 쓸모와 효율 같은 것들이 그러하다. 요즘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별로 낯선 것도 없다. 나 역시 그런 것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나 자신을 판단하면서 살고 있으니 시 속의 화자만 억울하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토마토의 주권」은 이 문제를 조금 엉뚱한 곳에서 시작한다. 누군가는 과일이라 하고 누군가는 채소라 한다 햇빛을 가리는 차광막 아래 흙을 더듬어 뿌리를 뻗고 줄기는 노끈을 붙잡아 하늘로 오른다 몸속에 한 계절을 밀어 넣는 동안 시간의 행적 속으로 푸른색을 지우며 붉음이 도착한다 바람이 매서운 날에도 가느다란 꼭지는 둥근 세계를 놓지 않는다 속에서부터 번지는 선혈의 빛깔 터질 듯 팽팽한 긴장이 구체球體로 밀집한다 세간이 내린 무수한 오역을 삼키며 구형球形의 심장은 달아올랐다 매끄러운 외피 속에서 과육이 차오르고 멍든 상처는 마침내 지상의 성좌가 된다 어떤 틀에도 갇히지 않는 연대기는 짓눌릴수록 더욱 붉게 터지는 피의 서사시다 세상이 그어놓은 경계선을 비웃듯 홀로 무르익은 것을 온몸으로 증명할 뿐 어떤 각주도 필요치 않은 온전한 자태가 된다 분류학의 좁은 철창을 부수고 나온 핏방울 그 자체의 빛이야말로 눈부신 법 여름의 마지막 햇살 아래 누구의 허락도 없이, 스스로 타오르는 태양이 된다 - 「토마토의 주권」 전문 토마토가 과일인지 채소인지는 가끔 퀴즈처럼 등장하는 문제다. 식물학에서 보는 기준과 우리가 식탁에서 사용하는 기준이 달라서 어느 쪽이라고 말해도 그럴듯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런데 토마토의 처지에서 생각하면 참 쓸데없는 논쟁이다. 누가 과일이라고 하든 채소라고 하든 토마토는 햇빛을 받고 익을 때가 되면 붉어진다. 시인은 사람들이 붙인 분류를 “세간이 내린 무수한 오역”이라고 말한다. 사람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잘 이해했다고 생각한 사람에게서 간혹 전혀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곤 하지만, 첫인상은 좀처럼 잘 고쳐지지 않는다. 그 사람을 새로 이해하는 것보다 첫인상에 새로운 행동을 끼워 맞추는 편이 편해서 그럴 것이다. “어떤 각주도 필요치 않은 온전한 자태”라는 구절도 그런 생각을 하게 한다. 사람은 자꾸 자신을 설명하는데, 그 탓에 어느 순간부터는 설명할수록 더 초라해지는 일도 있다. 상대는 이미 상대를 읽고 싶은 대로 읽고 있는데 혼자 계속 각주를 달고 있는 꼴이 되기도 한다. 토마토는 그런 일을 하지 않는다. 그냥 제 속에서 익는다. 이 단순한 일이 사람에게는 참 어려운 일인 것 같다. 그래서 화자가 말하는 ‘오역’과 ‘각주’라는 표현은 시집 이곳저곳에서 계속 떠오르는 화두가 아닌가 싶다. 다음의 「가위질이 깊을수록 상처는 아문다」에서도 ‘오역’과 가까운 느낌의 ‘오독’을 이야기하고 있어서 관심이 간다. 책상에서 창문까지는 단 세 걸음 그 좁은 보폭 속에 말 못한 언어들이 수북이 쌓였다 누군가 가위로 생의 가장자리를 도려낼 때 뱉은 적 없는 오명이 낙인처럼 들러붙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편리한 단어만 골라 읽고 빈자리에 함부로 자기만의 생각을 채워 넣었다 낯선 이의 혓바닥이 날카로운 전지가위가 되는 계절 하지만 오독된 내 삶의 공백이야말로 가장 안전한 은신처였다 가위질이 깊을수록 도리어 상처는 단단히 아문다 베여 나간 줄거리와 마침표 사이에서 짓밟힌 행간은 어느새 온전한 구절이 된다 바닥에 흩어진 고통의 잔해들을 모아 허물어진 서실書室을 새로이 꾸민다 이 텅 빈 여백은 그 누구도 침범하지 못할 고유한 영역 날 선 궤적이 지나간 흔적은 도리어 내가 숨 쉬는 방이 되고 마구 거세당한 변두리가 나를 지키는 벼랑이 된다 잘려 나간 자국마다 붉은 잉크가 힘을 얻고 도려내진 통증의 깊이만큼 또 다른 내가 뚜렷해진다 살기 어린 침범을 견뎌낸 육신의 고비마다 누구의 허락도 없이, 나라는 유일한 지문을 깨우며 선명한 피를 흘리며 일어선다 - 「가위질이 깊을수록 상처는 아문다」 전문 앞의 시에서 사람들이 토마토를 제 기준에 따라 분류했다면 여기에서는 한 사람의 삶에서 마음에 드는 부분만 골라 읽는 양상이다. 