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18년 06월 15일 |
---|---|
쪽수, 무게, 크기 | 324쪽 | 488g | 140*210*30mm |
ISBN13 | 9791160943733 |
ISBN10 | 1160943737 |
KC인증 | ![]() 인증번호 : - |
발행일 | 2018년 06월 1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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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324쪽 | 488g | 140*210*30mm |
ISBN13 | 9791160943733 |
ISBN10 | 1160943737 |
KC인증 | ![]() 인증번호 : - |
추천의 글 들어가며_잘못된 삶과 좋은 만남 1장 노련한 장애인 1.8초 _ 핵토와 다리병신 _ 퍼포먼스로서의 삶: 기호화된 인간 _ 노련함의 딜레마 2장 품격과 존엄의 퍼포먼스 최고 존엄의 기괴함 / 품격을 만드는 퍼포먼스 _ 존엄을 구성하는 퍼포먼스 3장 우리는 사랑과 정의를 부정한다 푸른잔디회 _ 연극적으로 죽거나 살기 _ 피해자 되기를 멈추고 4장 잘못된 삶 “나를 태어나게 했으니 그 손해를 배상하시오”_ 청각장애가 있는 아이를 선택하기 _ 장애를 제거하기와 선택하기 _ “그럼 너도 다리를 잘라” 5장 기꺼운 책임 부모와 자식 _ 믿음과 수용 _ 장애를 수용한다는 것 6장 법 앞에서 폐쇄병동 _ 정신질환자가 되기까지 _ 빠져나갈 길이 없다 _ 법의 문지기 _ 인생을 설명하는 통합 이론 _ 망상에 빠진 작가 _ 자기 서사에 위계가 있을까 _ 독해 능력과 공저자 되기 7장 권리를 발명하다 오줌권 _ 당신의 잘못은 아니다 _ 법 속으로 _ 당신의 고유함은 정당하고 정당하다 8장 아름다울 기회의 평등 정치적으로 올바른 사랑_ _ 매력차별금지법 _ 절단된 당신의 몸에 끌려요 _ ‘잘못된 몸’과 아름다움 _ 초상화 그리기 _ 아름다울 기회를 분배하기 _ 갖지 못하는 것들 9장 괴물이 될 필요는 없다 온전한 사랑 _ 개인적인 체험 _ 변론을 종결하며 감사의 말 참고문헌 |
우리는 존엄하고, 아름다우며, 사랑하고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존재인 것이다.
누구도 우리를 실격시키지 못한다. (p.313)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의 작가 김원영은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로스쿨을 졸업해 현재 변호사로 활동 중이며, 골형성부전증으로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장애인이다. 장애를 가진 이들을 ‘실격당한 자’라고 지칭할 수 있는 것은 본인이 장애인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 생각된다. 이 책은 장애인으로 이 땅에 살아가는 것이 어떤 것인지 냉철하게 짚어 나가며 이들이 마땅히 누려야 기본적인 권리와 사회의 모순을 꼬집는다.
