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보다 오래된』은 여러 가지 마음속 소란을 몰아낼 수 있는 고요함이 가득한 책이다. 인간중심주의에 안주했으면 결코 느끼지 못했을 기쁨과 슬픔을 느낄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마음이 시키는 바에 따라 자신이 하기로 한 일을 긴 시간 포기하지 않았던 사람이 찍었기에 고라니 한 마리 한 마리가 사랑받는 생명체로 보인다. 이런저런 자신만의, 그러나 우리가 결코 알 수 없는 생명의 이야기를 품고 있는 고라니가 있는 그대로 사랑받고 있다는 것, 비록 찰나일 수 있지만 소중하게 다뤄지고 있다는 것이 나에게 진정한 위안이 되었다. 이 책은 생명의 존엄성에 관한 이야기의 ‘시작’ 같은 책이자 ‘기회’의 책이다. 이 책이 열어놓은 문을 따라 들어가 나처럼 이 지구를 유일한 서식지로 알고 살아가는 생명들의 앞날에 어떤 더 나은 일이 가능할지, 새로운 이야기를 만나길 바란다. 생명이 눈앞에 있다. 우리가 지키고 구할 수 있다. 사랑할 수 있다. 그것이 우리 눈이 항상 찾는 빛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랬다.
- 정혜윤 (작가·CBS 라디오 피디)
두 개의 큰 귀는 사방의 소리를 향해 열린 듯 쫑긋 서 있다. 뭉툭한 검은 코는 촉촉하게 물기를 머금고 있다. 짧고, 부드럽고 촘촘한 잿빛 털이 온몸을 회오리치듯 뒤덮고 있다. 마지막으로, 맑고 검고 깊은 두 눈, 두 눈이 이편을 지그시 응시한다. 오래전 사진가가 서 있었을 바로 그 자리에서 뒤늦게 나는 이 미지의 생명을 마주 본다. (중략) 그래서 사진가는 광주의 골목에 이끌렸을 것이다. 그녀에게 표현이란 세계에 대한 하나의 응답이었고, 응답받지 못한다 해도 보내고 마는 한 통의 편지였으므로. 또한 그래서 사진가는 고라니에 이끌렸을 것이다. 작고 하찮은, 보잘것없는, 없어져도 그만인, 존재하지만 거의 보이지 않는 그 짐승들의 우주가, 언젠가 그녀가 광주에서 마주한 인간들의 우주와 다를 바 없이 대등함을 알았기에. 깊은 밤, 숲에 고라니가 있다. 바람결에 숲이 흔들린다. 그 기척에 일순 고라니가 멈춘다. 고라니가, 고라니 안의 누군가가 바라본다. 웅덩이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듯도 하다. 그 상(像)을 내가 볼 수 있다면, 지금 나는 무덤 속인가, 내 살은 썩었는가. 썩어서 흙이 되었는가. 그의 두 눈은 그래서 슬펐는가. 그의 눈길이 마침내 가닿은 곳에는 나 아닌 인간의 시원(始元)이 있었다. 바라봄으로, 그는 내 안의 시원을 나타나게 했다. 그것은 내가 영영 몰랐던 나의 영혼처럼 광활한 대륙이었다. 펄럭이는 나의 영혼은 나를 대신하여 그를 향해 응답하고 있었다.
- 장혜령 (시인·소설가)
우리와 어떤 종이 경쟁 관계에 놓여있다고 해서 그들을 유해하다고 한다면 그 목록엔 세상 모든 종이 포함될 것이다. 물고기를 잡는 펠리컨과 돌고래, 나무를 깎아 먹는 비버와 흰개미, 과일을 먹는 원숭이와 새, 곡식을 갉는 곤충들 모두 사살의 대상이지 않겠는가? 심지어는 사람을 먹는 동물이 아직도 지구상에 남아 있는 이유는 세상 사람 누구나 우리처럼 ‘유해’의 딱지를 붙여가며 죽여 없애는 걸 당연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유해하다고 하는 그들의 얼굴을 바라보라. 그렇다. 그들에게도 다 얼굴이 있다는 것부터 새롭게 인지해야 한다. 사진이 뭔지도, 자신이 찍히는지도 모르는 순진무구한 눈망울 하나만은 공통된다. 그 외에는 조금씩 다르다. 느껴진다. 하나하나의 얼굴에서 고라니라는 종의 보편성과 각 개체의 특수성이 표현되고 있는 것이. 우리는 이들을 싸잡아 개체군이라 부른다. 많고 적음이라는 척도에 따라 그저 그 수를 조절해야 하는 무엇으로. 하지만 ‘군’이 되기 위해선 일단 ‘개체’이어야 한다. 하나의 완성된, 고유한 개체. 그 개체가 나오기 위해 부모는 무던히 노력했고, 슬픔과 기쁨, 평화와 놀라움의 지난한 과정을 거쳐 어엿한 하나의 고라니가 된 이들이다. 생명의 위협이 도처에 널린 곳에서 당당히 자란 이들의 정면상은 마치 독립운동가들을 보는 듯하다. 순수하고 용감하게 세상과 맞서며 삶을 펼친 영혼들의 초상이다.
- 김산하 (생태학자·생명다양성재단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