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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의 글
들어가는 글 “움직이는 거대한 바다” 1장 “아주 위험할 정도로 아프다” 2장 “베를 짰다” 3장 “포스터 부인이 남자 몇 명이 자신을 강간했다고 고소했다” 4장 “결혼식” 5장 “50번째 출산. 51번째 출산” 6장 “우리 집이 무기를 들고 일어났다” 7장 “해부를 했다” 8장 “내가 저녁에 어떤 장면을 보고 견뎌야 했는지” 9장 “폴리 퍼링턴이 여기 왔다” 10장 “내 뜰에서 일했다” 후기 감사의 글 본문의 주 부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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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를 건설하는 사업에서 성별에 따른 노동 분업은 어떻게 일어났을까? 그러한 분업이 가정 내부에서는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남녀 사이에 갈등은 없었을까? 있었다면 그것은 어떻게 조정되었을까? 반영 투쟁을 벌이던 식민지 사람들은 모두가 그 대의명분에 동참하던 동질적인 집단이었을까? 개인들 사이의 이해의 상충에서 비롯된 범죄는 없었을까? 종교의 자유를 찾아 떠나온 청교도들 사이에 종교적인 관점의 차이는 없었을까? 이러한 문제들의 중요성은 그동안 인정받지 못해왔고, 중요성을 인정받았다 할지라도 해답이 불가능하다고 여겨 회피해 왔던 쟁점들이다. 그런데 200여 년을 사이에 두고 태어난 두 여인의 만남을 통해 이러한 쟁점들에 대한 구체적인 대답이 가능해졌다.”---p. 7, 추천의 글 중에서
마서는 스스로 의식하지 못했을지라도 반복과 관습적인 표현을 사용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4월 24일자 일기에서 마서가 몇 마디로 생생하게 행위를 서술하면서 그 사이사이에 틀에 박힌 종교적인 어구를 집어넣은 것을 보라. “가는 길에 물에 떠 있는 통나무를 타고 시내를 무사히 건넜다. 천우신조. 길을 계속 가는데, 하인스 씨 집을 지나자마자 내 앞에서 큰 나무가 뿌리째 뽑히는 바람에 말이 놀라 튀어오르며 뒷걸음질쳤으나 목숨을 건졌다. 더할 나위 없이 자비로운 신의 가호. 하인스 씨 도움으로 쓰러진 나무를 건넜다. 계속 갔다. 얼마 안 있어 시내가 나왔다. 다리가 떠내려가고 없었다. 휴인스 씨가 고삐를 잡고 시내를 건너며 말을 끌었다. 이번에도 전능한 신의 도움으로 무사히 건너, 아무 탈 없이 도착했다.” 여기서 종교적인 감상은 이야기의 단계마다 종지부를 찍고 강조하는 일종의 후렴구가 되며, 이러한 구절은 마서가 작가는 아니더라도 솜씨 있는 이야기꾼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p. 22, 들어가는 글 중에서 마서 밸러드의 일기가 지닌 위력은 바로 이 일상성, 지루할 정도로 반복되는 지독한 일상성에 있다. 양말을 “덧대면서” 보낸 추운 날들을 언급하지 않고 강을 건넌 것만 발췌하고, 실패에 실을 감고 고기를 절이고 양배추를 추리면서 보낸 긴 가을날을 언급하지 않고 아기 낳은 것만 기록하는 것은 이 진지하고 성실한, 차분하고 용기 있는 기록의 근간을 뒤흔드는 행위다. 마서는 때로 강을 건너고 눈 속을 걸어 지루하게 진통이 끝나기를 기다리러 갈 때도 가방에 반으로 접은 종이를 넣어 가 일기를 썼으며, 역사가들이 ‘사소한’ 일로 치부한 바로 그런 일로 당혹스럽거나 기쁠 때도 자신을 성찰하는 청교도처럼 썼으며, 자의식이 넘치는 감상주의자가 아니라 사실 그대로 담담하게 썼다. 27년 이상, 정확히 9,965일 동안 마서는 꾸준히 기록했다. ---p. 24, 들어가는 글 중에서 18세기 용어로 말하면, 마서는 이론에는 관심이 없고 경험에만 의존하는 ‘경험주의자’였다. 