권력을 가진 자들이 도덕성을 지닌 탁월한 인물임을 과시하는데 수단이 되고, 결핍을 지닌 채 태어난 것,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부정적으로 인식되고, 결핍된 부분으로 인해 이 사회에서 다양한 인간 중 하나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닌 그냥 장애인이 되어버리는 사람들. 사고를 당하고 화를 입어 죽어가 자살을 하더라도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알려고 하지 않고 그냥 장애를 가진 자가 그런 일을 겪은 것이 되어버리는 사람들. 이들은 어떤 삶을 살고 어떤 꿈을 꾸고 어떤 생각을 한 개인의 역사를 지닌 사람이 아닌 앞뒤 전후가 잘려나가고 그냥 장애인이라는 것만 부각된다. 신체와 정신의 장애가 있지만 그들도 비장애인처럼 평범한 생각을 하기도 하고 장애인이 가진 특별한 시각과 사고를 하는 매력적인 존재이지만 이것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를 비장애인들만큼 가질 수 없다. 또한 법률과 제도의 수정과 보완으로 예전보다 더 나은 장애인의 인권이 보장되었지만 그 법률과 제도가 오히려 그들의 한계를 정하고 구속하는 경우들을 보면 여전히 그들을 위한 사회적 변화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인간의 존엄성이 가장 극명하게 빛나는 순간은 서로가 서로의 연기를 이해하고, 상호작용하면서 서로를 존엄한 존재로 대우하는 때이다. 품격이 상대방을 적절하게 접대하는 연기에 의해 구성된다면, 존엄은 상대를 환대하고 그 환대를 다시 환대하는 상호작용 속에서 형성된다. 우리가 본래 존엄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게 서로를 대우한다기보다는 그렇게 서로를 대우할 때 비로소 존엄이 '구성된다'고 말할 수 있다. (p.71)
작가는 당연히 이 책을 통해 장애인에 대한 사회의 인식 변화를 원했겠지만, 장애인에게도 장애를 스스로 어떻게 받아들이고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당부와 바램도 담고 있다. 주위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 자신의 신체적 한계를 넘어서려는 강인함에 집착하기보다는 그런 한계를 받아들이는 것 또한 필요하다고 당부한다.
장애를 안고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특히나 이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자유주의 제도 아래 자연스럽게 생기는 계층 중 어느 곳에도 자리 잡을 수 없는 존재들로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더불어 사는 사회라고 하지만 장애를 가진 작가의 시선에서 전해지는 비장애인 위주로 만들어진 사회가 가진 모순에 맞서 살아가는 그들의 삶이 때로는 힘겹게 다가오기도 했고, 그들을 진정한 이웃으로 나의 곁을 내어준 적이 없었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그만큼 그들의 사회적 활동이 활발할 수 없어 내가 그들을 더 많이 생각하고 접할 수도 없었겠지만 나의 관심이 그만큼 크지 않았음도 인정하게 된다. 이 책을 통해 개인적으로 이 사회에서 가장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조건은 그들이 좀 더 사회에 당당히 진출할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아져야 한다는 점이다. 그들을 비정상적인 것이 아닌 여러 인간상 중의 하나로 평범한 인물로 인식되는 기회가 많아져야 한다.
장애아를 키운 부모의 이야기. 형제자매의 경험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사회에서 소외된 채 돌봄노동을 전담한 가족들의 이야기가 공유되지 않는 이상 장애인은 그저 사회와 가족의 짐으로만 여겨지고, 그 가족들은 일방적으로 희생하는 사람들로만 인식될 것이다. 이들이 경험한 공생을 위한 갈등과 협력, 때때로 찾아오는 경이로운 순간들, 장애인을 한 사람의 자녀로, 또래로 온전히 받아들인 시간은 그 자체로 고유할 뿐 아니라, 중증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개별자로서의 이야기를 이전과는 다른 관점에서 드러내줄 것이다. (p.204)
이 모든 실천은 자기를 표현하는 데 제약이 많은 사람들이 인간이라는 '화가'들 앞에 자기 초상화를 맡길 시간과 공간을 마련하는 일이다. 이렇게 그려진 초상화는 한 사람의 인생 이야기와 신념, 성향, 몸의 질량과 부피 비율과 신체의 곡선, 색깔과 향기, 목소리를 모두 종합할 것이다. 아름다울 기회의 평등이 있다면 적어도 당신과 나의 신체도 얼마간은 아름다울 수 있다. 연예인 뺨칠 정도는 아닐 테지만. (P.285)
