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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sana For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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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문간에서 라일락 색깔의 두꺼운 스타킹을 신고, 젖은 붓처럼 머리카락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고, 너무 큰 실내복을 입은 채 맨발에 발뒤꿈치를 들고 서 있던 헬레나를 처음 보았을 때 이스마일은 아주 낯선 감정에 빠져들었다.
심한 거부감, 즉 오랜 세월 동안 안정적으로 지속되던 상황이 낯선 사람의 출현으로 갑자기 바뀌어버릴 때 느끼게 되는 그런 특별한 불쾌감이었다. 처음에 이스마일은 그 변화가 정확히 어떤 것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 낯선 감정을 의식하며 곰곰이 생각해본 것도 아니었으나, 점차 겁이 나고 불안감에 사로잡히면서 직관적으로 감지했다. 이스마일은 그녀 앞에서 예의를 갖추는 것으로 놀랍고 당황스러운 마음을 감추려고 했다. 그렇지만 불편한 마음은 여전했다. “이스마일이군요.” 헬레나가 이스마일을 껴안기 전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두 앞니 사이가 거의 알아볼 수도 없을 정도로 살짝 벌어져 있는 그녀의 이가 반짝거렸다. 헬레나는 이스마일을 복도로 인도해 서재 옆방으로 안내했다. 이스마일이 형과 함께 유년 시절을 보낸 방이었다. “오후 늦게나 도착할 줄 알았어요.” 헬레나는 방문에 자물쇠가 채워져 있는 것을 보고 이렇게 사과했다. “잠깐만 기다려요. 열쇠 가져올게요.” 이스마일은 형수가 위층으로 올라갔다 내려오는 그 몇 분 동안에, 죽은 사람의 방은 항상 자물쇠를 채워 놓는다는 알바니아의 미신을 떠올렸다. --- pp.23-24 자눔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도 밝히지 않았다. 이 세상에 발을 들여놓지 않는 게 더 좋았을 정도로 끝장을 내는 것이 무엇인지도 말하지 않았다. (……) 빅토르가 무거운 분위기를 바꾸고, 아버지가 침묵을 지키며 지탱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중압감을 덜어주려고 대화를 시도했다. 그는 이스마일의 경솔한 언행과 나쁜 친구들을 언급했지만, 약간은 감싸는 듯한 목소리로 문제의 심각성을 완화하려 했다. (……) 형수 헬레나 보르스피가 식탁 아래로 왼손을 뻗어 이스마일의 손을 더듬었던 것이다.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런 단순한 몸짓이 결정적인 행동으로 변해버렸다. 마치 이스마일에게 칼 한 자루를 쥐어주는 것과 같았다. 이스마일은 본능적으로 그녀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가 보았던 것은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그녀의 눈빛이었다. 이스마일은 평평하지 않은 언덕길을 내려갈 때의 느낌을 받았다. 어둠 속에서 계단을 내려가는데 갑자기 층계 하나가 비어 있을 때와 같은 느낌, 자유낙하를 할 때 느끼는 현기증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이스마일은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 유발하는 희열의 의미를 제대로 깨달을 만큼 명석했다.(……) 심장이 고통스러울 정도로 팔딱팔딱 뛰면서 부드러운 전율이 온몸으로 퍼져갔다. 호흡이 멈추는 것 같았고, 그 순간에는 모든 장애가 사라졌다. 마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다는 듯이, 당황스러워하면서도 뭔가를 확인하는 것 같은 눈빛으로 이스마일을 관찰하던 담갈색 눈만 존재하고 있었다. --- pp.154-1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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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파냐 문단의 최고 이야기꾼’ 수사나 포르테스가 빚어낸 감동의 서사시