마서 자신은 환자를 낫게 하는 것에만 큰 관심을 보였음을 말해준다. 마서는 폴리 케네디에게 주려고 찬물뿌리 팅크를 만든 뒤 “목을 헹구어주었더니 많이 편해졌다”고 했다. 같은 약은 마서의 남편이 “목이 가라앉아 편히” 잠드는 데도 도움이 되었다. 마서의 일기에는 이렇게 편해졌다, 편안해졌다는 말이 반복해서 나온다. 한 환자가 이질에 걸렸을 때 “관장을 했더니 편해졌고”, 해나가 아팠을 때는 카밀레와 장뇌를 주고서 “따뜻한 잠자리로” 보내고는 “편안해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따뜻한 차나 아픔을 달래주는 시럽은 육체의 편안함을 주었지만, 거기에는 자연은 문제가 생기면 해결책도 준다는 생각의 편안함이 있었다. 토실을 따뜻하게 해 어린 기디언 바턴의 목에 대주었을 때, 마서는 그저 고통을 달래기만 한 게 아니었다. 마서는 우주에는 본질적으로 질서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주고 있었다. ---p. 73, 1장 중에서 마서의 9월 9일 일기는 마서가 여기 쓰지 않았더라면 역사에서 익명으로 사라졌을 여성들을 복원시킨다. “돌리와 파서니아가 햄린 부인을 보러 갔다. 새비지 부인이 여기. 부인이 4월 15일부터 내게 40배타래를 자아주고 재 2부셸과 제임스의 하제를 가져갔고, 돌리가 부인에게 마름모꼴 무늬 천 7야드를 짜주었다. 새비지 부인이 아마 날실 1타래를 가져가도록 했다. 모두 합쳐 6/ X.” 할로웰 남자들이 예배당에서 공적인 일을 하고 있을 때, 마서와 마서의 이웃들은 자기들 대로 몇 가지 사적인 일을 마무리짓고 있었다. 그런 행위에 새로운 것은 없었다. 뉴잉글랜드 여성들은 오래전부터 교환과 거래에 참여했다. 마서가 9월 9일에 새비지 부인에게 준 아마 날실 타래는 산업화 이전 생활을 특징짓는 가족 생산과 그런 생산을 가능하게 한 이웃간 거래, 여성이 경제생활에 참여할 수 있게 해준 성별 노동 분업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p.102, 2장 중에서 “소나기가 조금 내린 것을 제외하면 맑음. 오후에 손님이 왔다. 해나 노스 부인과 체버 부인, 코어스에서 온 웨스턴 부인이라는 사람. 새비지 씨가 여기. 포스터 부인이 남자 몇 명이 자신을 강간했다고 고소했으며, 그 가운데 노스 판사도 있다고 한다. 정말 충격이다.” ---p.130, 3장 1978년 10월 1일 일기 중에서 1790년 7월 12일|“키더 씨 집에. 밸러드 씨가 재판에 참석했다. 노스가 무죄 선고를 받아 깜짝 놀랐다.” 그 얘기를 하는 사람마다 모두 그랬다. 마서가 “깜짝 놀랐다”고 한 것을 보면 노스가 꼼짝 못할 정도로 확실한 증거가 있었던 모양이다. 마서에게 깜짝 놀랐다고 한 사람들은 아마 재판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대부분 여성이었을 것이다. 이 짧은 일기에서 마서는 판사가 유죄라는 주장에 가장 가까이 접근했다. 마서의 평소 습관을 볼 때, 판사의 이름 앞에 직함을 붙이지 않은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p.158, 3장 중에서 1791년 10월 23일에는 눈이 왔다. 이날 마서는 샐리 피어스의 부름을 받았다. 이것은 사생아의 출산이 될 것이었고, 따라서 마서는 무엇을 물어야 할지 알았고 샐리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았다. “샐리가 오후 1시에 무사히 건강한 아들을 낳았다. 그녀가 아주 많이 아팠으나 나올 때는 괜찮았고, 해질 무렵에 …… 돌아왔다. 샐리가 내 아들 조너선이 아이의 아버지라고 진술했다.” 