화자는 사람들이 “빈자리에 함부로 자기만의 생각을 채워 넣었다”고 하는데, 소문이 만들어지는 과정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전후의 사정이 빠진 몇 마디가 옮겨 다니는 동안 처음의 이야기와 전혀 다른 것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화자는 사람들이 잘못 읽은 자신의 삶을 바로잡으려고 애쓰기보다 그들이 읽지 못한 공백을 “가장 안전한 은신처”로 삼았다. 화자가 자신의 공백을 은신처라고 부르는 까닭은 은신처로 도피한다고 상처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타인의 말이 자신을 전부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임으로써 온전한 자신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부분은 은신처에 있다며 위안을 얻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번 시집 『사막의 화병』에는 ‘오독’과 함께 줄거리, 행간, 구절, 서실, 여백, 잉크 같은 글과 관련된 어휘를 많이 쓰고 있다. 「격포의 서고」에서는 파도에 깎인 수성암의 층리가 오래된 책이 되고, 「느티나무 원고지」에서는 나이테를 한 생애가 적힌 원고지처럼 바라본다. 「신두리 서체」의 모래에는 바람이 글씨를 쓰는가 하면, 「굳은살의 등사」에서는 발바닥의 굳은살이 지나온 시간을 기록한다. 이처럼 시집의 시편들을 연달아 읽다 보면 비슷한 방식의 비유가 자주 사용된다는 생각도 든다. 그만큼 조선의 시인에게 쓰고 읽는 일은 일상의 사물이나 자연을 바라보는 데까지 깊이 들어와 있는 것 같다. 이와 함께 여러 작품에서 반복되는 말이 ‘정본正本’이다. 「소문의 해독」에서는 “나라는 거대한 전집全集의 정본正本”이 나오고, 「지워진 정본」에서는 오독의 단어를 지운 뒤 “나만의 정본”을 확인한다. 여러 판본 가운데 기준으로 삼는 판본을 정본이라고 하는데, 사람에게 그런 것이 정말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나와 다른 사람이 기억하는 내가 다르고, 같은 일을 두고도 시간이 지나면 나의 기억과 타인의 평가가 달라진다. 당시에는 잘했다고 믿었던 일을 나중에는 후회하기도 하고, 실패했다고 여겼던 일을 별일 아닌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자신의 정본을 하나로 정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지워진 정본」에서도 화자는 자신에 대한 정답을 길게 써놓지 않는다. 오히려 남들이 덧붙인 말들을 지우고 마지막에는 백지를 남긴다. 정본을 찾았는데 완성된 글이 아니라 빈 종이가 나온다는 점이 재미있다. 적어도 그곳에는 자신이 하지 않은 말이 적혀 있지 않고 앞으로 무엇을 쓸 것인지는 자신에게 남아 있다. 「호응의 침묵」에서는 이번 시집에서 자주 사용하는 글쓰기의 이미지와 함께 ‘비문非文’이라는 말이 나온다. 잘못 읽은 이면과 얼룩진 시간 찢어진 종이를 모으며 모서리를 손끝으로 쓸어내린다 지우려 할수록 잉크의 얼룩은 사방으로 번지고 삼키지 못한 탄식이 방 안의 정적을 무겁게 누른다 곧게 뻗으려던 직선은 매번 나를 향해 굽은 곡선으로 휘어진다 필기구를 쥔 손끝에 힘을 뺀다 더 이상 타인이 원하는 대로 잘 쓰려 하지 않는다 서툰 곡절을 빈 지면 위에 겨우 한 줄 내려놓을 때 내 안의 떨림이 고요한 리듬을 찾는다 지나간 날들의 대가가 이토록 가벼웠던가 단어들의 골짜기마다 빙벽이 일어선다 완벽한 호응을 거부한 그 모든 비문非文이야말로 내가 온몸으로 부딪치며 통과해 낸 진짜 나의 역사다 주술主述이 맞지 않아 절뚝거리며 걸어온 문장들은 순탄한 마침표를 찍지 못했기에 도리어 요동치던 생의 유일한 증거 뒤틀린 문맥의 자리마다 닳아진 연필 촉이 핏줄처럼 뜨겁게 필사하고 창문이 흔들릴 때마다 하얀 종이들이 팽팽하게 뒤척인다 손등 위로 새벽의 한기가 내려앉아도 지워지지 않는 오류를 있는 그대로 둔다 정해진 경로를 거부하고 튀어나간 잉크 자국은 지도를 잃어버린 생이 시작되는 또 다른 시작점이다 - 「호응의 침묵」 전문 어느 장르든 글을 쓰다 보면 비문을 찾아 고치는 일이 많다. 