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층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놀이터는 빗물이 고여 작은 웅덩이 같다. 이틀 전 내린 폭우로 놀이터 곳곳에는 채 빠지지 않은 흙탕물이 고여 있다. 여자가 걸터앉은 시소의 반대쪽도, 아이가 매달려 있는 ‘구름사다리’ 아래도 물이 고여 있다. 여자는 콩깍지를 까고 있다. 깍지를 비틀 때면 벌어진 껍질 사이로 얼룩무늬의 강낭콩 알들이 나란히 나타난다. 여자의 손가락은 풋내가 물씬하다 깍지에서 튄 콩이 모래밭 위로 날아가면 여자는 허겁지겁 엉덩이를 공중으로 쳐들고 콩을 줍는다.
여자가 걸터앉은 시소가 무게 중심을 찾아 위로 조금 떠오른다. 아이의 체중은 철봉에 매달린 오른손에 실려있다. 사내아이는 지금 셋째 칸에서 넷째 칸으로 건너가기 위해 숨을 고르고 있는 중이다. 발을 적시지 않고 마른 땅으로 내려오려면 어쩔 수 없이 구름사다리를 다 건너가야만 한다. 흘러내린 바지와 오른팔 쪽으로 치켜 올라간 윗옷 사이로 드러난 맨살에 눈이 부시다.
여자는 남자로부터 등을 돌리고 앉아 있다. 남자에게는 여자의 구부린 등과 모래밭에 놓인 플라스틱 바구니만이 보일 뿐이다. 어느덧 바구니에는 강낭콩이 수북이 쌓인다. 오늘 저녁 강낭콩밥을 지으시게요? 남자는 여자에게 넌지시 말을 건다. 하지만 여자는 대답하지 않는다. 여자에게까지 남자의 목소리는 가 닿지 않는다. 그 맛을 어떻게 잊겠어요? 이 사이에서 아삭아삭 씹히는 맛이 일품이죠.
저에게도 좀 나눠 주시겠어요? 남자는 베란다 창가에 선 채 계속 입술을 달싹거린다. 콩깍지를 덮고 있는 가실가실한 솜털의 촉감과 콩깍지의 틈을 벌리느라 엄지손톱에 낀 섬유질까지 전부 다 상상할 수 있다. 다행히 여자는 아까부터 남자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다. 그녀는 지금 콩에만 열중하고 있다. 수학 문제를 푸는 학생 같다. 아이는 건너편으로 건너가지 못하고 여전히 철봉에 매달린 채 이를 앙다물고 있다.
남자는 바지 뒷주머니에 끼고 있던 수첩을 꺼낸다. 엉덩이에 눌린 수첩은 완만하게 구부러들어 있다. 한 장을 넘기려니 덩달아 다른 장까지 붙어 넘어간다. 갈피 사이에 음식 찌꺼기가 묻은 채 그대로 말라 버렸기 때문이다. 콩깍지, 시소, 구름사다리, 사내아이. 물 웅덩이. 남자는 그 여자를 기억할 만한 몇 개의 단어들을 적는다. 콩을 까고 버린 콩깍지는 수많은 쓰레기 봉투 가운데서 그 여자를 식별하는 유일한 단서가 될 것이다. 남자는 그 여자가 몇 호에 살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남자가 살고 있는 아파트는 다행히 한 동뿐이지만 모두 90세대의 가구가 살고 있다.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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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지금 다이어트 중이다. 여자가 증오하는 것은 사내가 아니라 100킬로그램에 육박하는 사내의 몸집일 뿐이다. 여자는 남자가 좋아하는 생크림 케이크를 억지로 먹어 주는 데 지쳤고 남자는 여전히 여자가 생크림 케이크를 좋아한다고 믿어 버린데서 생긴 오해가 그들 사이에 틈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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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뚱일 칭칭 휘감고 뻗어나간 관계들은 실은, 가냘프고 쉬이 삭아 사라질 것 투성이다. 사방팔방 뻥어나가며 그것들은 은색으로 멋지게 반짝이지만, 내 피둥피둥 쪄오른 살 밑에서 오래잖아 삭아 없어질 가닥들이 거개인 것이다. 얼마나 잘 삭는지 관계가 끊어져도, 흉터 하나 남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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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바지 뒷주머니에 끼고 있던 수첩을 꺼낸다. 엉덩이에 눌린 수첩은 완만하게 구부러들어 있다. 한 장을 넘기려니 덩달아 다른 장까지 붙어 넘어간다. 갈피 사이에 음식 찌꺼기가 묻은 채 그대로 말라 버렸기 때문이다. 콩깍지, 시소, 구름사다리, 사내아이. 물 웅덩이. 남자는 그 여자를 기억할 만한 몇 개의 단어들을 적는다. 콩을 까고 버린 콩깍지는 수많은 쓰레기 봉투 가운데서 그 여자를 식별하는 유일한 단서가 될 것이다. 남자는 그 여자가 몇 호에 살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남자가 살고 있는 아파트는 다행히 한 동뿐이지만 모두 90세대의 가구가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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