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붉어지는 감을 보고 있으면 지난여름의 멍울이 쌀쌀한 허공에 맺힌 듯 보이기도 한다. 감과 마찬가지로 봄에 꽃이 피면 나는 내내 울적해진다. 남들 꽃놀이 갈 때 집에 틀어박혀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는 사람이 나다. 이런 기질을 줄곧 천형처럼 여기며 살았다. 가라앉은 삶을 드러내는 일이 과연 누군가에게 쓸모 있는 일이 될 수 있을까. 그런 확신은 시인으로 호명된 후로도 내내 한 번도 가진 적이 없다.
--- p.4
복종은 누군가 나의 무릎을 꺾는 일이고 순종은 스스로 무릎을 꿇는 일이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나의 우여곡절뿐이고 이 책을 읽는 당신에게는 당신의 우여곡절이 있겠다. 그렇게 만들어진 나의 아름다움과 너의 아름다움이 다를지언정, 너의 무릎이 꺾일 때 나는 언제까지고 옆에서 함께 꿇는 무릎이고자 한다. 그게 내가 세상에서 할 줄 아는 유일한 작법이고 다른 방식의 사랑이 아직 생각나지 않는다.
--- p.7
잘 만들어진 행복에는 시간이 흘린 피들이 묻어 있었다. 그 피들을 마른 헝겊으로 닦고 싶었다. 간혹 반들반들하게 닦인 기억에는 우스꽝스럽게 구부러진 내 얼굴이 다시 묻었다. 내가 당신들에게 악몽이 아니었기를. 내게 당신들이 결국 불행이 아니었음을 이제는 알 것 같으므로. 이 글을 적는 오늘 밤은 갑작스런 겨울이 왔다. 본가에 두고 온 두꺼운 외투들이 생각났다. 내일 나는 조금 떨면서, 다정했던 어깨들을 만날지 모르겠다. 앞으로는 아름답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다.
--- p.17
물이 차분했고 길이 순했다. 개천을 따라 오리들이 높게 날았다. 보랏빛 저녁이 오고 있었다. 천변을 따라 늘어선 술집에서부터 고소하거나 달큼한 냄새가 따라오기도 해서 차고 투명한 소주 생각이 들었다. 문득 익숙한 길에 접어들기 전까지는. 아, 여기는.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싶은 만큼, 살고 싶은 대로 살고 싶은 만큼. 그렇게 살아보려고 나는 너무 많이 돌아다녔던 건 아닐까. 남에게 손 벌리는 일은 또 죽기만큼 싫어서 괜찮은 표정을 연습해가며 숨어 다니고는 했지만. 하는 수 없이 울어야 끝날 것 같은 일이 생길 때는 물가에서 울었다.
--- p.19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과,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 그 중간에 있을 수는 없을까. 자의식 과잉과 자의식 결핍의 어느 부분에서 우리는 늘 흔들리며 사는 것 같다. 집 안의 불을 어둡게 해두고 벽에 비치는 그림자를 볼 때
면, 사물의 고요함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 같은 것. 끝내 자꾸 흔들리느라, 어떤 감
정은 구토처럼 쏟아진다.
--- p.22
소란스럽고 외로운 ‘나’는 이제 ‘우리’를 숨겨진 주어로 하는 시들을 생각합니다. 기어코 허름한 열망이겠지만, 시가 바로 자유의 내피라는 누군가의 말을 믿는다면, 나는 함께 살아볼 수도 있을 겁니다. 사람과 생활과 어쩌면 죽음까지도. 그러기 위한 무언가를 해보려고 합니다. 왜 그걸 하냐는 질문엔 아직도 적절한 대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다만, 쓰는 날들과 쓰지 못하는 날들이 있을 겁니다. 그것을 이제 압니다. 영원히 없는 대답을 끝내 찾으려 헤매다가 끝날 수도 있겠지만, 이제는 괜찮습니다. 용기의 일일 것입니다.
--- p.58
사람이 기억을 견디지 못하는 게 아니라, 기억이 사람을 견디지 못하기도 한다. 마음은 문과 문틀 사이에 달린 경첩 같은 것이어서, 어떤 기억은 사람을 뛰쳐나가며 마음을 밀어 접는다. 나는 그 과정을 슬픔이라고 부르지만, 슬픔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어떤 진실이 있을 것이다. 올해 사월은 아무리 만져도 사라지지 않는 모래 위에 비친 예쁜 달그림자거나, 서쪽 하늘로 지며 동쪽에서부터 빛을 불러오는 사월이 되었으면 좋겠다. 결국, 살아 있는 모두에게 말이다.
--- p.83~84
소소하고 확실하다는 건 얼마나 강력한가. 약속도 일정도 없이 휴대폰을 무음으로 만들고 누워 맨살로 느끼는 여름의 홑이불과 겨울의 솜이불이 주는 감촉. 찻잔 속의 티백 위로 뜨거운 물을 조금씩 흘리면서 물감처럼 번지는 차의 빛깔을 보는 건. 일주일의 옷들을 전부 넣고 세제보다 섬유유연제를 가득 붓고 티셔츠와 수건과 양말과 속옷들이 비눗물 속을 돌아다니는 걸 쳐다보며 세탁기 앞에 쪼그려 앉는 시간, 세계의 북적거림이 내게 올 수 없고 나도 그 어떤 세상이 필요하지 않은, 아주 사소하고 견고한 순간이란 건.
--- p.160
나는 꽤 많은 시간을 허투루 쓰곤 했지만, 그래도 하고 싶거나 해야 하는 일을 많이 건너뛰지 않고 살아온 것 같은데. 어쩐지 오늘은 그 모든 시간이 나를 겨우 반 발짝 정도만 앞으로 가게 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수많은 타인과의 비교가 결국 자신을 비참하게 하는 일이겠지만, 그늘인 줄 알고 쉬려던 곳이 누군가의 그림자 밑이라는 걸 알았을 때는 섬뜩함을 느끼고 다시 자리를 털고 일어났습니다. 자신에게 칭찬보다 비난의 입술을 가지는 게 더욱 쉽습니다. 그런데 나는 어디로 가려고 했던 걸까요.
--- p.174
어쩌면 희망을 만들고 희망으로 지탱해야 한다는 믿음이 사실은 너무 아프고 강압적인 착각은 아니었을까. 깎고 자르고 뽑아서 조립해놓은 희망이 우리를 데려갈 곳은 결국 아무 데도 없는 건 아닐까. 발생하지 않는 희망을 길고 어둡게 끝까지 기다리며, 내가 다만 할 수 있는 일은 지금 없는 희망이 아니라 눈앞에 놓인 너의 견고한 고통에 참여하는 일은 아니었을까. 희망이 아닌 고통에 순종하는 방법. 그날의 우리는 서로를 연주하는 방법을 모르고 지나가버렸는지 모른다.
--- p.187
사랑의 자세를 가지고 세상과 모두에게 화평하여지자고 말하는 건 너무나 허무하고 맹랑한 생각이라는 걸 안다. 철없고 우습다. 우리는 각자 하나의 우주고, 섞일 수 없는 고유의 세계다. 그러나 언젠가 한 번쯤은 각자의 극장 속에서 상대의 무게를 조금 지탱해주는 저린 어깨가 될 수는 없을까. 잠시나마 섞이지 않는 서로의 우주를 포개면서 살아갈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사랑을 감히 요청하고 싶은 날들이 지나고 있었다.
--- p.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