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07년 06월 2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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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342쪽 | 491g | 153*224*30mm |
ISBN13 | 9788971847244 |
ISBN10 | 8971847247 |
발행일 | 2007년 06월 2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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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342쪽 | 491g | 153*224*30mm |
ISBN13 | 9788971847244 |
ISBN10 | 8971847247 |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조용필의 노래가 자꾸 귓가에 맴돈다.
위화의 장편소설 《허삼관 매혈기》.
사둔지 한참 되었으나 제목이 주는 칙칙함 때문에 미루다가 며칠 전 <허삼관>이라는 영화를 보고 뒤늦게 찾아 읽었다.
가난한 생사공장 노동자 허삼관은 피를 팔아 받은 돈 삼십오 원을 밑천으로 허옥란과 결혼한다. 일락, 이락, 삼락. 9년 동안 세 아들을 낳고 어려운 살림이지만 행복하게 살던 삼관은 어느 날 자신의 큰아들 일락이 친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내에게 화도 내고, 홧김에 외도도 하고. 기른 정으로 어쩔 수 없이 일락을 키우면서도 마음의 상처 때문에 그는 소심하게 아이를 구박한다.
어찌어찌 상처를 봉합하고 살아가고자 하지만 그의 가족은 대약진 운동 때는 굶주림을 겪기도 하고, 문화대혁명시기에는 옥란이 기생이라는 모함을 받아 마을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당하기도 한다. 아이들이 장성한 후에도 일락이의 병 때문에, 이락이의 직장 때문에 하루도 편할 날이 없는 삼관. 돈 쓸 일은 끊임없이 생기지만 목돈을 마련할 길이 없는 가장은 아내를 위해, 자식들을 위해 목숨을 걸고 피를 팔아 가족을 지켜낸다.
정말 노래가사처럼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났다. 처음엔 슬퍼서 눈물 나고, 나중엔 기뻐서 눈물 나고.
“삼락이는 고기가 먹고 싶단 말이지. 자, 그러면 삼락이한테는 홍사오러우 한 접시다. 고기에는 비계와 살코기가 있는데, 홍사오러우는 반반 섞인 게 제 맛이지. 껍데기째로 말이야. 먼저 고기를 손가락만큼 굵게, 손바닥 반만큼 크게 썰어서……. 삼락이한테는 세 점을…….”
“아버지, 네 점 주세요.”
...
“아버지, 형하고 삼락이가 침 삼켜요.”
“일락아.”
허삼관이 꾸짖었다.
“아직 네가 침 삼킬 차례가 아니잖아.”
(p.163~165)
기근으로 몇 달 동안 옥수수죽으로 연명하던 삼관 가족이 나란히 이불을 덮고 누워 맛있는 음식을 상상하고 있다. 자기 생일 기념으로 말로나마 맛있는 걸 해주겠다는 아버지. 귀를 쫑긋하고 침을 꼴딱 삼키면서 고기 한 점을 더 먹겠다는 아이들.
중국 전역의 대기근으로 수천만이 아사한 사건. 역사책에서 독재자의 잘못된 정책이었다는 몇 줄의 문장으로만 접하던 대약진 운동이 작품 안에 자연스럽게 녹아있다.
토지를 국유화시키고, 식량과 가재도구를 압수하고, 모든 식생활은 국가에 의해 관리된다. 하지만 기근으로 배급이 끊겨 식당이 문을 열지 않자 사람들은 굶주림에 시달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정부의 검열 때문인지 작품 속의 인물들은 아무도 정부나 정치가들에 대한 원망을 하지 않는다. 삼관과 옥란도 그저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다며 담담히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렇게 정치적인 이유로 생기는 불행을 개인과 가족이 극복해 낸다.
초인적인 인내와 해학으로.
“나하고 임분방은 딱 한 번 뿐이었다. 너회 엄마하고 하소용도 마찬가지고. 오늘 내가 너희에게 이 얘기를 하는 이유는 나도 엄마하고 똑같은 죄를 저질렀다는 걸 너희가 알았으면 해서다. 그러니 엄마를 미워해서는 안 된다…….”
허삼관은 허옥란을 바라보며 계속 말했다.
“너희가 만약 엄마를 증오한다면, 나도 마땅히 예외가 될 수 없다는 뜻이다. 나도 너희 엄마랑 똑같은 놈이니까.”
허옥란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너희 아버지랑 나랑은 다르단다. 내가 아버지 마음을 상하게 해서…… 그래서 임문방과 그렇게 된거란다…….”
허삼관이 고개를 흔들었다.
“사실은 다 같은거야.”
(p.236~237)
문화대혁명 시기 근거 없는 대자보로 인해 허옥란은 기생이라는 누명을 쓰고 조리돌림을 당하고 집에서도 비판대회가 열린다. 남들이 욕한다며 부끄러워하는 아들들에게 삼관은 자신이 외도한 일을 밝히며 아내를 보듬는다.
