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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自序)
Ⅰ 디엥 고원 13 인디언 오션 15 그리운 바타비아 16 여름 가고 여름 18 밤의 항구 20 네덜란드 인 묘지 22 밤의 그림자 극장 24 유파스나무 숲의 은둔자 26 무인도 시퀀스 28 나무어미 30 해변의 모스크 32 아홉 개의 힌두사원으로 가는 숲 34 미낭까바우, 여자 36 언덕 위의 승방 38 Ⅱ 다음 생의 운세 43 옛집의 언정 45 격자무늬 창문 48 이사 50 독작 52 냉장고가 없는 야채 가게 54 레이디 D 56 천 개의 문 58 우기의 독서 60 부조 61 그린란드 상어 62 시니 64 금요일 66 Ⅲ 내가 당신의 애인이었을 때 71 눈물 73 제이 74 까마귀가 나는 밀밭 76 굳바이, 시인 78 비인 80 노산여인숙 82 저수지 소네트 84 사루비아 화단 86 장마 88 북아현 89 골목 90 Ⅳ 1989 93 습작 일기 94 사시 96 우주 허밍 98 여름 병동 100 삼천포 102 동대구행 103 마지막 장마 104 배드민턴 치는 저녁 106 죽은 시인을 위한 낭독회 108 사량 110 메리제인 구두 112 출국 113 작품 해설 -소유정 (문학평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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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작하게 익어 가는 열매를 따먹으며
우리는 이 도시에서 늙어 가겠지만 꽃은 제 심장을 어디에 감추어 두고 지려나 여름 가고 여름 온다 ---「여름 가고 여름」중에서 아홉 개의 힌두사원이 있는 산길을 신의 등허리를 타고 오른다 나를 놓치지 말아다오 사람들은 외롭지 않겠다고 사원을 지었던 거란다 두려운 것은 신이 아니라 외로움이거든 ---「아홉 개의 힌두사원으로 가는 숲」중에서 잊혀진다는 건 세월이 주는 모멸을 견디는 것이었지만 이제는 기도조차 모국어로 하지 않는다고 떠나온 나라의 폐사지를 걸어 나오듯 당신은 낡은 휠체어 바퀴를 매만지며 천천히 사원을 빠져 나간다 저녁 아잔 소리가 거친 이마 주름을 따라 흐른다 오늘은 금요일 ---「금요일」중에서 안녕, 하는 말은 비행기를 닮았어요 날렵하고 매끄러운 금속 같아요 언제부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방방곡곡 병실에 누워 작별의 인사를 합니다 그러나 내가 없는 동안에도 사랑을 멈추지 말아요 ---「출국」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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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생으로 보내는 전생의 노래
채인숙 시의 주된 공간은 그가 거주하는 인도네시아다. 데뷔작 「1945, 그리운 바타비아」 역시 인도네시아 자카르타를 배경으로 쓴 시다. 이국적인 풍경 안에서 식민지라는 공적 기억과 사랑이라는 사적 기억이 섞이며 만들어 내는 독창적인 정조가 특수하면서도 보편적인 모습으로 재현된다. 구체적인 사건으로서는 한국인의 역사적 경험과 다르지만 그 서사의 보편성은 “바타비아의 밤”을 특정한 시공간에서 벗어나게 한다. 채인숙 시의 주된 공간이 갖는 특수성은 공통된 시간의 흐름과 함께 보편성을 획득한다. 소리를 죽여 혼자 우는 자바의 물소나 깜보자 꽃송이, 자바의 검은 돌계단 같은 이방인들의 단어도 어느새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이 된다. 과거와 미래로 확장되는 노래는 낯설지만 편안하다. ■ 잃어버린 재의 서사 열대에 부는 찬 바람은 따뜻한 느낌일까 차가운 느낌일까. 언젠가 이국에서 맞았던 훈풍은 그때 그 감각을 잊을 수 없는 유일한 바람이다.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았던 그 바람은 바람 그 자체였다. 그저 움직임만이 느껴졌다는 점에서 순수한 바람이기도 했다. 시집을 펼치면 독자들이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시 「디엥고원」은 “열대에 찬 바람이 분다”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 문장은 순식간에 우리를 한 계절이 되풀이되는 열대의 섬나라로 이동시킨다. 뜨거워졌다 차가워지기를 반복하는 내면을 품은 사람들은 바깥을 에워싼 지독한 ‘한결같음’을 어떻게 견딜까. 그때 시인의 눈에 들어오는 건 “가장 단순한 기도”를 올리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땅의 뜨거움과/ 하늘의 차가움을 견디”기 위해 화산재를 밟으며 사라진 사원을 오르는 여자들. 더 바라지 않는 경지만이 다다를 수 있는 초월의 상태 속에서 인내와 정화의 상징이자 지금은 잃어버린 재의 서사가 무심코 일어선다. 그들의 이야기는 순수한 바람 같고 또 지독하게 한결같다. ■ 그리움의 동사 시집에는 동일한 상황이 반복되는 왕복운동에 관한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밤이 오고 밤이 갔다”거나 “여름이 오고 여름이 갔다”는 식, 또는 “파도가 가고 파도가 온다”와 같은 왕복운동에는 떠나는 행위와 돌아오는 행위의 반복이 각인되어 있다. 그리움은 이토록 오고 가는 동사의 모습을 취한다. 시는 병의 흔적이기도 하지만 그리움을 달래는 치유의 기록이기도 하다. 속절없이 여름이 반복되는 계절과 무관하게 내면은 덜컹거리며 오고갈 때 “습기의 무기”가 무거워지면 마음엔 스콜처럼 시가 쏟아졌다. 시집의 후반부는 시로 안부를 전하고 시로 안부를 물었던 시간들에 대한 회상으로 가득하다. 이상한 식물과 수상한 동물들의 나라에서 출발한 시원적 그리움이 열대에 부는 찬바람에 섞여 우리에게 날아든다. 어떻게 울어야 할지 알 수 없을 때마다 습작한 시의 형체로, 그칠 수 없는 존재의 형식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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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숙의 시를 읽으면서 왠지 모르게 가슴 한쪽이 흔들리는 순간들이 있었다. 이별의 술상에서 불렀던 노래처럼. 생을 관통해 그리워했던 사람에게 끝내 못 참고 쓴 편지처럼. 그러나 불태워 버린 편지처럼. 채인숙의 시에는 재가 되어 버린 서사가 있다. 현대시가 잊고 있었던 재의 서사가 열대의 나라에서 날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고통 속에서 부른 노래만이 고통을 담을 수 있는 법. 미분되어 날아가 버리는 시들이 득세한 세상에 쌓이고 쌓여서 도달한 슬픔을 읽는 아련한 시간이 있었다. - 허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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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결에 적은 편지와 같고, 자리를 지키며 고요히 바라보는 나무 같고, 제 속을 보이지 않지만 길을 열어 주는 바다 같은 몸으로. 여름을 건너 우리에게 닿은 이 시들은 이제 더 이상 “누구에게도 읽히지 않는 시”가 아니기에 굳이 “희망”을 노래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언제나 혼자였을 시이나 이제는 독자의 손에 함께인 시이므로, “주목나무 아래”에서 “혼자 낭독”하던 목소리에 하나둘 보태어지는 목소리를 기대해도 좋겠다. - 소유정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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