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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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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2년 07월 29일
쪽수, 무게, 크기 304쪽 | 362g | 133*200*30mm
ISBN13 9788954687812
ISBN10 8954687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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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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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다는 말은 둘에겐 좋다거나 충분하다가 아니라, 견딜 만하다는 의미였다. 순례는 누가 너를 말리겠느냐는 얼굴로 구호를 쳐다보다가 문득 표정을 풀고 환하게 웃었다.
“왜 웃어?”
순례는 구호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구호는 말은 건조하게 하지만 눈 속에 물빛이 어려 있다. 막막한 슬픔을 감정이 아니라 생각으로 바꾸는 눈빛이다.
“그냥.”
네가 냉정해서 좋아, 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승객」중에서

“자기 할머니와 부모가 돌아가신 뒤에 말하기를, 평생 남들 뒤치다꺼리나 했지 단 한 번도 자신의 삶을 산 적이 없다고 하더라. 다른 여자와 사는 것이 자기 삶인 건가. 이상하지, 난 언제나 내 삶을 살았다고 생각하는데. 내 삶 말이야, 그건……”
정혜는 말을 멈추었다. 윤재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너는 남편이 돌아오길 기다리는 거니?”
정혜가 귀에서 손바닥을 떼고 말했다.
“누구에게 해명하고 싶진 않아. 내 삶은, 오직 나의 예술이야.”
---「붓꽃」중에서

소연은 인우의 등을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인우가 노래하면서 배에 힘을 잔뜩 주어 복벽을 밀었다가 당기는 게 눈에 보였다. 바람 자는 이 저녁 흰 눈은 퍼붓는데 무엇 하고 계시노 같은 저녁 금년은 꿈이라도 꾸면은 잠들면 만날런가 잊었던 그 사람은 흰 눈 타고 오시네 저녁때 흰 눈은 퍼부어라 저녁때 흰 눈은 퍼부어라…… 인우는 곧 인천으로 이사할 것이다. 다음 계절에 그들은 인천의 어느 낯선 동네를 또 정처 없이 걸어다닐 것이다. 어쩌면 무서운 것은 낡은 집 마루에서 홀로 벌거벗고 밥을 먹던 남자가 아니라 그의 코앞으로 손을 잡고 지나간 중년의 남녀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텅 빈 데이트의 유령이었다.
---「합」중에서

선경은 오윤이 오만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오윤이 제 삶을 감당하기 위해 그런 식으로 각오를 다진다는 사실도 알았기에 나무라지 못했다. “무슨 일이든, 시작할 때는 막연한 각오를 해야 해요. 그 안에선 늘 예상치 못한 일들이 생기니까요.” 선경은 오윤이 인생을 미처 시작하기도 전에 그 많은 각오를 하는 것이 가슴 아팠다.
---「막연한 각오」중에서

“실제 삶이 없다면, 풍경은 얼마나, 지루한, 것이겠어요. 또 풍경이 없다면, 실제 삶은 얼마나, 비루한 것일까요……” 엉뚱한 화법이었지만 기후는 공감했다. 아마도 서로를 뒤섞은 웃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쩐지 풍경이 영혼으로 들렸다. 실제 삶이 없다면 영혼은 얼마나 지루할 것인가. 또 영혼이 없다면 실제 삶은 얼마나 비루할 것인가.
---「사구미 해변」중에서

바다로 햇빛으로 바람으로, 소금같이 아지랑이같이 눈송이같이 하루하루 사라져가는 우리들, 누군가와 반짝 눈이 마주치면 삶과 마주한 듯 손을 흔들 것이다.
---「파푸아뉴기니 행성」

최후의 순간까지 내가 입안에 물고 갈 말과 마지막 순간에야 알아챌 어떤 진실이 내 인생에 숨어 있을 것을 생각하면 두피가 싸늘하게 식곤 했다. 그건 두려움과는 다른, 자신과 생 자체에 대한 좌절이고, 완전히 좌절한 뒤에야 눈을 뜰 외경심이었다.
---「굿바이 R」중에서

나는 모든 여자에게서 R의 일부를 발견했다. 호연도 처음부터 R과 같은 부류였다. 삶의 표면 위로 튀어오르는 섬광 같은 기쁨과 심연으로 가라앉는 영원한 그늘 사이에서 모든 여자의 불안과 외로움, 좌절과 질투와 결핍과 우울, 가난과 사치와 슬픔과 공허, 그리고 상실과 해독되지 않고 쌓여만 가는 독은, 같은 것을 나눈 듯 서로 닮아 있었다.
---「굿바이 R」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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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평 추천평 보이기/감추기

스무 살에 읽었던 전경린의 소설들은 세상과 열정적으로 불화하는 여성들의 이야기였다. 욕망과 사랑을 쟁취하면서 자기 삶의 당연한 주인이 되려는 이들의 이야기가 매혹적으로 펼쳐졌다. 이번 소설집에서 그들은 생의 비의를 여행자의 눈으로 관찰하며 더 깊고 더 차갑게 세상을 탐색해나간다. 인도에서 발리로, 마카오에서 연안의 폐해수욕장으로 다양한 인물과 풍경을 수렴하며 나아가는 이들의 경로는 “최후의 순간까지” 알지 못할 생의 진실을 전제하고 있기에 끊임없는 비관과 회의 속에 놓인다. 하지만 동시에 “완전히 좌절한 뒤에야 눈을 뜰 외경심”으로 삶을 향해 있기에 우리는 이 섬세한 고독의 결을 흔쾌히 따라갈 수 있다. “막막한 슬픔을 감정이 아니라 생각으로 바꾸는 눈빛”으로 팽팽하게 빛나는 전경린의 인물들이 독자들에게 영원히 사랑받기를 바란다.
- 김금희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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