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고백이다. 이름을 셀프로 지었다는 사실은 이상하게 말하기가 어렵다. 엄마 뱃속을 거치지 않고 근본 없이 태어난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자의식 과잉 사춘기가 할 법한 일탈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태어남과 동시에 주어지는 선물을 걷어차고 내가 원하는 이름대로 살겠다는 선전포고만으로도 충분히 건방진데, 그 이름을 직접 짓는다는 것은 또 얼마나 건방진가. 하지만 2007년의 나는 ‘행복은 셀프’라 생각했고, 더 이상 뒤를 돌아보기 싫었다. 새로 태어나고 싶었다. 2007년 10월 12일. 직접 지은 새 이름과 직접 쓴 사유서를 가지고 법원으로 향했다. 법원까지 가는 55-1번 버스가 곧장 와서는 ‘운이 좋으려나’ 짐작했다고 당시의 일기에 적혀있다.
---「개명」중에서
더하지도 빼지도 않은 같은 무게의 관계를 원하는 까탈스러운 성미는 꽤 오래 갔다. 조금이라도 배려의 추가 내 쪽으로 기울면 마음이 불편했고, 그렇다고 너무 배려해 주지 않으면 서러웠다. 스스로 운신의 폭을 좁혀나갔던 것을 인정한다. 이래서야, 사랑은 어떻게 하는 거지?
---「혼자 있는 시간」중에서
누군가를 열렬히 좋아하는 사람을 보면 여전히 신기한 눈빛으로 바라보게 된다. 맹목적으로 사랑함으로써 오히려 생의 희열과 의욕을 얻는 사람들. 사랑을 주는 그 마음만으로도 충분히 충만해져 더욱더 뜨겁게 살아가는 이들의 얼굴은 나를 설레게 한다. 나는 끝내 할 수 없는 어떤 종류의 사랑을, 그리도 매일 부어주는 샘물 같은 이들이 내 곁에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러면 그 사랑을 찻잎 삼아 표일배에 넣고 그들의 열정을 미지근하게나마 우려 마시며 대리만족하는 것이다. 나도 그 마음에 대해 조금은 알겠다고, 그들의 사랑을 독려하는 것이 내게 주어진 몫인 듯하다.
---「표일배 정도면 어때」중에서
때로 ‘믿음’이란 말은 ‘기대’와 비슷한 용도로 쓰이기도 하는데, 둘은 분명히 다르다. 기대는 기대 이상의 것을 바랄 때 쓰이고, 믿음은 있는 그대로의 것을 믿을 때 쓰인다. 부모가 시험을 앞둔 아이에게 “기대할게”라고 말하는 것과 “널 믿어”라고 말하는 것이 천지차이인 것처럼. 또한 기대는 주로 상대를 향하고, 믿음은 내 안으로 파고드는 종류일 때가 많다. 네 안에 있는 기대감은 내가 어쩔 수 없지만, 내 안에 있는 믿음은 내가 키워나갈 수 있다.
---「믿습니까」중에서
트위터 명문 중에 ‘나이 먹으니까 눈물이 늘어. 이해할 수 있는 슬픔이 너무 많아져’라는 문장이 있다. 앞으로는 이해 가능한 슬픔의 영역이 더욱 넓어지면 넓어졌지, 좁아지진 않을 것이다. 넘어지고 실패하고 이별하고 세상 무서운 것을 알아가는 것이 삶이라고 하지만, 그 과정에서 생기는 슬픔을 감내해야 하는 것은 오롯이 한 사람 한 사람의 몫이기에, 그것에 성장이라 이름 붙이기까지는 너무 많은 시간이 필요하기에 오늘의 우리는 다들 힘들고, 그 힘들다는 이야기를 나는 이렇게나 길게 길게 쓰고 있다. 할머니가 보고 싶다고 한 마디만 쓰면 됐는데 말이다.
---「아는 만큼 두렵다」중에서
그 후로 누군가가 자기 고민의 무게를 내게 옮겨올 때마다 나는 기꺼운 마음이 되었다. 언젠가 약점이 되겠거니 계산하지 않고, 진솔하게 말을 걸어오는 사람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여전히 나는 아무 일도 없는 척, 아무렇지 않은 척, 괜찮다고 말하는 날이 많은 겁쟁이라서, 내게 괜찮지 않음을 고백해 오는 사람의 대담한 마음을 도무지 저버릴 수 없는 것이다.
---「우리, 사이가 안 좋아」중에서
하지만 삶은 잼이나 로션처럼 단순하지 않아서 비틀고 쥐어짤수록, 때로는 바닥을 드러낼수록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곤 한다. 그것을 가능성이라 표현하면 좋게만 느껴지지만 결국 가능성의 언덕을 넘기 위해서는 진통이 따른다. 기나긴 생애주기에서 완벽하게 끝이 보이는 일이나 관계란 좀처럼 만나기 어려워서 숨이 차고, 지치고, 이제 좀 접어두고 쉬고 싶은 순간에도 좀처럼 끝을 보여주지 않는다. 삶은 일회용이 아니니까, 내재된 것을 쓰고 버리는 튜브가 아니니까, 바닥을 찍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생은 계속해서 다른 장을 펼쳐 보여준다.
---「작지만 확실한 끝」중에서
나는 지금의 나의 온도가 좋다. 펄펄 끓다가 식은 게 아니라, 차가운 데서 서서히 따뜻해지고 있는 내가. 살면서 아프기도 하고 상처 입기도 하면서 서서히 식어가는 내가 아니라, 반대로 서서히 데워지고 있다는 사실에 위로를 받는다. 새벽에 태어나 아침으로 나아가듯 점점 빛이 더 많이 드는 삶. 여전히 어느 날은 외로운 위도에서 태어난 것을 원망하면서 어린아이처럼 굴 때도 있겠지만, 또 어느 맑은 날에는 삶의 의지를 충분히 흡수하고 마음에 열을 올리는 날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나의 온도. 아직 미지근하지만, 그래도 잡아보면 온기가 있는 손. 그런 미지근한 손이라도 괜찮다면, 이제는 누군가의 찬 손을 잡아주고 싶다.
---「미지근한 손이라도 괜찮다면」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