책을 읽는 내내 사실 이해가 쉽지 않아 몇 번을 반복해서 읽었던 부분들이 많았다. 아마도 김영하의 북클럽에 선정되지 않았다면 읽다가 포기했을 것이다. 섣불리 장애인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사회를 변화시키고 그들을 도와야겠다는 막연하게 생각했던 내가 얼마나 안일하게 장애인에 대해 인식하고 있었나를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완독하며 장애인들이 살아가는 이 세상에 대해 그들의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었다는데 의미를 두고 싶다. 그들을 막연하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겠다고 생각했던 관조적 자세에서 벗어나 이제는 그들을 우리의 삶의 테두리 안에 두고 그들을 내 삶에 수용할 수 있는 작은 준비를 이 책을 통해 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 책은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이들의 입장에서, 우리 사회의 모습과 문화 그리고 각종 제도들을 생각해 볼 수 있는 내용이었다. 저자는 태어날 때부터 '골형성부전증'으로 장애를 안고 살았으며, 성장한 이후에는 휠체어에 의지해 살아야만 했던 장애인이다. 그러한 신체적 조건에도 불구하고 대학을 졸업한 이후 로스쿨을 거쳐, 현재는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나 자신 장애를 겪은 적이 없으며, 가까운 이들도 역시 비장애인들이 대부분이기에 장애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해봤던 적이 그리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우리 사회에서 인권 의식이 보다 보편적인 의식으로 자리를 잡고 그것을 법과 제도로 뒷받침하려는 움직임이 지속되고 있지만, 저자는 장애인들은 여전히 현재의 상황이 '품격과 존엄'을 느끼며 살아가기에는 부족하다고 강조한다. 자신이 장애를 지니고 태어난 것을 일컬어 '잘못된 삶'이라고 지칭하며, 그들이 평범하게 살아가기에는 이 사회의 제도와 문화가 여전히 갖춰지지 못하고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장애인과 그 가족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겨운 '투쟁'인가를 저자는 다양한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다. 저자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이 일상의 태도와 관념 그리고 제도와 법규법 등에서 '잘된 삶'과 '잘못된 삶'을 가르고 있다고 규정한다.
여러 해 전에 서울의 한 자치구에서 장애인을 위한 학교가 설립된다고 발표되었을 때, 해당 지역의 일부 주민들이 '혐오시설'이라는 이유로 집단으로 반대운동을 전개해서 보도가 된 적이 있었다. 반대하는 이들은 장애인을 위한 학교와 같은 '혐오시설'이 들어서게 되면 아파트 가격이 하락한다는 것을 주된 이유로 들었다. 그들의 논리가 얼만큼의 정당성을 지니고 있는지를 차치하고서라도, 아파트 가격이라는 아직 실현되지 않은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장애인들이 교육받을 권리를 반대하는 것이 온당한 일인가 하는 점에 대해 회의적으로 반응했던 기억이 났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동안 피상적으로 알고만 있었던 장애들의 현실에 대해서 조금은 더 진지하게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저자는 스스로 장애인으로 살고 있는 자신과 같은 처지를 '실격당한 자'로 명명하고 있지만, 모든 사람이 행복하게 살아갈 권리가 있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그렇기에 비장애인들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는 우리 사회의 현실과 제도들이 이제는 다양한 소수자들을 포괄할 수 있는 환경으로 변해가야 하는 것에 공감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너를 만나서 참 잘된 것 같아"라고 말하는 이들이 많아지고, "장애와 질병, 그리고 각종 소외의 이유들을 뚫고 나가 언젠가는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전망과 가능성"을 기대하는 저자의 희망에 크게 공감할 수 있었다.(차니)
잘못된 삶
잘못된 만남(너무 올드한 예시인가?), 잘못된 습관, 잘못된 상식..‘잘못된’이라는 부사와 만나는 순간 따뜻함과 설렘을 지닌 만남도, 나의 루틴을 만들어주는 습관도, 사람과의 관계에서 기준이 되는 상식도 모두 ‘잘못된’에 삼켜져 버린다. 아예 만나지 말았어야 했고, 들이지 말아야 할 습관이었으면 오히려 관계를 흐트러버리는 ‘잘못된’ 것들.
