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일하던 김용균 씨의 주검을 발견한 후 트라우마와 함께 살아가며 싸우게 된 직장 동료·선배인 이인구 씨, 세상을 잃은 슬픔과 분노로 싸우며 일상을 새롭게 만들어가는 김용균 씨의 어머니 김미숙 씨, 계속되는 죽음을 막아보려 고군분투하며 일상의 싸움을 해나가는 노조 동료 이태성 씨가 그들입니다. 이들의 일상은 김용균의 죽음과 함께 달라졌습니다. 이들의 모습은 개인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비슷한 조건에 놓인 다른 사람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싸울 때 제대로 살아갈 수 있는 남겨진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세 사람을 통해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 p.10
“용균 씨의 죽은 몸을 아직 다 수습하기도 전인데 사고 나지 않은 옆쪽 컨베이어 벨트를 돌리라는 지시가 있었다. 이 역시 사고 대응 매뉴얼을 무시한 지시였다. 사고 난 컨베이어 벨트야 어쩔 수 없지만, 발전소는 돌아가야 하니 서두르라고 다그치는 소리에 인구 씨와 동료들은 몸서리를 쳤다.”
--- p.35
“시신을 보내는 마지막 순간, 용균 씨의 발이 점검구에 걸렸다. ‘탁탁’ 발이 걸리며 내는 소리에 인구 씨의 마음이 ‘턱’ 하고 내려앉았다고 했다.”
--- p.39쪽
“김용균의 죽음을 겪으며, 그동안 적당히 잘 적응하고 살아남으려 했던 시간이 모두 후회스러웠다. 회사는 늘 사고의 진짜 원인이 뭔지 밝히려고 하기보다는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한 실수와 잘못을 문제 삼기 바빴다. 회사가 만들어내는 ‘너만 잘하면 사고 안 난다’라는 방식의 안전 문화를, 한 번도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여왔다는 게, 인구 씨는 너무 후회스럽다.”
--- p.40
“여러 번 반복해서 용균 씨를 발견한 순간을 다시 설명할 때마다, 용균 씨의 몸과 컨베이어 벨트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르고 그 순간 느꼈던 감정도 다시 훅 밀려오곤 했다. …… 그러나 무엇보다 힘들었던 것은 여러 기관에서 진행되는 조사 과정 그 자체였다. 목격자로서 김용균 씨의 죽음이 그의 부주의나 과실 탓이 아니라는 걸 회사 간부들에게 항변한 사람이 인구 씨임에도, 경찰과 119 구조대, 고용노동부의 조사를 거치면서 참고인 신분과 피의자 신분 사이에서 휘둘리는 느낌을 받곤 했다.”
--- p.43
“사고가 난 후로 인구 씨는 집에서 잠들기 어려웠다. 잠잘 장소를 친구네로, 딸네로 옮겨도 소용이 없었다. 여러 차례 조사를 받다 보니 불안감이 커진 탓인지, 불을 끄면 창문으로 누가 들어올 것 같아서 못 자고, 용균 씨와 통화하는 소리가 되풀이되는 이명이 심해 잠을 설쳤다. 용균 씨의 빈소에 가니 이명이 사라졌고 그제야 잠이 오더라고 했다. 태안에 있을 때는 물론이고, 서울에서 투쟁할 때도 서울대학교병원에 마련된 용균 씨의 빈소, 영정 앞에 가야 잠을 잘 수 있었다.”
--- p.46
“한전에서 정규직으로 일할 때는 보이지 않던 게 켑스[한국발전기술] 들어가니까 눈에 보이는 거죠. 용균이 사건 후에야 다른 투쟁하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는 거예요. ‘아, 이건 아니구나……’ 했어요.”
