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이 읽다 하나가 죽어도 모르는 소설
--- 허순용(sellavy@yes24.com)
고등학교 때의 수업 중에 지금도 특이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게 있다. 별명이 마징가 Z인 국어 선생님으로부터 『춘향전』을 배우고 있었는데, 그 날은 교실 분위기가 뭔가 이상했다. 남자 고등학교란 대개 싸움과 음담으로 해를 넘기고, 수업 시간이면 자거나 딴짓하는 놈들이 부지기수인 법이다. 그런데 평소 침을 흘리며 자던 아이들이 그날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책을 보고 있는 것이었다. 다들 책에 정신이 팔려 이상한 열기가 교실에 감돌았고, 많은 사람이 한마음이 되었을 때의 그런 힘찬 기운조차 느껴졌다. 모두들 『춘향전』에 매료되었던 것이다! 선생님은 신이 나서 열강을 하고 우리도 점점 더 『춘향전』속으로 빠져들었다. 다 아는 이야기였지만 그 절묘한 단어구사와 리듬과 해학이 우리를 사로잡았던 것이다. 이윽고 선생님이 '너무 많이 했으니 그만 하자'고 했다. 그 때 50명이 넘는 경상도 머슴애들의 입에서 똑같은 말이 터져나왔다. "안됩니더. 더 하입시더! " 마징가 Z는 놀라고 감동하였으며, 우리는 모처럼 우쭐거렸다. 학생이 공부를 더 하자고 선생님에게 떼를 쓰는 걸 그날 이후 나는 본 적이 없다.
『허삼관 매혈기』는 그에 필적할 만큼 재미있는 소설이다. 그 능청스럽고 해학에 찬 말투는 시종 웃음을 짓게 하며, 좀스럽지 않고 시원시원한 문장은 책장 넘어가는 속도에 불을 붙인다. 묘사의 호쾌함과 대화의 생생함은 따를 자가 없고, 포복절도할 장면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그려내는 그 의뭉스러움 또한 견줄 이가 없다. 이를테면 허삼관의 마누라가 아이를 낳는 장면은 거의 『춘향전』수준이다. 대담한 생략, 살아있는 육두문자. 그렇게 낳은 아이들 이름은 또 좀 웃기는가? 첫 아들은 일락이, 둘째 아들은 이락이, 그럼 셋째 아들은? 그렇다 삼락이다. 이들 허삼관네를 비롯하여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평범하기 짝이 없다. 그들은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닮아 있으며, 나와 비슷하거나 나보다 조금 못한 것처럼 여겨져 마음이 편한 그런 종류의 인물들이다. 그들은 싸우고 바람피고 게으르기도 하지만, 동시에 선하고 다정하며 동정적이다. 요컨대 그들은 그냥 사람인 것이다.
책 전체에 걸쳐 이야기는 황하처럼 넘실대며 삶의 희노애락을 담고 흘러간다. 이야기가 너무 자연스러워 그 물결을 바라보고 있자면 저절로 마지막 페이지에 달하지만, 소설은 허삼관이 그 고비마다 피를 팔게 되는 사연을 박아둔다. 허삼관은 아홉 차례에 걸쳐 피를 판다. 장가 갈 밑천을 마련하기 위해 처음으로 피를 팔아본 뒤, 돈이 꼭 필요할 때마다 피를 팔러 간다. 그 사연을 여기 다 옮길 수는 없다. 그것은 오직 이 소설의 풍성한 이야기와 플롯 속에서만 감동을 지니기 때문이다. 다만 그때마다 허삼관은 조금이라도 피값을 더 벌기 위해 오줌보가 터지도록 물을 마시고, 피를 팔고 난 뒤에는 몸의 기운을 보충하기 위해 반드시 돼기고기 볶음과 황주를 마셔야 하며, 최소 석달이 지난 후에 피를 팔아야 건강을 지킬 수 있다는 규정을 때로는 어길 수밖에 없었다는 내막을 전해 두기로 하자.
역사가 어떻고 민족이 어떻고를 얘기하지만 수많은 보통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여기 허삼관과 같다. 그러기에 이 작품 속에서는 문화혁명조차도 지극한 일상 속으로 들어와 있는 것이다. 인생에서는 '살아간다는 것 자체를 넘어서는 그 어떤 논리도 없다'는 것이 작가 자신의 인생관이기도 하거니와, 피를 팔아서 일락이에게 국수를 먹이는 허삼관 앞에 문화혁명은 한갓 종이쪼가리에 불과한 것이다. 마치 영화 <모던타임즈>처럼 허삼관의 삶을 기록하는 작가의 붓끝은 너무나 활달하고 빠르지만, 그 위트와 해학은 고난의 깊이와 욕망의 소박함으로 인해 더욱 숭고하고 아름답게 화하는 것이다. 살기 위해 피를 파는 사정 자체가 그러하지만, 알고 보니 자기 아들도 아니었던 일락이를 진정한 자기 아들로 받아들이고, 나중에 그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몸을 망쳐가며 피를 파는 허삼관이 차가운 강물을 사발에 떠서 마시고 벌벌 떨 때, 그의 인간적인 품격은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는 것이다.