잘못된 삶 wrongful life
그런데 ‘삶’이라는 명사 앞의 ‘잘못된’은 과연 어떻게 읽어야 할지 당췌 모르겠다. 책에서 이 문장을 만난 순간 말도 안되는 조합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지만, 이어지는 글들은 나의 이면을 돌아보게 했다. 당신은 이 단어 앞에 얼마나 떳떳한가
특정한 집단을 위한 주택이나 시설이 건립될 때 해당 지역 주민들이 반대하는가, 반대하지 않는가는 그 집단이 ‘잘못된’ 삶으로 분류되고 있는지 아닌지를 보여준다. p.10
우리는 히틀러처럼 우생학을 내세워 누군가를 학살하지는 않지만 장애나 질병, 다른 성적 지향이나 성정체성을 가진 아이를 낳아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아마도 망설일 것이다. 이 모든 일상의 태도, 관념, 지향, 제도와 법규범이 ‘잘된 삶’과 ‘잘못된 삶’을 가른다. pp.12-13
요컨대 ‘잘못된 삶’이란 착하지 않거나 나쁜 짓을 저지른 삶이 아니라 존중받지 못하는 삶, 하나의 개별적 존재로 인정받지 못하는 실격당한 삶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아무리 착하고 성실하게 살아도 가난하고, 교육받지 못하고, 장애나 질병이 심하고, 다수가 혐오하는 성적 지향과 정체성을 가진 사람은 ‘잘못된 삶’이 되기 쉽다. p.14
누구의 삶도, 어떠한 삶도 ‘잘못된 삶’으로 불려서는 안된다 말을 하지만 나의 행동은 과연 어떠했는지 자꾸만 묻는 그 질문에 제대로 된 답을 내놓지 못하는 사이 저자는 다시 묻는다.
그렇다면 ‘잘못된 출산 wrongful birth’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부모가 아이를 낳고 싶긴 했으나 장애아라면 낳지 않으려 했는데 의사가 판단을 잘못해 장애아를 낳은 경우를 ‘잘못된 출산 wrongful birth’ 소송, 의사의 판단이 틀려 부모가 출산한 장애아 스스로가 의사에게 책임을 묻는 경우를 ‘잘못된 삶 wrongful life’ 소송이라고 부른다. p.97
현실에서 드물기는 하지만, 누군가를 사랑하기에 그 사람과 이별하려는 선택이 없지는 않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방이 고통을 피할 수만 있다면 그 사람과 자신의 이별을 (혹은 처음부터 아예 만나지 않은 것으로 삶을 되돌리는 일을) 감수하고, 상대방에 대한 죄책감조차 감당할 것이다. 아이를 사랑한다는 말과 그 아이가 ‘잘못된 채로’ 태어나 역경을 겪을 바에야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편이 나을지도 모륻다고 생각하는 부모의 마음은, 그래서 모두 진실일 수 있다.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가 역경을 돌파하며 장애를 수용하고, 고유하고 특별한 존재로 성장하기보다는 평범한 사람으로 살더라도 별다른 어려움 없이 무난한 삶을 살기를 바란다. pp.293-294
잘못된 삶, 잘못된 출산, 그 단어들을 입 밖으로 내뱉는 것만으로도 막막한 기분이 든다. 그럼에도 그래서는 안된다고 차별해서는 안된다고 어느 삶이라도 ‘잘못된’이라는 부사가 붙어서는 안되다고 반론하려하자, 마지막 쐐기를 박는다. 당신의 상황이라면, 당신 앞에 선택이 놓여진다면 과연 어떻게 하겠냐고. 그리고 비겁한 나는 더 이상 대답하기를 멈추고 책을 덮어버렸다.