마서는 그러고는 가장자리에 그냥 “샐리 피어스의 아들 태어남. 27번째 출산”이라고만 썼다. 이날 일기의 의미를 완전히 알려면 먼저 18세기 뉴잉글랜드에서 미혼모가 법적으로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 알 필요가 있다. 매사추세츠 법은 언제나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끼리의 성교를 범죄로 규정했다.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17세기와 18세기 초에는 법원에서 출산할 때 누가 아이의 아버지인지 밝히려고 아이 어머니에게서 받은 증언을 토대로 사생아를 낳은 어머니 못지않게 아버지도 엄벌에 처했지만 18세기 중반에는 사통죄가 여성의 죄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p. 183, 4장 중에서 일기 하나하나는 무미건조해 별다른 의미가 없어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모두 합치면 18세기 관습과 관례를 보여주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기록이 된다. 아주 틀에 박힌 일상적인 정보도 유익하다. 어쩌다 임신과 출산으로 인한 합병증을 언급한 것도 그냥 “낳았다” 또는 “무사히 낳았다”고 하는 수많은 일기와 관련해서 보면 더 의미가 있고, 24실링이라는 보수도 6실링이나 그냥 ‘XX’라고만 한 것들과 대비해서 보면 새로운 의미가 생긴다. 수많은 일기에서 아무도 의사를 부를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을 고려하면, 출산할 때 의사가 있는 것도 주목할 만한 것이다. 마서 밸러드의 일기에 나온 다른 많은 일과 마찬가지로 출산과 관련된 일도 따분한 일과 영웅적인 일, 일상적인 일과 보기 드문 일이 결합해 이야기를 만든다. ---p. 207, 5장 중에서 일기가 자세하지 않은 것은 또 우리가 이미 아는 사실, 즉 마서의 산파술이 실험적이기보다 전통적이었다는 사실도 분명하게 말해준다. 이 시기에 책을 내고 임신 출산과 관련한 사례를 기록한 의사들과 달리, 마서는 다른 사람을 가르치거나 새로운 방법을 실험하고 장려하는 일에 흥미가 없었다. 마서는 글이 아니라 손으로 훈련을 했고, 산파술에 통달했으니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아기를 받을 때마다 결과가 중요했지 과정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나아가 일을 하는 문화적 환경도 결과를 전문적으로 설명하는 것을 삼가도록 했다. ---p. 212, 5장 중에서 추운 날 밤 마서 밸러드를 침대에서 끌어낸 것은 무엇이었을까? 왜 마서는 발이 얼고 뼈가 부러지는 위험을 무릅쓰고 자기 일을 했을까? 물론 산파 일은 대다수 여자들이 일하고 받는 대가에 비하면 많이 받는 셈이었다. 마서는 자기 “보수”에 관심을 가졌고, 일을 하고 받는 것을 꼼꼼하게 챙기고 기록했다. 그러나 돈만으로는 그녀의 헌신을 설명할 수 없다. 마서에게는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는 게 신에게 봉사하는 것이었다고 말하는 것도 충분하지 않다. 마서는 삶의 모든 일과 마찬가지로 자기 일도 종교적으로 해석했다. 신이 봄철 홍수로부터 자신을 구했고, 어려운 출산도 이겨낼 수 있게 해주었으며, 산모와 아이의 생명을 지켜주고, 자기에게 계속 일을 할 수 있는 힘을 주었다. 그러나 종교적 신앙도 모든 것을 설명해주지는 않는다. 산파 일은 일종의 봉사이고 물질적 보상을 얻을 수 있는 것이었지만, 그보다는 내면에서 우러나온, 자신의 존재에 대한 주장이었다. ---p. 246, 5장 중에서 2월 4일|“아들 집으로 에스콰이어 데이비스의 아들 해부하는 것을 보러 오라고 했다. 