옥란의 부정이 밝혀지는 순간부터 조마조마하고도 궁금했다. 겉으로는 허허거려도 마음은 지옥일텐데 어떻게 이겨내는지. 배우자의 부정을 용서하는 과정이 잘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 장면을 통해 알게 되었다. 내가 얼마나 속 좁은 인간인지.
허삼관 부부가 보여주는 진정한 뉘우침과 용서는 나를 부끄럽게 했다.
중국의 근현대사를 거치며 엄청한 고난을 겪는 어느 가족의 이야기지만 중국사에 대한 이해가 없어도 충분히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좋은 책이다.
입춘도 지나고 봄이 성큼 다가왔다.
겨울이 다 가기 전, 가왕의 명곡 <그 겨울의 찻집>을 찾아 들어야겠다.
1970년대에만 해도 우리나라에 중류층 가정에 입주 도우미의 형태로 어린 소녀들을 가사 도우미로 두는 일이 유행이었던 적이 있었다. 정겨운 초가집은 없애고 구불구불 시골길도 쫙쫙 펴서 넓히자는 노래가 새벽마다 전국 구석구석 둘려 퍼지던 시대였다. 그렇게 없애고 뭉갰던 시간들을 못내 그리워하는 어르신들 앞에 뭉글뭉글 가장 압도하는 기억은 배고픔이다. 아직 엄마 품에서 어리광을 부려도 될 나이에, 요즘 같아선 격정의 사춘기와 요란한 중이병으로 부모 눈물까지 쏙 빼놓구 나야 지나갈 법한 나이에 그네들은 집 밥 한술을 덜기 위해 남의집 살이를 했다. 그네들의 부모는 매 끼니마다 한 사람의 입을 덜기 위해 딸들을 도시로 내내야 했다. 우리의 역사가 기록하지도 주목하지도 못한 경제 성장의 배경에는 이런 어둡고 감추고 싶은 과거들이 곳곳에 드리워져 있다.
오늘날 '낳은정 vs 기른정'의 양면 대결 양상에 있어 최대 관심사는 키우는데 들어간 비용이 아니다. 아이는 추수걷이를 위해 심은 곡식의 씨앗도 아니고, 내다 팔으려고 밤낮으로 거둬 먹인 가축도 아니다. 가족이라는 테두리 속에서 아이와 함께 하며 쌓아가는 시간은 부모에게도 일생을 통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이자 삶의 목적이 된다. 그렇기에 어느날 갑자기 드러난 내 아이의 핏줄에 대한 충격적 진실에 대해 분노와 자괴감에 휩싸일 테지만, 그렇다고 이제껏 함께해온 시간들이 형성한 유대감은 당장 내다 버릴 수는 없는 혼란스런 상황을 형성한다. 이 때 그러나 가난하다면 어떨까. 1970년대 우리 부모와 조부모 세대들처럼, 땅 한떼기 가지지 못한 채 시골에서 소처럼 일하면서도 어린 소녀들을 먹일 한 술 밥이 모자라 남의 집 눈치밥을 먹으며 집안 허드렛일을 하러 떼어내듯 보내야 했던 슬픈 사연들을 생각한다면 어쩌면 이 시기의 중국, 남의 자식으로 판명된 아이를 계속 먹이고 입히고 키우는 일은 책속 표현 그대로 '자라 대가리'나 하는 속없는 행위일지 모른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참으로 슬프고도 안타까운, 신파가 될만한 스토리지만 이 소설은 오히려 밝고 재미있다. TV가 대중에게 보급된 이래 지난 수십년간 드라마 소재로 마르지 않는 샘물인양 끝도 없이 이용해온 탄생의 비화에 얽힌 진부한 사연은 신파에서 벗어날 때 오히려 새로워진다. 자기 피를 팔아 미인을 얻고 , 자기 피를 팔아 하룻밤 외도를 한다. 가족이 기근으로 굶어 허덕일 때에도 피를 파는 일은 든든한 보험처럼 언제고 비상금을 마련해준다. 이렇게 위급한 상황이 될 때마다 피를 팔아 해결하던 허삼관이, 세월이 흘러 아이들이 모두 자라고 자신은 늙어 더이상 피를 팔아야 할 필요도 없어지고 더 이상 피를 팔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 우리는 깨닫는다. 그의 인생을 통과해온 수많은 피팔기는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 그 자체였음을..
폭력과 파괴로 얼룩진 중국 근대사에 그 혼란스런 문화대혁명기에 보여준 허옥란의 시련과 그를 통해 다져지던 부부의 정. 기근기간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채 누워서 아이들에게 상상으로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주던 따뜻한 아버지의 모습. 자신의 핏줄로 알았던 첫째가 남의 자식임을 알고 난 후 겉으로는 그렇게도 구박을 하면서도 막상 그 아들의 병원비를 위해서는 죽음의 문턱에 이를 때까지 도시를 순회하며 피를 팔던 부성애가 마음을 찌릿하게 울리는 순간에도 깨알같은 웃음 포인트는 구석구석 숨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