당신은 장애인을 공동체의 동등한 구성원으로 받아들이고, 그들에 대한 어떠한 차별에도 반대하며, 그들의 삶이 어려움이 따르기는 하겠지만 그럼에도 반드시 불행하거나 가치 없는 건 아니라고 믿는가? 그런 당신은 장애아가 태어나는 순간도 비장애아의 탄생과 마찬가지로 축북과 기대, 희망과 사랑으로 가득한 경이로운 시간으로 기억할 자신이 있는가? ‘잘못된 삶’도 존엄하고 매력적이고 풍성한 삶이라는 것을 ‘변론’하려는 나는, 간단한 시술로 내 장애를 고칠 수 있고 나와 같은 장애아를 출산하지 않을 수 있는 경우에도 거리낌 없이 그 시술을 거부할 자신이 있는가 p.99
처음 이 책을 읽기 전, 장애를 가진 저자가 이 사회의 불합리와 맞서 당당한 변론을 이어가리라 예상했다. 그리고 그 글을 읽으며 나는 함께 분노하고, 그 당당함에 박수를 보내며 책장을 넘기게 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저자의 글을 읽을수록 이런 생각이 얼마나 교만한 것이었는지, 마치 우월적인 위치에서 저자에게 응원을 보내리라 다짐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오랜 기간 우리나라를 비롯해 많은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추진해온 장애인 정책은 개인이 가진 장애를 개선하여 그를 ‘비장애인 사회’에 통합하는 데에 방점을 두었다. 공동체 구성원들의 인식도 대부분 그에 가까웠다. 장애인 본인들도 가능한 한 장애를 드러내지 않고, 장애가 없는 사람들과 최대한 유사한 방법으로 움직이고 의사소통하고 감각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마찬가지로 장애나 질병은 가능한 한 치료하고, 교정하고, ‘정상적으로’ 보이도록 훈련할 대상이었다. p.119
나 역시 “괜찮아요, 힘내세요” 이런 말을 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우리는 함께 살아갈 수 있어요. 점점 더 좋아지고 있잖아요. 누구의 기준에서 점점 더 좋아지고 있다는 생각을 했던 것일까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냥 나와 다르다고, 나는 이해할 수 없으니 더 이상의 관심은 무의미하다고 포기해야할까? 저자가 이야기하는 정체성의 수용, 한 사람이 써내려 간, 켜켜이 쌓인 시간을 바라보는 행위에서 관계에 한발짝 다가설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한다.
우리는 우리 몸의 볼품없는 어떤 특성, 나이 들고 병들고 장애를 가진 내 자녀의, 친구의, 연인의, 그리고 나의 몸을 하나의 정체성이라고 (믿는 것이 아니라) ‘수용’해야 한다. 다시 말해 정체성이라고 간주할 필요가 있다. p.145
장애라는 정체성이 어떤 산물이라기보다는 장애라는 경험에 맞서 한 개인이 작성해나가는 ‘이야기’ 그 자체라면, 우리가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일은 하나의 국면이 아니라 긴 삶의 시간 동안 그것을 ‘써나가는’ 일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장애의 수용이란 결국 우리가 철저히 자발적으로 장애라는 정체성을 작성해나가는 일을 의미하게 된다. p.149
우리가 한 사람을 ‘본다’고 할 때 그 행위는 사진을 찍는 행위보다 초상화 그리기에 가깝다..(중략)..가족이든 연인이든, 아무리 친숙한 얼굴이라도 구체적인 ‘사실’들이 머릿속에 스냅사진처럼 상기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얼굴을 생생하게 떠올리는데, 어딘가 불분명한 선들로 이뤄진 한 사람의 형상이, 오랜 시간 그 사람과 만나며 끌어 모은 세부 사항들로 합성된 이미지처럼 나타난다. pp.274-275
그리고 잘못된 삶 만큼이나 이 책을 통해 내게 다른 의미로 다가온 단어가 있다면 ‘존엄 dignity’이다. 저자는 ‘존엄’을 ‘품격’과 대비해 설명한다.
