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렸나, 마음이 아프다고 느끼면서도.” 요시다 다쿠로의 노래 한 소절이 지금 내 마음에 절절히 와 닿는다. 마음이 아픈 것은 나의 장서 상태 때문이다. 책이 늘어도 너무 늘었다. 책장에 꽂아둔 책과 거의 같은 양의 책이 계단에서 복도, 책장 앞, 책상 주변까지 쏟아져 쌓일 대로 쌓였다. 덕분에 몸을 슬쩍 움직이는 일조차 여간 고역이 아니다. 바닥에 흐트러진 책과 책 사이 좁다란 공간에 한 발을 비집고 들어서야 앞으로 나갈 수 있다. 겨우 앞으로 나간다 해도 쌓아올린 책의 탑이 우르르 무너져 내린다.
발 디딜 공간을 찾을 수 있다면 그나마 낫다. 못 찾으면 책을 밟고 넘어 다녀야 한다. 신성한 책을 밟다니, 서평 쓰기를 업으로 삼은 사람으로서 막돼먹은 행동이리라.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아무렇지 않게 책을 밟고 다닌다. 벌을 받는 건지 발이 미끄러지면서 밟은 책 표지가 찢어져서 “윽!”, 본체를 빼낸 책갑이 밟혀 뭉개져서 “으악!”, 펼쳐진 책장이 휙 접히고 구겨져서 “어이쿠!”,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다. 요사이 찾는 책을 발견할 확률이 점점 낮아져 분명 집에 있는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 오거나 서점에서 다시 사오는 일이 심심찮게 있다. 위험한 것은 다시 사오거나 빌려온 책마저 장서의 파도에 떠밀려 ‘해저 깊은 곳’에 잠겨버리는 일이다. 언제 도서관에서 독촉장이 날아올지 몰라 안절부절못하니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다.---1장. 책이 집을 파괴한다
≪서재-창조공간의 설계≫는 학자나 작가처럼 원고를 집필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의 ‘서재론’을 모은 책이다. 공감이 갔던 부분은 서양 사상사와 경제사 평론가 세키 히로노 편이었다. 그는 ≪방장기≫를 염두에 두고 일본 옛 문필가들의 서재가 “다다미 넉 장 반쯤 될까 말까 한 허름한 초막인 경우가 많다”면서 “일본 고전문학이 계절이나 날씨 변화에 대단히 민감한 이유는, 일본 민족 고유의 감수성이라기보단 글을 쓰는 사람 상당수가 비바람을 그대로 맞는 바깥이나 다를 바 없는 초가에 살던 건축학적 조건과 관계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정곡을 찌르는 견해를 밝혔다. 덧붙여 세키가 생각하는 지상 최대의 이상적인 서재는 교도소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옥중에 역작을 써내거나 전 생애를 결정짓는 독서체험을 한 예가 적지 않다”고.
교도소를 ‘서재’로 삼은 대표적인 사람은 아라하타 간손이다. 메이지·다이쇼·쇼와시대를 살아낸 이 확고한 신념의 사회주의 활동가는 1908년에 ‘붉은 깃발 사건’으로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 교도소에 있던 덕분에 ‘대역 사건’에 연루되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당시 감옥에서는 보유할 수 있는 책을 세 권 이하로 제한했지만 그는 권수를 늘려달라고 요구해 한 달에 아홉 권까지 볼 수 있었다. 영어를 독파하려고 가넷이 번역한 투르게네프 전집을 받아서 영일사전이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읽고 또 읽었다. 달리 할 일도 없고, 정신을 혼란하게 할 것도 없으며, 무슨 책을 읽을까 고민할 장서도 없다. 집중하기 좋다는 의미에서 ‘명창정궤’의 실례로 교도소를 들 수도 있겠다. 하긴 초막 같은 곳에 실용품 따위는 없는 셈이니 감금되지 않은 ‘교도소’나 다를 바 없으리라.---4장. 책장이 서재를 타락시킨다
작가 사카자키 시게모리는 수집가로도 유명한데, 수집품은 자택에 두지 않고 일부러 방을 빌려 보관한다. 그 방은 목조건물에 책, 목제 지팡이, 표주박 같은 작은 물건만 모아놓아 딱 봐도 불에 잘 타게 생겼다. 어느 날, 취재를 온 기자는 방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불이 나면 큰일이겠네요, 라는 말을 내뱉었다. 사카자키의 대답이 걸작이다. “어쩌면 그것대로 마음은 후련하지 않을까?”