해부는 아주 면밀하게 진행되었다. 가벼운 것 왼쪽 잎사귀에 염증이 많이 생겼고, 창자도 마찬가지다. 창자에는 네 개의 교차점이 있었고, 신장과 쓸개에도 염증이 있었다. ……해부는 콜먼 박사와 페이지 박사가 하고, 노스 판사와 아들 조너선, 나는 참관했다.” 마서가 ‘해부’에 대해 이야기한 것들은 초기 미국 해부의 역사에서 아주 드문 기록이며, 여자가 써서 특히 중요하다. 마서가 살던 시기에는 뉴잉글랜드에서 해부가 어느 정도 관례가 되었다. 코튼 매더와 새뮤얼 슈얼(청교도였던, 헨리의 선조) 모두 17세기 말에 보스턴에서 해부한 것을 기록했다. 18세기 초반에는 과학에 시신을 기증하는 것이 공공의식이 있는 행위로 여겨졌다. 1736년 2월 10일자 ≪뉴잉글랜드 위클리 저널(New England Weekly Journal)≫은 ‘폐결핵’으로 죽어가던 데덤의 젊은 여성이 “비슷한 병으로 고생할지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자기 내장을 해부해서 검사하기를 간절히 바랐다”고 보도했다. 18세기 중엽에는 해부한 결과가 때로 신문에 보도되기도 했다. ---p. 297, 5장 중에서 마서는 자신의 기도와 놓친 잠, 자신이 자비와 인정을 베푼 행위도 기록했지만,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는 사소한 다툼과 작은 행복도 기록했다. 일기는 마서가 자신의 삶을 이해하고 정당화할 필요성에 따라 선택적으로 기록한 것이지만, 아주 솔직한 기록이기도 했다. 우리는 일기를 통해 마서가 거름을 삽으로 떠서 나르고 고양이 피를 빼는 시온의 딸이며, 양심적으로 보수를 받고 가끔은 큰 맘 먹고 새 찻주전자를 사거나 새 드레스를 사 입는 신앙심 깊은 산파이고, 딸들이 빨래하는 동안 낮잠을 자고 하인들이 행동을 잘못하면 꾸지람을 하고 가끔 남편과 싸우기도 하는 자기희생적인 이웃이라는 것을 안다. 일기는 우리에게 독실한 기독교인이지만 때로는 지성 탓에 교회에 가거나 읍에 있는 의사들의 의견에 따르지 못했던 소박한 간호사였고, 자기 집의 소유권을 놓고 아들과 싸우고 때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는 정다운 어머니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마서는 의무감과 해부에 대한 호기심이 강해 고인의 죽음을 슬퍼하면서도 해부하는 것을 지켜본 부드러운 여성이었으며, 결코 자기 말에 가만히 앉아 있을 줄 모르는 용감한 여성이었으며, 몇 번이나 자살과 살인, 전쟁과 마주쳤으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정의가 승리할 거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은 날카로운 눈과 현실적인 감각을 지닌 여성이었다. ---p. 410, 10장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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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아주 위험할 정도로 아프다” - 마서는 아픈 사람들을 다양한 약초를 활용하여 민간 의술로 치료하고, 그것을 일기에 기록한다. 사망률이 높아지는 할로웰과 당시 산파에 대한 인식, 치료사와 산파로서의 마서가 묘사돼 있다.