우리말 ‘품격’은 한 사람의 내면적 가치나 진정한 자기됨을 의미하는 말로도 사용되지만, 사람이나 물건의 외형(형식)이 주변 환경과 형편에 부합할 때의 가치를 나타내기도 한다. p.54
반면 우리가 지금까지 명료하게 정의하지 않고 사용해온 용어인 ‘존엄 dignity’은 품격과 대비된다..(중략)..여전히 인간의 존엄성이 무엇인지 분명히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에 대한 근대적인 관념은 철학자 칸트를 경유하며 인간의 근본적 가치로 점차 자리 잡는다. 칸트는 인간(이성적 존재자)은 모두 “자기 자신과 다른 모든 이를 결코 한낱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항상 동시에 목적 그 자체로서 대해야만 한다”라고 전제한 후 “목적들의 나라”에서는 모든 것이 가격(가치)또는 존엄성을 가지며, 가격은 “같은 가격을 갖는 다른 것으로 대치될 수” 있는 반면 존엄성은 그 무엇으로도 대치될 수 없다고 말한다. 칸트에게 존엄성이란 다른 것의 수단으로만 존재하지 않는, 그 자체가 반드시 목적으로도 존재할 때 부여되는 내적 가치의 다른 이름이다. p.56
예의 바른 무관심, 섬세한 도움의 손길, 무시와 냉대 속에 혼자 있는 사람을 발견하고 고개 숙여 말을 거는 순간, 조금 더 긴 시간을 들여 상대방의 ‘초상화’를 그려보려는 미적, 정치적 실천, 그런 것들이 모여 자기 삶의 조건을 수용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감하고 탁월한 자아를 구축하게 한다. p.312
존엄의 순환은 그렇게 시작되고, 그 순환 속에서 존엄은 더 구체화되고, 더 강해지고, 더 중요한 가치가 된다. 사랑하는 사람의 눈길을 보고 그를 더 사랑하게 되듯이, 우리는 나를 존중하는 상대방을 보고 그를 더 존중하게 되고, 나를 존중하는 법률을 보고 그러한 법의 지배를 기꺼이 감내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궁극적으로 나를 더 깊이 사랑하고 관용하게 된다. p.313
어렵게 읽은 책이었다. 쉽지 않은 주제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나의 내면을 자꾸만 들여보게 되는 저자의 질문을 만날 때마다 도망가고 싶어지는 책읽기였다. 불합리한 사회에 분노하기보다는 오히려 시니컬한 유머를 담아 담담하게 적어내려간 저자의 글이 그 어떤 질책보다 무겁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피부 관리해야 돼”라 말하는 다정한 친구(이 책을 읽으신 분들은 아마도 잊지 못한 그 친구)와 ‘예의바른 무관심’을 보여준 누군가의 이야기를 만나며, 그 누구도 스스로 ‘실격당한’자가 되지 않는 사회가 되기를, 그러기 위해서는 나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깊게 고민한 시간이었다.
모든 사람에 대한 진심 어린 존중은 이제 법률이 되고, 헌법이 되어 우리 공동체의 최고 규범이 된다. 그런 규범에서 자라난 아이들은 다시 자신의 친구에게 “피부 관리해야 돼”라는 귀엽고, 뭉클하고, 놀랍도록 탁월한 상호작용 기술을 발휘해 인간의 존엄성이 모든 이념의 중심에 오는 세상을 향한 긴 순환을 시작한다. p.313
*나에게 적용하기
누군가에게 "피부관리 해야 돼"라고 말할 수 있는 이해, 존중(적용기한 : 지속)
*기억에 남는 문장
배역의 수행 능력이 탁월해질수록 우리는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고, 상처를 피할 수 있다. 말하자면 우리는 연극(퍼포먼스) 무대 위에서 배우들이 비극과 희극을 연기하는 것처럼, 우리 자신은 철저히 보호하면서도 세상이 원하는 배역은 성실히 수행하는 단계에 이른다. 이는 마치 삶을 게임처럼 대하는 태도다. 삶의 모든 순간은 일종의 공연(퍼포먼스)이 된다. p.36