1994년 첫 작품을 발표하고 신인소설가 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에스파냐 문단에 등장한 작가 수사나 포르테스. 현재까지 8편의 소설을 발표한 그녀는 2001년 프리마베라 상, 2006년 발렌시아 비평가 상, 2009년 페르난도 라라 상 등 에스파냐의 권위 있는 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녀의 작품들은 이미 12개국의 언어로 출간된 바 있다. 수사나 포르테스는 ‘에스파냐 문단의 최고 이야기꾼’으로 불리며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고 있는 작가이다. 『알바니아의 사랑』은 그녀의 소설 중 가장 문학적 성취도가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고대 그리스의 대시인 아이스킬로스의 비극과 비견될 만큼 놀라운 작품”이라는 찬사를 받은 이 소설은 2003년, 에스파냐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플라네타 상의 최종 후보작에 오르기도 했다. 작가는 2대에 걸친 파국적이면서도 농염한 사랑을 ‘세계에서 가장 폐쇄적인 국가’인 알바니아를 배경으로 밀도 높은 내러티브와 정밀한 언어로 그려낸다. ‘유럽 속의 유일한 이슬람국가’인 알바니아는 수많은 외세의 침략과 정치적 격랑을 겪으면서도 종교와 문화의 다양성을 잃지 않은 독특한 나라이다. 세계 2차대전 이후에는 공산주의 독재정권이 외부세계와 단절하고 폭정을 일삼아 국민들은 공포 속에서 하루하루를 연명해야 했다. 작가는 온갖 음모와 비밀이 개개인의 삶에 영향을 끼친 1950~70년대의 시대상황과 알바니아의 독특한 삶의 방식에 주목한다. 그리고 격변의 시대를 관통하여 2대에 걸쳐 벌어진 금기시된 남녀의 사랑을 정교하게 풀어낸다. 알바니아인들이 겪은 시대적 아픔과 운명적으로 비극을 내포한 남녀의 사랑을 정교하게 직조하여 그리스고전에서 음미할 수 있는 삶의 숭고한 정취를 자아낸다. ‘감동의 대서사시’라 평가받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스비극의 맥을 잇는 현대문학의 놀라운 성과물 어둡고 쓸쓸한 은둔의 나라에서 펼쳐지는 2대에 걸친 파국의 사랑 새벽녘의 정적을 깨우는 한 발의 총성. 갑작스런 파열음은 과거와 현재를 포개고 있는 비밀의 벽을 뚫고 금기의 속살을 들춰내기 시작한다. 『알바니아의 사랑』은 라드지크의 가문에서 2대에 걸쳐 벌어진 비밀스러운 비극적 삶을 이야기한다. 권력의 실세인 장군, 자눔 라드지크. 그의 저택은 알바니아를 상징하듯 폐쇄적이고 비밀스러운 공간이다. 당시 유럽에서 가장 고립되어 있고, 편집증적인 나라였던 알바니아는 이 소설의 중심무대가 되는 한 가문과 그 가문에서 벌어진 비밀을 더욱 음산하고 서늘한 분위기로 끌고 간다. 즉 이들 가족의 비극은 개개인의 삶에 고통을 안겨준 국가의 비극과 켜켜이 중첩되어 있다. 작가는 국가적인 비극이 개인의 운명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절묘하게 그려낸다. 자눔의 두 아들, 빅토르와 이스마일. 둘은 어린 시절부터 형제애를 넘어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로 성장한다. 하지만 이스마일이 다섯 살 때 어머니가 의문을 남긴 채 죽고, 비슷한 시기에 자눔의 절친한 친구이자 가문의 주치의인 기오르크 박사가 실종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그 후 어머니는 응접실에 걸려 있는 초상화로 존재할 뿐, 결코 이름이 불리지 않은 채 ‘그 여자’로 지칭된다. 