2장 “베를 짰다” - 베를 짜듯이 연결되는 사회적 관계망과 노동의 성별 분업, 여성의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 가족생산, 이웃간 거래, 할로웰의 섬유경제, 의료와 섬유가 중심이 된 여성경제의 두 줄기, 이웃들과의 일상적인 만남을 통한 당시 안구 구성비와 사회적 관계망을 들여다본다. 3장 “포스터 부인이 남자 몇 명이 자신을 강간했다고 고소했다” - 뉴잉글랜드의 분열된 종교적 상황에 관한 이야기. 슈얼과 마서가 강간 사건 재판을 보는 차이와 그것을 둘러싼 재판이야기를 통해 뉴잉글랜드의 법률체계를 추적한다. 4장 “결혼식” - 혼전 성교의 유행, 낭만적인 연애보다 새로운 경제 관계를 수립하는 게 중요했던 18세기말의 분위기에 따른 결혼 풍습, 성적 끌림보다는 경제적 결합으로서의 결혼, 부자관계 인지 소송의 재판 기록을 통해 뉴잉글랜드의 결혼풍습을 살펴본다. 5장 “50번째 출산. 51번째 출산” - 출산 과정을 상세히 기록하지 않는 마서의 모습이 묘사된다. 할로웰의 명문가의 아이들을 받는 마서와 출산을 끝낸 산모의 회복 기간 이야기, 산욕기에 산모를 치료하는 마서의 모습, 산파에게 지불한 돈(수고비)으로 읍의 경제를 파악한다. 6장 “우리 집이 무기를 들고 일어났다” - 남편이 강도를 당한 일과 땅을 둘러싼 정착민들의 갈등, 그 땅을 측량하는 기사인 마서의 남편 이프리엄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오랜 집안일과 산파일로 지쳐 건강이 나빠진 마서의 모습도 보인다. 7장 “해부를 했다” - 공동체에서 치료와 죽음을 둘러싸고 벌이는 의식, 산파와 의사의 관계, 계속되는 가족생활의 시련, 마서의 다정함과 강인한 면모와 함께 초기 미국사에서는 드물게 마서(여성)가 적어 놓은 해부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당시 여성을 산파로 고용하는 것에 관한 사회적 논란을 통해 18세기에는 의사와 산파가 서로 협력했으나 점차 산파를 배제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밝힌다. 의사와 마서의 치료방식에 대한 충돌도 보인다. 8장 “내가 저녁에 어떤 장면을 보고 견뎌야 했는지” - 빚 때문에 체포된 이프리엄(남편)의 이야기를 통해 당시의 세금 관계와 그에 따른 구속 상황, 채무자를 중죄인과 같이 대접하는 케네벡 판사들이 묘사된다. 남편과 떨어진 마서의 생활과 그 틈을 타 집을 가로채려는 아들의 버릇없는 행동을 통해 채무로 인한 구속이 가족 관계에 끼치는 영향을 보여준다. 추운 감방에서 떨고 있을 남편을 생각하며 외투를 수선하고 타이즈를 뜨는 마서의 모습도 보인다. 9장 “폴리 퍼링턴이 여기 왔다” - 보도이넘에서 새로 이사 온 퍼링턴(대위)에 대한 기록이 주를 이룬다. 근면 성실한 퍼링턴과 가족들이야기, 끔찍한 살인현장을 생생하지만 간결하게 기록한 마서의 일기와 이를 통해 새로운 종파(이단)의 출현과 확장에 따라 마서의 이웃들도 그 종파의 신도가 되는 이야기가 담겨있다. 퍼링턴도 그 중 하나였던 것이다. 침례교, 자유의지 침례교, 보편구제교 등이 충돌한 당시 종교 상황, 퍼링턴 사건을 둘러싼 사람들의 관점들, 잘스 질이라는 사람이 파산 상태에서 자살한 사건, 이 사건을 보는 헨리 슈얼의 일기와 마서 일기의 대조적 모습, 계속 되는 끔찍한 소식들이 이어진다. 10장 “내 뜰에서 일했다” - 계속되는 일상, 땅을 둘러싼 개척자들의 갈등, 개척자들의 소요사태, 시끄러운 사건들(외적으로는 제퍼슨의 통상 금지령, 전쟁의 기운, 군대의 소집, 측량기사 공격)에도 그저 묵묵히 일을 해나갈 수밖에 없는 마서의 모습이 보인다. 마서의 기록으로 알 수 있는 미국 초기 농사, 원예, 여성들의 노동, 계속되는 지주와 개척자들의 싸움 그리고 마서의 죽음에 관한 내용이 담겨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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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사의 본령에 가장 근접한 《산파일기》