인간은 자신을 스스로 관찰할 수 있을 때는 수치심을 느끼지만, 절벽 끝에 매달렸을 때는 스스로를 관찰하는 반성적(성찰적) 시선을 잃기 때문에 수치스러울 겨를이 없다. p.47
나는 추상적인 인권 규범이 아니라 우리의 구체적인 일상에서 출발하고 싶다. 우리는 각자가 왜 그저 태어났다는 이유로 존엄한 존재인지 잘 알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일상에서 상대방을 존중하고 그에 화답하는 상호작용, 즉 ‘존엄을 구성하는 퍼포먼스’를 실천하고 있다. p.65
서로를 인격체로 존중하는 상호작용은 실재를 공유하면서 그 존중을 강화한다..(중략)..타인이 나의 반응에 다시 반응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 우리는 타인을 존중하게 되며, 나를 존중하는 타인을 통해 나 자신을 다시 존중하게 된다. p.67
누군가에게 연극적인 삶은 위선이겠지만 누군가는 연극적으로 살 수밖에 없다. p.83
유전자진단이나 임신중절은 일정 범위 안에서는 당신의 자유로운 선택이다. 다만 그 자유를 제대로 행사하지 못해 장애아가 태어나면, 그 책임은 당신에게 있다. 결국 모든 기술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가 된다. p.116
타인의 삶을 잘못되었다고 규정하고, 그로부터 위안을 얻는 사람들이야말로 어쩌면 이런 ‘정신승리’에 빠져 있는지도 모른다. p.129
우리가 무엇인가를 ‘수용한다 accept’ 고 말할 때, 그것은 철저히 자발적인 선택을 의미한다. 믿음은 나의 의지에 따라 믿거나 믿지 않기가 대단히 어렵지만, 수용은 오로지 나의 의지에 달려 있다. p.139
‘주류’에 있는 사람들은 어떤 요구를 할 때 그 이유를 제대로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그냥 “원래 여기서는 이렇게 해”라고 말하면 그만인 경우가 많다. p.200
우리가 스스로를 사랑하는 일과 온전하게 받아들이는 일(정체성의 인정)은 때로 충돌한다. 사랑하는 마음은 그 마음이 향하는 대상이 고통이나 역경을 회피하기를 바라며, 그래서 ‘잘못된 삶’을 아예 살지 않거나 가능하면 그런 삶과 거리를 둔 채 안락하고 일반적인 삶을 살기를 바란다. 반면 온전하게 한 존재를 받아들이는 일은 ‘잘못된 삶’이라는 규정에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대체로 그에 정면으로 맞서는 더 ‘어려운’ 길(역경)일 수 있다. p.295
당신이 오로지 ‘개인적인’ 세계 안에서 외롭게 굴을 파 내려가고 있다고 믿는다면, 조금은 각도를 틀기 위해 애써봐도 좋다. 완전히 수직으로만 내려가지 말고 단 1도라도 방향을 틀어보라. 어느 순간 당신은 다른 동구로가 만날 텐데, 그곳에 예측하지 못했던 정체성의 서사가 존재할 것이다. p.301
우리가 가진 결함이나 결핍, ‘잘못되고’ ‘실격된’ 인간적 요소들이 정체성으로 선언될 때 우리는 비로소 해방감을 맛볼 수 있다. 더 이상 동굴에 혼자 있지 않다는 믿음, 개인적인 체험이 아니라 정체성 집단의 체험이라는 생각은 우리의 외로움을 덜어준다. pp.301-302
나는 그동안 장애를 수용한다는 말의 의미를, 내가 무한히 강해져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하고 살았다. p.308
당신이 장애를 수용하고 역경을 돌파하는 당당한 삶을 보여주지 못하더라도 당신의 부모, 형제, 연인, 친구, 이웃은 여전히 당신을 사랑할 좋은 이유를 가질 것이다. 우리는 서로의 삶이 존중받을 만하고 아름다울 수 있음을 입증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p.310
당신이 버스에서 만난 한 장애인에게 보인 작은 존중의 표현은 주위에 있던 사람들에게 전해지고, 나아가 그가 자신의 장애를 수용하는 밑거름이 된다. p.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