어머니 없는 쓸쓸한 집 안에서 형제는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가지만, 형 빅토르가 군사학교에 입학한 뒤부터 사이가 서먹해진다. 아버지를 따라 군인이 된 빅토르는 시골 출신의 아름다운 헬레나와 결혼한다. 이스마일은 제대 후 집에서 처음으로 헬레나를 대면하는 순간, 알 수 없는 불안에 휩싸이면서 동시에 몸속에서 꿈틀대는 관능을 느끼게 된다. 숙명처럼 헬레나와 격정적인 사랑에 빠진 이스마일은 그녀를 통해 무의식 속에 잠들어 있던 어머니의 존재를 떠올린다. 그리고 어머니의 죽음에 석연찮은 일들이 도사리고 있었다는 것을 어렴풋이 떠올리게 된다. 그는 갑작스레 사라진 주치의의 행방을 찾고, 어린 시절의 유모를 만나면서 가문의 비밀을 하나둘 밝혀낸다. 그리고 에스파냐 출신인 어머니의 비극적인 삶과 자신의 정체성이 뒤흔들릴 만큼 충격적인 사실에 직면한다. 하지만 그의 몸과 마음은 이미 헬레나에게 고착되어 있다. 그는 자신조차 제어할 수 없을 만큼 그녀를 탐닉하게 된다. 헬레나 또한 이스마일을 받아들이면서도 앞날에 대한 불안감을 떨쳐낼 수 없는데……. 작가는 이스마일이 진실을 밝혀나가는 과정에 미스터리와 서스펜스, 리얼리즘 등 다양한 장르를 동원하여 긴장감과 흥미를 불어넣는다. 비밀이 서서히 밝혀질수록 이스마일은 선대에 벌어졌던 비극적인 운명이 자신의 삶에도 깊숙이 드리워진 것을, 도저히 벗어날 수 없을 만큼 자신을 철저하게 옥죄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파멸당할 것을 알면서도 통제할 수 없는 욕망, 발버둥 쳐도 빠져나가지 못할 숙명, 금지된 사랑, 질투와 복수 등 고대 그리스비극의 전통을 잇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탐구와 성찰이 치밀한 구성과 절제미 넘치는 문체로 구현된다. 인간의 숙명과 본성이 빚은 비극적 삶의 향연 이 소설의 중심축은 ‘남성성’과 ‘여성성’이다. 이것은 단순히 ‘남성/ 여성’, ‘강인함/ 나약함’, ‘중심/ 주변’ 등과 같은 단순한 대립구도를 나타내지 않는다. 그보다는 다양성과 풍부한 함의를 지닌 인간의 본성을 의미한다. 특히 작가가 주목하고 있는 것은 ‘남성성’이다. 수사나 포르테스는 기존의 정형화된 남성성에서 벗어난 새로운 남성성을 모색한다. 이 소설에서 구시대의 남성성과 새로운 남성성은 격렬하게 충돌한다. 자눔 라드지크는 가부장적인 질서와 세계관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는 ‘남성’, ‘지배’, ‘권력’이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는 알바니아의 사회와 맞닿아 있다. 그러나 자눔의 죽음과 더불어 가부장적 체제, 즉 가족을 비극과 심리적 억압으로 몰고 가던 강압적인 힘은 무너진다. 빅토르와 이스마일은 그러한 사회에 존재하는 두 가지 남성성을 보여준다. 군인인 빅토르는 자눔과 비슷한 속성을 지닌다. 반면 이스마일은 과거에서 비롯된 남성성에서 벗어난 새로운 유형의 남성성을 의미한다. 사고방식과 성격이 유연한 그는 여성적인 감수성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남자로서의 본성 또한 간직하고 있다. 이스마일은 기존 남성의 전형성을 부정하고 새로운 존재방식을 찾는 ‘새로운 인간’이다. 때문에 형제의 갈등은 필연적이고, 비극을 암시한다. 작가는 라드지크 가문의 비극을 통해 가부장적 남성은 군림하는 존재가 아니라 경직된 존재방식과 유연하지 못한 사고관으로 인해 희생당하는 존재라는 것을 은유적으로 이야기한다. 『알바니아의 사랑』은 여성성에 대해서도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겉으로는 남자들에게 의존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가부장적인 남자들이 드러내고 싶지 않은 비밀의 열쇠를 쥔 존재들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고유한 삶의 방식을 영위해나간다. 