《산파일기》는 1991년 퓰리처상 역사부문 수상작이자, 미시사의 주요 저작 중 하나인 로렐 대처 울리히의 《A Midwife's Tale: the Life of Martha Ballard Based on Her Diary, 1785-1812》를 번역한 책이다. 서구에서 1970년대부터 관심을 끌어온 미시사는, 1990년대 후반 미시사의 신호탄을 쏘아 전 세계적 관심을 불러 일으켰던 카를로 진즈부르그의 《치즈와 구더기》와 나탈리 데이비스의 《마르탱 게르의 귀향》이 국내에 번역되면서 큰 붐을 이루었다. 이후 미시사 관련 책이 많이 나왔지만, 본질적으로 ‘역사 속 개개인의 구체적인 삶’에 주목하는 미시사의 주요 저작들은 거의 번역되지 않았다. 하나의 마을, 가족 혹은 개인에게 초점을 맞추어 그들의 일상적인 삶을 통해 당시 사회적 관계의 그물망과 그 현상이 지니는 역사적 의미를 구체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미시사의 본령이라고 한다면, 《산파일기》는 그것에 가장 부합하는 책이라 할 수 있다. 《산파일기》에서 로렐 대처 울리히가 연구 대상으로 삼고 있는 텍스트가 바로 18세기 말, 미국 뉴잉글랜드 지역의 할로웰에서 살던 마서 밸러드라는 한 산파가 27년간 기록한 일기이기 때문이다. 일기의 발견으로 이루어진 시공간을 뛰어넘은 두 여인의 만남 1785년부터 마서가 사망한 1812년까지 기록된 마서 밸러드의 일기는 현손인 메리 호버트에 의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 의사였던 호버트는 증조할머니에게 물려받은 마서의 일기에 관심이 갔고, 일기의 중요성을 직감한 호버트는 메인 주립 도서관에 일기를 기증했다. 당시 뉴햄프셔 대학에 재직하며 뉴잉글랜드 지역을 중심으로 한 초기 미국사를 연구하던 로렐 대처 울리히가 이 일기를 발견하면서 시공간을 뛰어넘은 두 여인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마서 밸러드의 일기에는 무엇이 기록되어 있을까? 뭔가 특별하고 극적인 내용이 있을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는 않다. 마서의 일기는 수입과 지출, 경제적인 내용과 가족행사, 날씨의 변화, 원예와 관련된 내용이나 이웃을 방문하거나 방문한 일, 공적인 일이나 성적인 추문 따위처럼 평범한 내용들이 담겨있다. 그래서 이 일기를 부정적으로 평가한 역사가들도 있다. 하지만, 울리히는 바로 그 지루할 정도로 반복되는 일상성에 주목했고, 일기에 기록된 일상을 통해 당시 사회적 관계망을 엮어나가 마침내 역사 속에 가려져 있던 사람들을 역사의 전면으로 등장시키는 데 성공했다. 27년 동안 아기를 816번이나 받은 산파, 마서 밸러드 마서는 1735년에 매사추세츠의 옥스퍼드에서 태어나, 미영전쟁이 발발하던 1812년에 세상을 떠났다. 18세기 초는 미국 역사에 있어서, 미국에 대한 영국의 식민지 건설이 본격화된 이후 본국과의 갈등이 첨예화되던 시기였다. 마서의 일기가 처음 시작되는 1785년은 독립선언 이후 미국이 정치적으로 영국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시기였다. 마서가 사망한 1812년에 이르러서 미국은 본격적으로 미공화국의 기틀을 잡으면서 경제적 자립을 추구했다. 이처럼 마서의 생애는 초기 미국사에 있어 격변의 시기였지만, 로렐 대처 울리히는 관심은 이러한 거대한 역사가 아니라 그 속에 살아 나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 있었다. 마서의 일기에 기록된 여러 사건들에 관한 구체적 문서와 증거를 발로 뛰며 수집한 울리히는 마치 탐정처럼 그 사소한 역사를 들춰낸다. 