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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의 세계

은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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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2년 01월 13일
쪽수, 무게, 크기 332쪽 | 390g | 133*200*18mm
ISBN13 9788954684682
ISBN10 89546846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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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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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들은 내가 바본 줄 알아요. 한국말 잘 못하고. ……그러면 바보 같으니까.
그렇지는 않을 거야.
당신도 그렇게 생각했으면서.
그렇게 말하고 연호는 나를 조용히 응시했다. 연호의 오른쪽 눈은 왼쪽보다 조금 작았다. 묘한 비대칭을 이루는 얼굴. 순한 눈동자와 언뜻언뜻 비치는 그 안의 공허. 나는 왜 그걸 알아볼 수 있었을까.
---「풍경과 사랑」중에서

연호는 집에 돌아가서 자겠다고 했다. 손님방이 있다고, 너무 늦었다고 말렸지만 애초에 자고 갈 생각은 아니었다며 점퍼를 입었다. 현관에서 신발을 신고 나가려던 연호가 돌아보았다.
같이 갈래요?
나는 웃었고, 웃는 나를 연호는 웃지 않고 바라보았다. 내가 고개를 젓자 연호가 작게 말했다. 나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뭐라고? 그는 다시 천천히 말했다.
One to one correspondence. 그걸 한국말로 뭐라고 하죠?
연호가 떠난 후 나는 발코니로 가서 섰다. 그러나 곧 뒤로 물러났다. 아래를 내려다보고 싶은 만큼 나는 두려웠다. 연호가 올려다볼까봐. 나를 발견할까봐.
---「풍경과 사랑」중에서

들꽃들이 우리를 감싸주고 있었고 아무렇게나 길게 뻗어 있는 나뭇가지들과 햇빛이 닿은 초록의 이파리들이 은은하게 빛났다. 등에 닿는 흙바닥의 서늘한 기운도 싫지 않았다. 앉아서는 도통 찾을 수 없던 새들의 움직임이 보였다. 이 비석 앞에 검은 상복을 입은 이들이 모여 애도했던 날이 있었을 것이다. 비통한 표정의 하객들과 관 위에 뿌려지는 흙. 백 년 전 장례식이 있던 날, 검은 모자를 쓴 남자는 고개를 숙였고 레이스 장갑을 낀 여자는 손수건으로 입을 막았다. 그들이 슬픔에 찬 표정으로 보았던 비석 앞에 우리는 지금 이렇게 누워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무덤이 조금씩」중에서

오랜 침묵의 시간이 지나면 헨리는 피곤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누군가의 죽음에 대해 너무 오랫동안 깊게 생각하다보면 마치 자신이 살해했거나 살해에 분명히 가담한 것 같은 확신이 든다고. 베티 스미스든 할아버지든 아니면 셰익스피어든. 그게 누구건 간에. 그래서 모든 죽음은 결국 타살이 아닐까. 언젠가는 나도 누가 죽이겠지. 물론 그게 신은 아니고, 하며 웃곤 했는데 그 모습이 내게는 우는 것처럼 보였다.
---「무덤이 조금씩」중에서

서늘한 방바닥과 오래된 이불 냄새와 홍의 체취, 그리고 멀리서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가 그에게는 아주 옛날처럼 여겨졌다. 겨우 일곱 시간 정도 멀어졌을 뿐인데 아주 옛날로, 그러나 누구의 옛날인지 모르는 곳으로 빠져나온 것 같았다.
---「마르케스를 잊어서」중에서

아직도 상일은 거기에 있을까. 문득 다시 문래동 공장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가서 아무것도 모르는 척 춤을 추고 술을 마시고 남자들이 만지면 눈을 감을까. 그러다가 목을 맨 시체가 보이면 무서운 만큼 있는 힘을 다해 비명을 지를 것이다. 택시를 잡을까. 돌아가서 상일의 여자가 보는 앞에서 상일의 목을 끌어안아볼까. 아무것도 참지 않고 최선을 다해 불청객이 되고 싶었다.
---「음악의 도움 없이」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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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도 그것을 온몸으로 느끼게 될 때가 있다. 누군가 닫고 간 문 소리가 문득 오래 남을 때. “마스크도 휴대폰도” 없이 직진해버리고 싶을 때. 눈앞의 사람에게 미쳤냐고 묻고 싶을 때. 솔직하고 싶은 욕망이 다른 모든 것들을 상관없이 만들 때.

위수정의 소설은 알 듯하면서 영영 모를 것도 같은 인물들의 미묘한 직설을 통해 마음의 ‘난리’들을 곳곳에 부려놓는다. 그곳엔 현재의 재난과 과거로부터의 죽음이 있고 정상성에서 비껴난 관계와 욕망들이 있다. 다 말해지지 않았기에 체험되는 인간과 세계의 불가해한 틈들이 있다.

눈을 뜨고 자는 것처럼 죽은 채로 살아본 적이 있는가? 기꺼이 불청객이 되고야 마는 여자들을 본 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위수정의 소설에서 가장 매혹적인 인물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죽음과 사랑 사이에서, 두려움과 경이로움 사이에서, 그게 어쩌면 살아 있다는 착각일지라도.
어느 밤에 우리는 이렇게 말하게 되는 것이다.
“또 난리 나겠지. 우르르 살아나서…… 또 아름답겠지.”
- 최은미 (소설가)
주어진 세계 외부의 무질서한 길에서 더 똑바로 보이고 더 정확하게 이해되는 것들, 위수정 소설은 그곳으로 우리를 이끈다. 미리 알지 못하는 시나리오를 연기하는 듯한 인물들을 따라가며 그들의 말과 몸짓을, 그들의 상상과 지각을 함께 겪다보면 문득 “사람들의 움직임이, 그들의 리듬이, 모두 이해되”는 순간을 맞는 것이다. (……) 이것이 위수정 소설을 경험하며 우리가 느끼는 해방감이다.
- 백지은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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