주어와 서술어가 맞지 않거나 문장의 앞뒤가 제대로 이어지지 않으면 그냥 두기 어렵다. 그런데 삶에서는 원인과 결과가 그렇게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는 경우가 많지 않다. 열심히 했어도 실패하고, 좋은 뜻으로 한 말이 상대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아무 잘못 없이 오해를 받을 때도 있다. “주술主述이 맞지 않아 절뚝거리며 걸어온 문장들”이라는 표현이 그런 일을 떠올리게 한다. 더 재미있는 것은 화자가 그 비문을 고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지워지지 않는 오류를 있는 그대로 둔다”고 한다. 앞에서 만났던 ‘정본’과 함께 놓고 보면 조금 모순된 것 같기도 하다. 남들이 잘못 써놓은 자신의 삶은 지우면서 정작 자신이 살아오면서 만든 오류는 남겨둔다. 이는 잘못했던 일과 부끄러웠던 일을 모두 고치고 괜찮은 것만 남기면 실제 자신과는 다른 사람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남이 만들어놓은 오독을 거부하려면 자신이 살아온 시간 속의 과오 또한 인정해야 한다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이는 「단단한 씨앗」에서 수식어와 부사를 지운 뒤 “잘 지내지 못했다/ 그래도 버텼다”라고 쓰는 태도와도 닿아 있다. 잘 지내지 못했던 시간을 나중에 훌륭한 경험으로 바꾸어 설명하지 않는 화자가 담백하게 뱉어내는 “버텼다”는 진술에서 묵직한 현실감이 느껴진다. 우리는 버팀에 자꾸 비장하고 아름다운 의미를 붙이지만 실제로는 억울해서 버티고, 갈 곳이 없어서 버티며, 자존심이나 오기 때문에 버틸 때도 많다. 조선의 시인은 그런 구차한 감정까지 없었던 일로 만들지 않는다. 이번 시집에서 ‘비문’을 그대로 두겠다는 태도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표제시 「사막의 화병」의 ‘꽃도 물도 없는 빈 화병’도 이와 함께 생각해 볼만하다. 시간이 증발한 황무지의 중심으로 들어선다 뼈마저 녹아 투명한 꽃병이 된다는 소문을 믿고 골방의 벽을 밀어내며 당도한 곳 타오르는 지열에 육신은 재가 되고 열사의 한가운데서 유리 화병이 빚어진다 몸통을 가로지른 오래된 실금들 모래바람이 외형을 매섭게 깎아내며 날카로운 모서리를 다듬는다 풍화의 고통 속에서 연해지는 살갗들 터진 주둥이로 밤의 기류가 쏟아지고 짓눌려 있던 별의 잔해들이 박힌다 메마른 모래는 빛으로 제 속을 채우고 꽃을 잃어버린 동체에서 거대한 우주가 타오른다 아무것도 품지 못해 텅 비어버린 사막은 눈부신 하늘의 방이 되고 끝없는 허공의 화원이 사방으로 열린다 뿌리 내릴 대지마저 흔적 없이 증발하면 박동을 멈춘 유리벽은 마침내 한계에 도달한다 흩어지던 생의 입자들이 거친 지면에 지워지지 않을 필적을 새겨 넣을 때 부서진 파편들은 빛의 궤적이 된다 형상을 파괴함으로써 개방되는 무한한 오로라 은하의 먼지가 되어 흐르는 강물이 지평선 너머 아득한 시공으로 번져간다 눈을 뜨자, 좁은 수직 벽면 위로 환상처럼 깨진 사구의 경전이 찬란하게 적힌다 - 「사막의 화병」 전문 사회에서 사람의 능력이나 성과를 평가하는 것은 피하기 어렵다. 다만 일을 잘하느냐 못하느냐의 문제가 어느 순간 그 사람 자체의 가치로 바뀌는 경우가 있다. 화병은 꽃을 꽂기 위해 만들어진 물건인데 이 작품의 화병에는 꽃도 물도 없다. 몸에는 실금까지 가 있으니 제 기능을 다하기도 어렵다. 그런데 시 속의 화병은 비어가면서 예상하지 못한 것을 받아들인다. 꽃이 있던 자리에 별빛이 들어오고 “아무것도 품지 못해 텅 비어버린” 공간은 “하늘의 방”이 된다. 이런 장면을 두고 상투적이고 진부하게 상실이 새로운 가능성을 가져온다고 쉽게 말하고 싶지는 않다. 힘든 일을 겪고 난 사람에게 그 일이 있었기에 지금의 자신이 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듣는 사람보다 말하는 사람에게 편한 회피형 위로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다만 이미 잃어버린 것을 되돌릴 수 없다면 사람은 달라진 조건 속에서 또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는 사이 이전에는 들어올 자리가 없었던 것이 들어오기도 할 것이다. 