이 작품은 위화(余華)의 최대의 베스트셀러로서 중국 뿐 아니라 프랑스, 이태리 등 여러나라에서 크게 성공하였다. 전작인 『살아간다는 것』은 장이모에 의해 영화화되어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으며, 우리나라에서 <인생>이란 제목으로 상영되었다.(『허삼관매혈기』도 <햇빛 쏟아지는 날들>, <귀신이 온다>를 만든 지안 웽 감독에 의해 영화화될 것이라고 한다) 그 외에도 국내에는 그의 중단편집까지 출간되어 있는데, 『내게는 이름이 없다』는 현대 중국의 소시민 열전이라 할 만하며, 『세상사는 연기와 같다』는 폭력과 죽음의 세계를 그린 것으로 중국 현대사에 대한 하나의 은유로 읽힐 수 있다. 여러 작품에서 드러나는 그의 놀라운 이야기솜씨와 문장력은 이문구에 의해 '문림(文林)의 고수'라는 별칭을 얻은 바 있다.
허삼관과 우리가 인생을 헤쳐나가는 방법
도서1팀 김성광(comma99@yes24.com)
2015-06-09
1. 『허삼관 매혈기』는 고단한 인생을 피를 팔며 헤쳐나가는 한 남자의 이야기다. 오줌보가 터지기 직전까지 물배를 채워 피를 파는 남자.
2. '피'를 팔아 살아간다는 점에서 피는 '노동력'이고, '돈'이다. 허삼관에게 피 파는 법을 처음 알려준 방씨는 이렇게 말한다. "자네가 논밭 일을 하거나 백여 근쯤 되는 짐을 메고 성안으로 들어갈 땐 힘을 써야 한단 말씀이야. 이런 힘은 다 피에서 나오는 거라구 " 이쯤되면 피는 직접적으로 노동을 의미한다.
3. 그런데 아무리 보아도 '피'는 노동 그 이상이다. 노동이 일상적이라면, 허삼관의 매혈은 '사건'적이다. 피를 팔아 헤쳐온 인생이라지만, 그가 피를 파는 것은 일생에 열 번이 되지 않는다. 그는 인생의 중요한 혹은 절실한 순간에 피를 판다.
4. 모든 작품은 독자 나름의 경험으로 재해석 된다. '인생의 중요한 순간에 팔게 되는 것'으로 요즘의 사람들에겐 '신용'만한 것이 없다. 신용을 팔아 우리는 부채를 얻고, 그 부채로 등록금을 내고 결혼도 하고 집도 얻고 아이도 키운다. 허삼관이 피를 팔아 하는 일과 거의 완벽하게 동일하다. 게다가 '신용'은 자본주의 경제의 혈액이 아니던가. 이 작품은 '피'라는 매개를 통해 인생과 세상을 동시에 끌어들인다...고 하면 너무 기계적이겠지만 그 겹침이 확실히 묘하다.
5. 중국에도 '벼룩의 간을 빼먹는다'라는 속담이 있을까. 허삼관은 혈색 좋고 살집 좋은 '혈두'에게 피를 팔고 난 후엔 꼭 '돼지간볶음'을 황주와 곁들여 시켜 먹는다. 벼룩이 간을 뺏기고 난 분노를 (혈색 좋고 살집 좋은) '돼지' 간으로 해소하는 것 같다. 분노를 맨 정신에 토해 낼 자신은 없어서 술기운을 빌리려는 것인지 꼭 황주를 곁들이는데, 짐짓 호기로운 척 테이블을 두 번 쾅쾅치면서 주문한다.
6. 작가 위화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이것은 평등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평등은 '불평등이 없는' 평등이 아니라, '너나 없이' 불평등을 겪고 있다는 얘기로서의 평등으로 다가온다. 노동과 부채로 삶을 꾸려가는 한편, 돈줄을 쥐고 있는 사람 앞에서는 속으로 분노를 삭히고만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지금도 이토록 많지 않은가. 이 소설이 익살로 무장하고 있음에도 끝내 큰 공감과 감동을 주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