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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鼎權
■ 『산정묘지』 이후 20년…… 다시, 새로운 ‘높이’의 시인이 탄생하다
조정권은 스스로를 벼랑 끝에 내모는 이의 목소리처럼 차갑고 매서우면서도 그만큼이나 곧고 맑은 노래를 들려주었다. “높고 차고 청정한 것에 대한 견인주의적 동경”(유종호), “강철의 정신”(최동호), “어둠의 중심”(황현산), “결빙의 시학”(남진우)으로 호명되는 그의 시학은 이번 시집 『고요로의 초대』에서 ‘시은’과 ‘독생’의 키워드를 발판 삼아 자기 성찰을 지속한다. 외로움은 시인들의 은둔지. 외로움은 신성한 성당. (중략) 시인은 1인 교주이자 그 자신이 1인 신도. 시는 신이 없는 종교. 그 속에서 독생(獨生)하는 언어. 시은(市隱)하는 언어. -「은둔지」에서 1인 교주이자 1인 신도임을 천명한 시인의 은둔은 도피로서의 은둔이 아니라 세속 속에서의 투철한 은둔, 즉 ‘시은(市隱)’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조정권의 시는 일찌감치 관념론의 함정을 비껴간다. 그의 치열한 정신적 투쟁은 현실과 언어의 긴장 사이에서 벌어지기 때문이다. “동물의 털모자를 쓸 자격은 동물들 그들”이라며 “교황님이 착용하시는 담비 털모자 좀 벗으시라” 하고, “국회의사당 정문 앞에서 방석을 깔고 어떤 어머니가 생수병을 든 채” 부르는 노래를 “밟고 지나갈 순 없다”는 시를 두고 현실을 모르는 소리라 할 수 있을까? 그의 시는 자본주의적 일상을 인지하되 인정하기는 거부하는 방식으로 현실과의 긴장 관계를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우리는 조정권의 시가 고전적인 견인주의를 넘어 독창적인 ‘현대성’의 성취로 도약하는 지점을 발견한다. ■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런 뜻도 없는 말 한 송이로 수렴하는 구도의 여정 새로운 높이로 나아가는 『고요로의 초대』의 시편들은 어떤 가치나 관념을 목표하지 않는다. 어디를 향하지 않고 아무것도 아님을 추구하며 끝없는 자기 분화와 분열을 감내한다. 그렇게 “오랜 세월 수신지 없는 편지처럼 떠돌”고 “나를 쓰러뜨리며 일으킨” 끝에 마침내 도달하는 것은 아무 뜻도 없는 텅 빈 언어이다. 그 언어는 “인간의 말이 아니라 새의 말”이어서 “어디다 발표할 게 아니”지만 각성을 일으키듯 “내 머리통을 패는” 그 무엇이다. 문자화할 수 없는 관념의 문제는 가히 낯설지 않은 시제(詩題)이다. 그러나 조정권은 이 비인칭의 언어를 옹호하며 나아가 그것의 ‘아무것도 아님’을 적극적으로 주장한다.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 말 한 송이 들고/ 찾아간다. 아무런 뜻도 없는 말 한 송이 들고 아무도 아니고 아무도 아닌 그분을 뵈러 (중략) 아무 뜻도 없는 말 한 송이는 1만 년 동안 햇빛이 돋보기로 들여다본 씨앗 같고 무성하게 자란 관목의 먼 조상 같다. -「문안」에서 적막한 은둔 속에서 시편이 추구하는 미학적, 정신적 차원은 “無의 꽃을 피워” 내는 경지에 이른다. 이것은 비어 있음으로 해서 어떤 의미에도 기생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는 언어, 곧 ‘독생(獨生)’하는 언어이다. ‘독생’은 아무것도 아닌 말 한 마디의 ‘있음’을 드러내며 시인의 정신적 탐험을 구도의 여정으로 전환한다. 어떤 관념도 함부로 발설할 수 없는 풍경은 그래서 견고하고 또 선명하다. 이제 “무거운 머리”도, “헐벗은 두 손”도 내려놓자. 모든 해석이 무화된, 허기진 시간과 침묵하는 공간으로 들어가자. 『고요로의 초대』는 ‘아무것도 아님’으로 오히려 풍요롭게 채워진 고요의 시공간으로 우리를 이끄는 청아한 초대장이다. 조정권의 시는 한국 현대시의 어떤 독생의 언어, 어떤 유파로부터도 자유로운 1인의 종교를 추구한 독생의 시로 호명할 수 있다. 현실과 언어 사이의 독생, 세속과 신성 사이의 시은으로서의 시. 조정권의 시에서 정신의 높이에 대한 지향은 고전적인 규범에 대한 수락이 아니라 정신의 새로운 윤리를 스스로 창조하기 위한 끝없는 자기 혁신의 과정을 의미하며, 그런 맥락에서 현대성의 미학적 기획의 일부로 이해할 수 있다. 그곳에서 다시 새로운 ‘높이’의 시인이 탄생한다. - 이광호(문학평론가·서울예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