시인은 화병을 비워두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결국 형체까지 깨뜨린다. “형상을 파괴함으로써 개방되는 무한한 오로라”라는 표현은 조금 크다는 느낌이 들지만, 이번 시집에서 계속 다루었던 자기규정의 화두를 계속 궁리하는 것으로 보인다. 사람은 남이 자신을 쉽게 규정하는 것은 싫어하면서도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라는 말은 자주 한다. 그렇게 만들어놓은 자기 설명은 생활을 편하게 해주기도 하지만 새로운 모습을 발견할 기회까지 막기도 한다. 남들이 붙인 이름을 지운 다음에는 자신이 붙여놓은 이름도 다시 확인할 필요가 있는 셈이다. 그렇기에 화병이 마지막에 제 모양을 잃는 과정은 시인이 왜 이 시를 표제시로 삼았는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현대사회의 사람은 취업이나 직장에서는 평가를 받아야 한다. 「얕은 도시」에는 스마트폰 화면에 뜬 ‘불합격’ 세 글자가 나오고, 「이름 석 자 꾹꾹」에는 반송된 서류와 낙방의 숫자가 쌓인다. 「2%」에서는 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은 노트북 앞에서 ‘최종_진짜최종.docx’라는 파일을 붙잡고 있는 화자가 등장한다. 나는 이 파일명이 꽤 마음에 들었다. 앞의 여러 작품에서 ‘정본’, ‘실존’, ‘주권’, ‘영혼’처럼 무게가 큰 말들이 반복된 뒤라서 더욱 그랬다. 컴퓨터로 문서를 만들어본 사람이라면 ‘최종’, ‘최종2’, ‘진짜최종’ 같은 이름을 붙여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제 끝났다고 저장했다가 다시 열어보면 고칠 것이 생긴다. 이런 파일을 생각하면 ‘정본’이라는 말도 갑자기 어렵지 않게 느껴진다. 자신에 대한 생각 역시 완성했다고 여긴 뒤 다시 고치기를 반복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나는 이번 시집에 이런 생활의 구체성이 조금 더 많았으면 좋았겠다는 생각도 했다. ‘직립’, ‘정본’, ‘존재’, ‘주권’, ‘영혼’ 같은 말이 여러 시에서 반복될 때에는 시인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먼저 드러나는 경우가 있다. 장독대 옆의 작은 굄돌이나 늙은 어머니의 몸, ‘최종_진짜최종.docx’ 같은 것이 나오는 작품에서는 사물이 먼저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럴 때 나는 조선의 시에 조금 더 쉽게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 시집의 화자를 홀로 자신을 지키고 다시 규정하는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같은 인상으로만 여겨서는 안 된다. 「기우뚱」은 자신이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왔다는 깨달음을 풀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서로의 어깨를 밀어 넣으며 기우는 탑을 온몸으로 버텨내는 돌들이 있다 마음이 한쪽으로 울컥하는 날이면 마당 구석의 파편을 쥐어보았다 값싼 위로 대신, 묵직한 무게가 손바닥에 얹혔다 아버지가 쌓아 올린 장독대 옆 돌탑 흙에 반쯤 묻힌 작은 굄돌 하나가 위태로운 허리를 깊숙이 떠받치고 있다 슬며시 그 받침을 빼내는 순간 그들이 오래 버텨온 서사가 한꺼번에 무너진다 중심축이란 얼마나 많은 기우뚱함을 견뎌낸 침묵인가 허물어진 잔해 앞에 무릎을 꿇고서야 모난 것들이 빈 곳을 찾아 맞물린 채 필사적으로 지탱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버텨낸 것은 높이가 아닌 서로를 부여잡은 악력이었다 모서리는 어느 외로운 등의 온기가 된다 완벽해 보이던 나의 직각은 수많은 비틀거림을 감추어둔 오만이었다 홀로 가파르다 믿었던 벼랑은 누군가 기우뚱 내어준 곁의 다른 발판이었다 핏줄처럼 엉겨 붙어 가쁜 숨을 나누던 무더기 눈물겨운 균형이 무너지고서야 발밑이 보였다 그 좁고 어두운 틈새마다 아버지가 뼈를 깎아 만든 디딤돌이 나를 조용히 밀어 올리고 있었다 - 「기우뚱」 전문 돌탑은 크기도 모양도 다른 돌들이 서로의 빈 곳을 메우면서 서 있다. 