마서 밸러드는 1754년에 측량기사인 이프리엄 밸러드와 결혼했고, 자식 여섯을 둔 평범한 주부였다. 마서가 역사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일기를 남겼기 때문이다. 당시에 남자들이 남긴 일기는 몇몇 있지만 여성이, 게다가 산파로 일한 생생한 기록이 담긴 일기는 극히 드물었다. 마서가 살았던 뉴잉글랜드 메인 주의 할로웰은 청교도의 회중교회 전통이 강한 지역이었다. 땅 개척과 관련하여 충돌이 잦았던 케네벡 강 유역으로, 마서는 한 겨울에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는 강을 건너 아이를 받으러 다녔고, 27년 동안 816번이나 아이를 받았다. 이 극적인 드라마는 1998년에 미국의 공영 교육방송인 PBS가 다큐멘터리로 제작했고, 울리히가 직접 해설을 맡기도 했다. 역사 속에 묻혀 가려진 사람들의 작은 목소리 로렐 대처 울리히는 이 책으로 1991년 퓰리처상 역사부문은 물론, 최고의 역사 저작물에 주어지는 뱅크로프트상, 미국의학사학회상, 뉴잉글랜드 역사학회상을 비롯한 무려 8개의 상을 휩쓸었다. 그리고 초기 미국사 연구에 관한 공로를 인정받아 하버드대 교수로 임용되었다. 이런 울리히 교수의 학문적 성과는 그동안 역사 속에 가려진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마서의 일기에는 여러 사람들이 등장한다. 일기의 기록만으로는 파악하기 힘든 동명이인을 포함해 너무나 많은 사람이 나와 울리히는 그 이름들을 기억하려 하지 말고 그냥 편안히 만남을 즐기라고까지 할 정도다. 일기에 기록된 그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 중에는 꽤나 재미있는 내용들도 있다. 마서와 같은 시기에 일기를 썼던 헨리 슈얼이라는 할로웰 지역의 서기는 같은 사건에 관해서 마서와는 다른 입장을 보인다. 초대 대통령이 조지 워싱턴이 근처를 방문했을 때의 마서와 슈얼의 기록과 마을에서 강간 사건이 일어나고 그 재판 과정을 지켜보는 두 관점의 차이를 보면, 마서는 감정을 배제한 반면 슈얼은 주관을 많이 개입시키고 흥분하는 모습을 보이기까지 한다. 당시 남녀의 결혼 풍습에 관한 기록도 돋보인다.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이 낭만적 연애보다는 경제적 결합의 한 형태로 결혼이 이뤄졌지만, 그럼에도 혼전 성교가 유행하였음을 울리히는 당시 부자관계 인지소송 재판 기록을 통해 증명한다. 여기서 재미난 것은, 당시 아이의 아버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산모가 산고의 고통을 겪을 때 집요하게 그것을 묻는 방법을 썼다고 한다. 고통 속에서 거짓말을 할 리가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 밖에도 땅을 둘러싼 정착민들의 갈등, 강도사건, 지식을 중시하는 의사와 경험을 중시하는 마서의 대립, 아버지가 채무관계로 구속된 후 집을 빼앗으려는 버릇없는 아들에 대한 불평, 얼마 되지 않는 돈의 채무관계 때문에 인신 구속을 하는 판사들의 모습을 묘사한 부분은 남의 일기를 훔쳐보면서 느끼는 재미를 얻기에 충분하다. 자신의 존재에 대한 주장이 담긴 인류 절반의 역사 “오늘이 내가 결혼한 지 52주년 되는 날이다. 아, 그 후로 내가 겪은 장면들이라니. 생각에 잠겨 누웠으나 거의 자지 못했다”라고 시작되는 1806년 12월 마서의 일기는 “마흔다섯 살이 된 생일 아침, 나는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여섯시에 맞춘 괘종시계 소리에 눈을 떴다”로 시작되는 오정희의 소설 《옛우물》을 떠올리게 한다. 