아마 그는 진심이었을지도 모른다. 수집가 가운데는 상식을 벗어날 정도로 ‘푹 빠지는’ 타입이 있다. 가족도 돌보지 않은 채 금전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인생의 모든 것을 오직 ‘수집’에 내던진다. 수집하는 대상이 삶의 전부여서 수집품 말고는 쳐다보지도 않는다. 행여 불이라도 나서 모든 수집품이 불타버린다면 그것은 ‘죽음’을 의미하리라. 광적인 수집가가 아니더라도 모으면 모을수록 수집품이 공간을 압박하고, 부족함을 메우기 위한 ‘번민’이 싹튼다. 커다란 개를 산책시키는 키 작고 힘없는 남자처럼 수집품이 힘을 얻는 순간부터 수집가는 거기에 휘둘린다. 하지만 사카자키는 다르다. 그의 목적은 ‘은거’다. 수집품은 거기에 따라오는 부록 같은 것으로 그에게 ‘장서의 괴로움’을 찾아볼 수 없다. 그는 굶주린 사람인 양 맹렬히 사들이는 수집가가 아니다. 언제든 ‘출발점’으로 돌아갈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한 담담함이 사카자키의 매력이며, 그 모습은 그의 글에도 드러난다. “불타면 불탄 만큼 후련해지고, 장서의 괴로움에서 해방된다.” 짐짓 과격한 듯하지만, 장서가로서 각오해야 할 마음가짐이 아닐까.---7장. 장서가 불타버린 사람들
작가이자 평론가인 요시다 겐이치는 “책장에 책이 5백 권쯤 있으면 그걸로 충분하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원서를 보지 않고도 셰익스피어나 보들레르를 외웠다는 교양인 요시다의 책장에 책이 5백 권뿐이었다니! 다소 믿기 어려운 이야기지만, 그는 정말로 필요한 5백 권, 피와 살이 되는 5백 권만 지니고 있었다. ‘5백 권의 가치’는 이랬다.
“책 5백 권이란 칠칠치 못하다거나 공부가 부족하다는 것과는 다르다. 어지간한 금욕과 단념이 없으면 실현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를 실행하려면 보통 정신력으로는 안 된다. 세상 사람들은 하루에 세 권쯤 책을 읽으면 독서가라고 말하는 듯하나, 실은 세 번, 네 번 반복해 읽을 수 있는 책을 한 권이라도 더 가진 사람이야말로 올바른 독서가다.”
요시다야말로 그런 사람이었다. 필요할 때마다 자유자재로 열어볼 수 있는 책이 책장에 5백, 6백 권 있으면 충분하고, 그 내역이 조금씩 바뀌어야 이른바 진정한 독서가다. 5백, 6백 권이라면 5단 철제 책장 세 개 남짓한 분량이다. 앞뒤 두 줄로 꼽지 않고 모든 책등이 보이도록 꼽았을 경우다. 도서관 대출을 염두에 두면 분명 이상적인 권수이며 언제든 필요한 책을 찾아낼 수 있는 수치다. 그 책 어디 갔더라, 분명 갖고 있을 텐데, 찾으려 들면 하루가 다 간다니까, 차라리 그냥 새 책 사는 게 빠르지, 하는 웃지 못할 희비극은 연출되지 않는다.---10장. 적당한 장서량은 5백 권
굳이 이래저래 말을 늘어놓지 않더라도 ‘전자서적’에 대한 나의 곱지 않은 시선을, 여태껏 이 책을 읽어주신 분이라면 이해해주시리라 믿는다. 책은 내용물만으로 구성되는 건 아니다. 종이질부터 판형, 제본, 장정 그리고 손에 들었을 때 느껴지는 촉감까지 제각각 다른 모양과 감각을 종합해 ‘책’이라 불리는 게 아닐까. 1979년에 오자와쇼텐이 출간한 요시다 겐이치의 번역 시집 ≪포도주의 색≫을 예로 들어보자. 대리석 무늬의 마블지로 만든 책갑에서 꺼낸 책은 기름종이에 싸인 새하얀 프랑스장정이다. 손에 들고 팔랑팔랑 넘기면 세이코샤의 옛날 한자와 옛날 가나 활자가 날아든다. 책갑에서 책을 꺼내, 읽기 전에 먼저 만지고, 책장을 펼치는 동작에 ‘독서’의 자세가 있다. 그에 수반하는 소유의 고통이 싫지 않기에 ‘장서의 괴로움’은 ‘장서의 즐거움’이다. 제 생각이 고리타분한가요? 정말 그런가요? 전 이것이 결정적인 무엇이라고 생각하는데.