--- p.50
“어디서부터 어떻게 자신이 겪은 경험과 고통을 나누어야 할지, 어렵다고 했다. 용균 씨의 죽음을 겪은 후로는, 이전에 만나오던 지인들과 편히 나누던 이야기들이 편하지 않았다. 일터에서 사람이 그렇게 많이 죽는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평온한 그들의 일상에 맞장구치기 어려웠다. 그렇게 전에 맺어오던 관계들도 서서히, 자연스럽게 정리하고 있다”
--- pp.55~56
“이미 사건을 거치면서 이전과 다른 사람으로 다시 구성된 자신이라는 존재를 받아들이는 생존자 인구 씨가 삶을 회복한다는 것은, 우리가 이미 알던 혹은 안다고 생각했던 어떤 방식을 벗어난 새로운 인구 씨만의 기획일 것이다.”
--- p.74
“사고 현장을 보고 난 뒤 1층까지 어떻게 내려왔는지 기억이 안 난다고 미숙 씨는 회고했다. 그리고 내려가는 동안에는 철제 계단이 얼마나 위태로운지 더 깊이 실감했다고 한다. 거의 수직에 가깝도록 가파르게 놓인 계단이었다. 몸을 돌려서 거꾸로 내려가야만 했다. 손잡이조차 없었다. 한 발 내디딜 때마다 계단이 들썩이는 걸 느끼며 미숙 씨는 이 현장 전체가 위험으로 빽빽이 들어차 있구나 생각했다.”
--- pp.105~106
“방법을 모르는 채로도, 특별한 결의와 선언 같은 것 없이도 미숙 씨는 수순처럼 싸움의 길로 들어섰고, 싸우는 사람이 되어갔다.”
--- p.106
“한마디로, 그 전에는 안 보이던 세상이 확 보였고, 다가왔고……. 이전 세상에서는 되게 안이하게 다른 생각에 많이 붙들려서 살았고, 내 삶만 생각하고 살았다면, 이쪽에 들어와서는 나는 좀 내려놓고 다른 것을 위해서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 pp.128~129
“좀 막막해요. 행복이 뭔지도 잘 모르겠고요. 바깥에서 막 사람들 옆에 서 있고 투쟁하고 그러다가 집에 들어오면 갑자기 좀 멍해져요. 할 일도 딱히 없고요. 그래서 집에 혼자 잘 안 있어요. 일이 없을 때면 오히려 사무실에 나가요.”
--- pp.130~131
“사실 저를 생각했으면 이런 일을 안 하겠죠. 하지만 이 사회를 그냥 두고 볼 수가 없는 거죠. 노동자들이 이렇게 죽는다는 걸 알고도 그냥 두고 보면 계속 돌아가시는 분들이 나올 테고, 유족도 나올 테고……. 얼마나 힘들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용균이 사고 터졌을 때는 이렇게 생각했어요. 그동안 그렇게 많이 죽었다는데 왜 아무도 나서지 않았나. 제대로 나서고 싸워줬더라면 용균이 죽지 않을 수 있었는데……. 그게 원망스러웠어요. 근데 저도 이렇게 노력했는데도 계속 똑같이 죽고 있잖아요. 법을 두 개나 바꾸고 만들고 했는데도 죽음의 숫자가 줄어들지 않는 걸 보고 이 운동이 힘들다는 걸 알았어요.”
--- p.136
“유족이라고 해서 그가 지금까지 겪어왔고 겪어갈 모든 생활과 일상, 다양한 기억과 감정이 가족을 잃은 슬픔으로 인해 모조리 삭제되는 것이 아니다. 가족을 잃은 슬픔만이 한 존재를 구성하는 시간의 전부는 아닌 것이다.”
--- p.142
“미숙 씨 안에도 두 마음이 있다. 이 싸움을 끝까지 제대로 해서 사회를 바꿔보고 싶다는 마음과 이 사건의 재판만 모두 끝내고 나면 싸움과는 상관없는 다른 삶을 살겠다는 마음이 계속 다툰다.”