모성성을 통해 여성의 정체성을 발견하는 《옛우물》의 주인공처럼, 마서 밸러드라는 한 산파 역시, 반세기 동안 삶의 소용돌이 속에서 여성으로서 살아온 자기 존재에 대한 끊임없는 ‘주장’을 한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바로 추운 겨울,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는 케네벡 강을 마서가 목숨을 걸고 건너는 장면이다. 모두가 잠든 새벽에도 마서는 이웃에서 산기가 있다는 전갈을 받고 길을 나선다. 이러한 마서의 행위는 단순히 보수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 일은 마서 자신에 관한 정체성이자, 앞서 언급했듯 ‘존재에 관한 주장’이었다고 울리히는 말한다. 추천의 글을 쓴 조한욱 교수 역시 이 책의 가장 큰 의미로 미국사 개설서 어느 곳에서도 보이지 않던 여성들, “언제 어디서나 존재했지만, 역사 속에 드러나지 않았던 인류의 절반”을 볼 수 있게 한 점을 꼽았다. 일기를 통해 귀환한 이름 ‘마서 무어 밸러드’ 앞서 《산파일기》에 특별한 이야기가 거의 없다고 했지만, 책의 후반부로 갈수록 긴장감 넘치고, 충격적인 이야기들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펼쳐지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마서도 일기에서 ‘장면(Scene)'이라는 단어를 많이 쓴다. 마서의 일기에서 가장 충격적인 내용은 바로 폴리 퍼링턴이라는 한 가장이 일가족을 살해하고 자살한 사건이다. 울리히는 이 사건과 관련하여 당시 이단 종파의 출현과 그 사건을 둘러싼 사람들의 관점을 추적한다. 또한, 파산 상태에서 자살한 찰스 질이라는 사내에 관해 기록한 마서와 슈얼의 상반된 관점의 일기가 담겨있다. 땅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개척자들의 갈등과 소요사태, 전쟁의 기운, 측량기사를 공격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마서는 계속 아이를 받거나, 농사를 짓거나, 직물을 짜는 일을 계속 한다. 울리히는 마서의 일기와 그 속에서 작은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을 통해 새로운 역사에 접근했다. “역사란 평범한 사람들의 소리 없는 작업에 봉헌해야 하며, 그 목적은 개인적인 사건과 개인적 경험 사이의 상호관련성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라는 울리히 교수의 믿음은, 자세한 분석이나 설명보다는 이야기체 서술로 풀어나가는 당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실증을 넘어선 ‘가능성’의 역사를 열었다고 평가 받는다. 오늘날에서 보면 마서는 산파이면서 동시에 간호사, 의사, 장의사, 약사, 자상한 아내였다. 게다가 마서는 일기를 남겨 자신이 살았던 읍의 역사, 그 자체가 되었다. 마서의 말년은 미국 역사에 있어서 매우 불안정한 시기였고, 실제로 할로웰에서 크고 작은 소요사태가 일어났다. 1812년 6월 2일자 신문 《미국의 대변자》에는 “이프리엄 밸러드 씨의 배우자 마서 부인, 오거스타에서 사망. 향년 77세”라는 짧은 부고가 실렸다. 마서는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이름을 갖지 못하고 ‘이프리엄 밸러드 씨의 배우자 마서 부인’으로 기록됐지만, 마서의 일기와 그 일기를 치열하게 연구한 울리히로 인하여 800명 이상의 아이를 받고 마을에서 존경 받았던 ‘마서 무어 밸러드’라는 이름은 당당히 역사의 전면으로 귀환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