헬레나는 교육청의 장학사들에게 선택받아 티라나까지 유학을 왔다가 빅토르와 결혼을 하면서 억압적인 저택 생활에 얽매이게 된다. 매우 수동적인 존재처럼 보인다. 그러나 결국 그녀는 자유로운 영혼과 섬세한 감수성을 지닌 이스마일과 정서적인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현실을 초월한 사랑에 빠져든다. 헬레나 이전에 ‘그 여자’ 또한 가부장적 질서에서 일탈하여 자유로운 삶을 추구한 적이 있다. 그녀는 이승에서 파멸당한 후에도 저택의 벽을 장식하는 한 점의 초상화로 존재하면서 가문의 비극을 지켜본다. 이렇듯 작가는 인간의 내밀한 본성이 충돌하는 지점, 기존 삶의 질서를 고수하려는 욕망과 사랑과 자유를 갈구하려는 욕망을 포착한다. 그 지점에서 문학의 영원한 테마인 사랑, 그로 인한 욕망의 충돌이 파생된다. 충돌은 갈등을 낳는다. 갈등을 겪는 인물들은 비극적인 운명에 놓이게 된다. 그들의 운명은 독자들에게 진한 여운을 남긴다. 그 여운 뒤에서 독자들은 작가가 던지는 묵직한 화두, 즉 인간의 존재방식과 사랑의 의미에 대한 물음을 만나게 된다. 해외언론서평 정밀한 문체와 수사학적 절제미가 빚어낸 감동의 서사시_El Cultural 고대 그리스 비극의 맥을 잇는 현대문학의 성과물_Midwest Book Review 금지된 사랑에 대한 감동적인 성찰_Kirkus Reviews 21세기 세계문학의 흐름 _illusionist 세계의 작가 『알바니아의 사랑』을 내놓으면서 들녘의 ‘일루저니스트 세계의 작가’ 시리즈는 17종 21권의 문학작품을 출간하게 되었습니다. 일루저니스트는 ‘미래의 클래식’을 기치로 내건 새로운 개념의 문학시리즈로 영미권의 작품을 벗어나 다양한 문화권의 작품들을 독자들에게 선보이고 있습니다. 국내의 세계문학전집은 영미권과 서유럽권에 집중되어 있는데, 이는 문화적인 접근보다 정치적 역학 구도에 영향을 받은 측면이 큽니다. 세계에는 다양한 삶의 방식과 문화가 공존하고 있고, 독자들 또한 이러한 삶의 다양성을 느낄 수 있는 문학작품과 소통하기를 열망합니다. 하지만 다양한 문화권의 문학작품과 국내 독자들을 이어줄 작품들이 그동안 부족했던 것 또한 사실입니다. 들녘의 일루저니스트는 각 문화권의 개별성과 고유성의 가치를 지닌 작가와 작품들을 엄선하여 세계문학의 스펙트럼을 넓히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일루저니스트 시리즈는 작가적 개성과 문학사적 의미를 지닌 작가들과 작품들을 소개했습니다. ‘장르를 넘나들며 21세기형 소설을 보여주었다’고 평가받는 카탈루냐의 작가, 알베르트 산체스 피뇰(『차가운 피부』일루저니스트001, 『콩고의 판도라』일루저니스트012)과 서정적인 철학소설로 인생의 의미를 성찰하게 한 파스칼 메르시어(『리스본행 야간열차1·2』일루저니스트2·3)는 일루저니스트를 통해 처음으로 소개된 작가들입니다. 일루저니스트는 또한 남태평양 피지의 작가 에펠리 하우오파의 『엉덩이에 입맞춤을』(일루저니스트009)과 이스라엘의 작가 도리트 라비니안의 『페르시아의 신부』(일루저니스트 019), 아이슬란드의 작가 하들그리뮈르 헬가손의 『레이캬비크 101 1·2』(일루저니스트 017?018)처럼 쉽게 접하기 어려운 낯선 문화권의 소설을 선보이기도 했습니다. 다니엘 켈만(『나와 카민스키』일루저니스트 012)과 같이 세계적으로 두각을 나타내는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선별하기도 했습니다. 이번에 선보이는 『알바니아의 사랑』은 1950~70년대의 알바니아를 배경으로 ‘고대 그리스비극의 맥을 잇는 현대문학의 성과물’이라 평가할 만큼 숭고한 삶의 정취를 자아내는 소설입니다. 앞으로도 일루저니스트는 세계의 다양한 문학작품을 발굴하는 한편, 21세기의 최신 문학의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작품을 엄선하여 소개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