완성된 탑을 보면 위로 솟은 돌들이 먼저 보이지만 실제로 무게를 받아내는 것은 흙 속에 반쯤 묻힌 작은 굄돌일 수도 있다. 화자는 그 돌을 빼고 탑이 무너진 다음에야 자신이 보지 못했던 것을 알게 된다. 사람도 자기 노력은 비교적 자세히 기억하면서 누군가의 도움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화자가 “완벽해 보이던 나의 직각”을 오만이라고 표현한 것도 그런 깨달음과 연결된다. 그 굄돌의 이미지는 마지막에 아버지의 위로 덧씌워지는데, 그와 함께 등, 견갑골, 뼈와 굄돌처럼 실제 무게를 받아내는 이미지가 많이 쓰이는 데에서 자신의 영혼을 지키겠다는 화자의 강한 의지가 느껴지는 동시에 그 자신이 혼자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 모습으로 보인다. 이는 「쇠못의 직립」에서 오래 벽에 박혀 무게를 견디는 쇠못과 아버지의 허름한 점퍼가 함께 나오고, 「어부바」에서도 어린 시절 자신을 업었던 어머니를 이제 화자가 다시 업는 방식으로 되새김질하고 있다. 지난 시집 『이제 너를 놓쳐도 되겠습니까』를 읽으면서 나는 조선의 시인이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 일종의 사용설명서를 쓰고 있다고 보았다. 기대했다가 실패하고, 실패하면서 오기가 생기고, 너무 무거워진 마음에서 무엇인가를 덜어내는 과정을 여러 작품에서 보여주었다. 이번 시집에서도 덜어내는 일은 계속되지만 그 대상이 조금 달라졌다. 남들이 붙인 이름과 소문, 사회가 매긴 숫자와 평가를 걷어내다가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놓은 자기 설명까지 살피게 된다. 그럼으로써 그 마음을 누가 어떤 말로 설명해왔는가에 더 관심을 두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끊고 자기 안으로만 침잠하는 것은 아니다. 화자의 주변에는 「기우뚱」의 아버지와 「어부바」의 어머니가 있고, 철책을 넘어가는 새팥과 물밑에서 서로의 뿌리를 붙드는 생이가래가 있다. 남의 판단 때문에 상처를 받으면서도 사람은 사람 없이 살아갈 수 없고, 혼자 서고 싶어 하면서도 자신을 믿고 사랑해 준 사람을 잊을 수 없다. 그런 점에서 「기우뚱」의 돌탑이 이번 시집의 ‘나’를 꽤 잘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모난 돌들은 제 모양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도 혼자서는 탑이 되지 못한다. 서로의 빈 곳에 기대면서 겨우 선다. 시집의 가장 앞에 배치한 의도가 다분히 느껴진다. 다시 「시인의 말」의 “함부로 어찌할 수 없는 한 사람의 영혼”이라는 문장을 읽어본다. 처음에는 다른 사람의 말이 닿지 못하는 강인한 무엇을 떠올렸는데 시집을 읽고 나니 그 영혼의 모습은 훨씬 복잡하다. 아버지가 받쳐준 시간과 어머니에게 업혀 지나온 시간이 있고, 불합격 통보를 받은 날과 누군가의 말 때문에 속을 끓였던 일도 있을 것이다. 자신이 잘못 선택했던 시간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런 시간이 모두 한 사람 안에 들어 있으니 타인이 붙인 몇 개의 수식이나 평가로 그 사람을 온전히 설명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시집에서 거듭 등장하는 ‘오독’도 결국 그 간극에서 생긴다. 조선의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마음을 설명해 온 말들을 하나씩 다시 점검한다. 남들이 붙인 말은 지우고, 자신이 잘못 쓴 문장은 비문으로 남겨두며, 때로는 자신이 믿어온 모습까지 의심한다. 그러면서도 지울 수 없는 시간은 그대로 자신의 몫으로 받아들인다. 『사막의 화병』은 그렇게 자신에 대해 설명해 온 말들을 다시 읽어본 기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