‘전자서적’은 ‘책’이 아니라 미래를 향한 완전히 새로운 미디어다. 종이책을 그대로 전자화한다고 새로운 미디어가 되는 건 아니므로, 그 나름대로 친숙해지기 쉬운 명칭이 필요하지 않을까. 물론 ‘전자서적’으로의 흐름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방법에 따라서는 타 장르와의 합작을 통해 독서를 보다 활성화하는 구세주가 될 수도 있다. 다만 지금은 그것을 시도해보고 싶지 않다. 아무개 씨가 말한 것처럼 장서가 전부 사라졌습니다, 라는 말은 하고 싶지 않다. 마치 나 자신이 사라져버리는 기분이 들어서다. 종이책을 향한 못 말리는 나의 애착을 ‘패배자의 투정’이라 해도 어쩔 수 없다. ---12장. ‘자취’는 장서 문제를 해결할까?
장서를 처분하려는 사람들에게 한 가지 제안한다. 나처럼 어딘가 장소를 빌리지 말고 차라리 자택을 이용해 ‘1인 헌책시장’을 열어보라. 헌책시장을 열고 싶은데 적당한 장소도 없고, 도와줄 사람도 없어 좀처럼 실천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딱 알맞은 방식이다. 기한은 하루, 일요일이 좋다. 장소는 자택 거실. 단독주택이면 봄이나 가을 어느 맑은 날에 뜰에서 현관까지 혹은 차고를 추천하다. 친구나 친구의 친구, 이웃 사람에게 소식을 알리고 사람들이 모이면 책을 판다. 무엇부터 준비하면 될까. 우선 처분하고 싶은 책을 책장에서 꺼내 한 장소에 모은다. 부인 혹은 남편 그리고 아이에게도 도움을 청해 안 읽는 책을 모아보자. 잡지나 만화, 그림책도 좋다. 프리마켓처럼 의류나 장난감 같은 물건을 함께 내놓아도 좋다. 책이 생각만큼 모이지 않으면 비슷한 ‘괴로움’을 지닌 친구나 지인에게 함께 하자고 말해본다.
책이 모이면 가격을 매긴다. 나중에 합산할 때를 고려해 네모로 자른 종이에 가격을 적어 책에 끼워 넣는 방식을 추천한다. 가격은 알기 쉽도록 크고 정확하게 적는다. 빼내기 쉽도록 제일 마지막 책장에 끼운다. 그냥 끼우면 그걸로 족하다. 여러 집이 합동으로 여는 경우는 누구 물건인지 알 수 있도록 가격표에 반드시 이름이나 기호를 적는다. 그 전에 표지가 더럽거나 먼지가 쌓인 책은 깨끗이 닦아둔다. 자국을 지울 때는 지우개를 쓰거나 연하게 중성세제를 묻힌 헝겊으로 닦아내면 좋다. 손님이 조금이라도 기분 좋게 책을 사도록 하기 위한 준비다.
이제 제일 중요한 가격 매기기다. 다 팔고 싶다면 되도록 싸게! 만약 신간이 많다면 오히려 헌책방에 처분하는 편이 값을 잘 받는다. 하지만 오래된 단행본이나 문고본이라면 눈 딱 감고 싼 가격을 붙이도록 하자. 책은 50엔, 100엔, 150엔, 200엔과 같이 가격대로 나눈다. 과감히 다 100엔으로 해도 좋다. 북오프에 책을 처분하면 신간이라도 대부분 50엔 정도밖에 쳐주지 않는다. 단행본도 100엔 이상 쳐주지 않고 잡지는 대부분 50엔이다. 오래된 만화는 받아주지도 않는다. 그러니 값을 싸게 해서 아는 사람에게 파는 편이 낫지 않은가.
---14장. 장서를 처분하는 최후 수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