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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총을 펜으로 바꾸어
불효자의 변 강요된 권위와 언론자유 해방 40년의 반성과 민족의 내일 통일의 도덕성 해설 지은이에 대해 엮은이에 대해 해설자에 대해 |
李泳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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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 상태에서 벗어난 민족이 ‘새 나라’를 꾸려 가는 작업은 결코 과거의 식민자가 남기고 간 것 위에서의 변장(變裝)이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우리는 일제가 남기고 간 일체의 것을 일단은 부정하고 그것들과 단절하고 극복해야 했던 것이다. 한마디로 ‘질적 변화’이어야 했을 것이다. 말하자면 새 나라를 건설하려는 우리가 1945년 8월 15일 이후의 몇 해 동안에 했어야 할 일은 거족적 역량을 쏟아 일본인이 우리를 부정했던 그 ‘부정(否定)을 부정’하는 작업이었던 것이다.
---「해방 40년의 반성과 민족의 내일」중에서 |
‘한국수필선집’은 지식을만드는지식과 한국문학평론가협회가 공동 기획했습니다. 한국문학평론가협회는 한국 근현대 수필을 대표하는 주요 수필가 50명을 엄선하고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를 엮은이와 해설자로 추천했습니다. 작고 작가의 선집은 초판본의 표기를 살렸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지식인은 양가적인 존재로 인식된다. 한편으로 지식인은 자신이 가진 ‘앎’을 통해 공동체의 보다 나은 삶과 가치를 제시하는 존재로 인식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지닌 지식을 통해 권력에 영합하는 풍자와 조롱의 대상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정확한 통계를 낼 수는 없겠지만, 대체로 시대가 흐름에 따라 후자로서의 지식인 상(像)이 강화되는 경향인 듯하다. 즉, 거시적인 층위에서의 시대정신의 분석과 공동의 가치에 대한 모색이라는 지식인 고유의 몫보다는, 일종의 지식?기술자, 즉 테크노크라트로서의 지식인의 기능이 강화되면서 분화된 전문 분야에서 자신의 지식과 정보를 활용해 세속적 안위를 추구하는 존재로서의 지식인 상이 주류적인 흐름을 이루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기실 이와 같은 지식인의 양가성은 어쩌면 지식인이 처음 탄생한 순간부터 예정된 것일는지도 모른다. 지식은 그 자체로 특정 개인의 것이 아니라 인류 역사에 의해 축적된 공공재적 성격을 지닌다. 따라서 이러한 앎을 체득한 개체인 지식인은 곧 자신의 앎을 공공적으로 활용해야 하는 의무를 지닌다. 그러나 동시에 지식인 역시 하나의 개체일 따름이며, 따라서 생존을 위해 자신의 지식을 활용해야 하는 현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특히 매우 세밀하게 분화된 현대사회에서 지식인은 일종의 지식?기술자로 활동함으로써만 즉각적인 효용성을 입증받을 수 있다. 이러한 사정을 고려한다면 지식인이 이 두 가지 상이한 존재 조건 사이에서 갈등하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매우 빠른 속도로 공공적 성격의 지식보다 즉각적인 효용성을 지닌 지식을 요구하는 사회적 현실을 고려한다면 후자로서의 지식인 상이 강화되는 것 역시 그럭저럭 납득할 수는 있는 일이다. 문제는 후자로서의 지식인 상, 그러니까 테크노크라트로서의 지식?기술자의 상이 압도적으로 강조되면서, 지식인이 지닌 본연의 고유한 ‘의무’를 담당할 존재가 상실되고 있다는 점이다. 앞서 잠시 언급한 것처럼 지식은 그 자체로 공공재적인 성격을 지닌다. 이는 지식인이 공동체의 보다 나은 삶의 방향을 제시하고 공유해야 하는 가치를 모색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런데 더 이상 이와 같은 역할을 수행할 집단 자체가 부재한 것이 현실이며, 이는 궁극적으로는 공동체의 붕괴를 가져온다는 점에서 매우 심각한 문제다. 지금 우리가 리영희의 수필을 다시 읽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리영희는 한국 현대사에서 단연코 두드러지는 온전한 의미의 ‘지식인’일 것이다. 1960년대부터 2000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사회가 지닌 공동의 문제를 냉철히 분석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지적 탐구를 그만큼 뜨겁게 수행한 인물은 흔하지 않다. 더욱이 그의 지식은 단지 현실을 ‘관찰’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천’을 통해 구체적으로 현현하는 것이었기에 그 가치가 더욱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리영희의 수필을 통해 한 실천적 지식인의 내면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