--- p.145
“김미숙 씨 역시 여전히 때론 모든 걸 뒤로하고 자신의 슬픔에만 빠져 있기도 하는 사람이고, 그래서 곧장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도망치고 싶고 숨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수시로 하는 사람이며, 또 한편으론 여전히 스스로의 일상을 꾸리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 p.146
“태성 씨는 김용균의 죽음으로 마음 밑바닥에 넣어두었던 동생의 죽음, 산재 처리도 힘들었던 동료들을 떠올렸다. 아픈 기억들이 김용균의 죽음으로 봉인 풀리듯이 흘러나왔고 태성 씨는 순간적으로 그냥 이렇게 지금까지와 똑같이 보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 p.173
“정규직이 되는 것도 좋지만 그것도 살아 있을 때 이야기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열악한 노동환경과 죽음의 외주화에 내몰려 있었다. 태성 씨에게 김용균의 죽음은 김용균 한 명의 죽음이 아니라, 그간 죽어간 동료들이었다. 상황을 알기 위해 봐야만 했던 사고 장면 사진. 그것을 본 것만으로도 그는 김용균의 죽음을 그냥 보낼 수 없었다.”
--- p.177
“많은 동료를 떠나보내고 나서야 산재가 작업자 탓이 아니라는 말을 해야 한다는 걸 알았다.”
--- p.180
“원청은 하청업체가 관리 책임이 있다고 말하고, 하청은 노동자가 잘못한 거라고 말하는 게 문제였다고. 이런 외주화의 악순환 구조가 지속되어, 김용균이 사망했다는 걸 회사가 인정하게 만들고 싶었다. 이 악순환을 깨고 싶었다.”
--- p.192
“시간이 지나면서 조합원들은 달라졌다. 본인들이 자료를 퍼서 나르기도 하고 처음에는 얼굴을 가리고 인터뷰를 하다가 어느 날부터는 얼굴을 자신 있게 드러내고 인터뷰도 했다.”
--- p.199
“조합원들이 우리가 싸우지 않으면 바뀔 게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죠. 용균이 죽음 앞에 사죄도 안 하는 회사 모습을 봤고, 정규직화를 위한 싸움도 해야 하니까요. 용균이 동료로서 해야 할 역할도 있었고, 나 자신을 위해서 싸워야 되는 목적성도 인식하고 있었다고 봐요.”
--- p.203
“그는 “우리는 미치도록 싸웠어요”라고 했다. 조합원의 절반이 매일 집회와 행사에 참가했고, 교대 근무자를 빼고는 어디에서든 뭐든 하고 있었다. 나이트 근무를 끝내고 버스를 타고 서울로 올라오기도 했다.”
--- p.209
“김용균 사고로 인해 태성 씨 역시 트라우마 치료를 받고 투약과 상담 치료를 병행했다. 김용균투쟁이 마무리되면서 상태가 좀 나아졌지만, 그래도 그는 아직 항상 약을 가방에 넣고 다니며 병원 치료를 계속하고 있다. 큰 투쟁이 끝났지만 온전히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어떨 때는 문득문득 두서없이 생각이 나고, 약을 먹지 않으면 버틸 수가 없고 잠을 자지도 못한다.”
--- p.232
“발전소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약속은 태성 씨를 가장 고통스럽게 하는 숙제다. 정부의 약속은 2년을 지나 3년째 이행되지 않고 있다. 발전소에서 비정규직들이 하는 업무는 생명안전 업무이고 필수유지 업무여서 노동조합의 파업권도 제한할 만큼 중요한 업무라고 했다. 그런데 왜……. 협의도, 행동도 할 만큼 했는데, 이제 뭘 더 해야 하는 걸까 태성 씨는 생각한다.”
--- p.234
“김용균투쟁이 자신들에게 가르쳐준 것 중 하나는 문제가 있다면 이야기하고 주체가 되어 문제를 제기하고 행동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함께할 이들이 생기고 해결 방법도 생긴다.”
--- p.2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