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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로 먼저 읽는 『지하로부터의 수기』
제1부 지하실 제2부 진눈깨비 때문에 해설│조혜경 도스토옙스키 연보 |
Fyodor Mikhailovich Dostoevsk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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맙소사! 내가 자연 법칙도 싫고, 2 곱하기 2는 4라는 사실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데, 그깟 법칙과 수학이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물론 내가 돌담을 부술 힘이 없다면, 굳이 이마로 들이받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돌담이 앞을 막고 있고 내 힘이 모자란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그 돌담과 화해할 생각은 없다.
--- p.37, 「제1부. 지하실. 3장.」 중에서 여러분, 이 모든 게 권태, 권태 탓이다. 무기력이 날 짓눌렀다. 과도한 의식이 끝내 맺는 열매는 무기력이다. 즉 의식적으로 팔짱을 끼고 앉아버리는 것이다. 난 이미 앞에서 이 문제에 대해 언급했다. 반복한다. 힘주어 다시 말한다. 단순한 자들과 분주히 돌아다니는 자들이 활동적인 까닭은 그들이 우둔하고 시야가 좁기 탓이다. --- p.45, 「제1부. 지하실. 5장.」 중에서 어쩌면 인간에게는 자기에게 가장 이로운 것보다 더 소중한 무언가가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 논리를 따르자면, 다른 모든 이익을 다 합친 것보다도 더 중요하고 더 이로운, 그런 궁극의 이익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닐까. (아까 빠뜨렸다고 한 그 이익 말이다.) 인간은 그 이익을 위해 필요하다면 이성, 명예, 평온, 번영 같은 모든 법칙을 기꺼이 거스를 것이다. 한마디로 그 모든 아름답고 유용한 것들을 저버리면서까지, 자신에게 가장 소중하고 근원적인 이익을 얻으려 할 것이다. --- p.54, 「제1부. 지하실. 7장.」 중에서 자, 한번 보라. 궁전 대신에 닭장이 있는데 그 상황에서 비마저 내린다면 나는 비를 피하려고 닭장에 들어갈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닭장이 있음에 고마워하며 그것을 궁전이라고 여기지는 않을 테다. 당신은 웃으며 그런 경우에는 닭장이나 저택이나 매한가지라고 말한다. 나는 대답할 것이다. “그래, 인간이 오로지 비에 젖지 않으려고 산다면야 그렇겠지.” --- p.76, 「제1부. 지하실. 10장.」 중에서 지금 눈이 내린다. 누르스름하고 탁한 진눈깨비다. 어제도 내렸고 며칠 전에도 내렸다. 저 진눈깨비를 보고 있자니 지금도 내게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 한 일화가 떠오른다. 그래, 이것이 진눈깨비에 관한 이야기가 되도록 하자. --- p.85, 「제1부. 지하실. 11장.」 중에서 당시 난 고작 스물넷이었다. 내 삶은 암울했고 반듯하지도 못했으며 야만인처럼 고독했다. 나는 어느 누구와도 어울리지 않았고 사람들과 말도 섞지 않고 점점 더 방구석에 틀어박혔다. 관청에서 아무도 쳐다보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동료들은 나를 괴짜로 생각했을 뿐 아니라 혐오스럽게 바라보는 듯했다. --- p.90, 「제2부. 진눈깨비 때문에. 1장.」 중에서 대체로 어느 시대에나 교양 있는 인간은 겁쟁이고 노예여야 한다. 지상의 모든 번듯한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자연의 법칙인 것이다. 설령 그들 가운데 누군가가 용기를 발휘했다 해도 그 일로 위안 삼거나 흥분해서는 안 된다. 어차피 그는 또 다른 누군가 앞에서는 결국 꼬리를 내리게 될 테니까. 그들에게는 그것만이 유일하고도 영원한 탈출구가 된다. 오직 당나귀들과 잡종들만이 용기를 발휘하지만 그들조차 어떤 벽 앞에서는 멈춰 선다. --- p.93, 「제2부. 진눈깨비 때문에. 1장.」 중에서 “당신이 하는 말은… 꼭 책에서 본 것 같아요.” 그녀가 말했다. 그 목소리에서 전과 같은 비웃음이 묻어나는 것만 같았다. 그 말이 날 후벼 파는 것만 같았다. 기대했던 반응이 아니었다. --- p.180, 「제2부. 진눈깨비 때문에. 6장.」 중에서 “꿈 깨, 리자. 넌 저기 어딘가 지하실 구석에서 아까 그 여자처럼 폐병으로 죽는 게 나을 거야. 그게 너에게는 행운이고 축복이지. 병원이라 했나? 데려다주면 다행이지. 여주인이 끝까지 널 필요로 한다면 어쩔 셈이지? 폐병은 그런 거야. 열병하고 달라. 마지막 순간까지 희망을 품고 자기는 건강하다고 말하거든. 그걸로 위안 삼는 거야.” --- p.186, 「제2부. 진눈깨비 때문에. 7장.」 중에서 난 오직 책에 쓰인 대로만 생각하고 상상하는 것에 익숙했다. 애초에 세상만사를 내 망상 속에서 꾸며낸 대로만 받아들이는 데 익숙했기에, 정작 현실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단번에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 이상한 일이란 다름 아닌, 리자가 그토록 내게 모욕당하고 짓밟히면서도 내 상상 이상으로 훨씬 많은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 p.219, 「제2부. 진눈깨비 때문에. 9장.」 중에서 사방은 적막했다. 보도와 텅 빈 거리에 굵은 눈송이가 소복이 쌓여 마치 양탄자를 덮은 듯했다. 행인은 없었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음울한 가로등 불빛만 헛되이 깜빡이고 있었다. 나는 교차로까지 이백 보쯤 달려가다 멈췄다. --- p.226, 「제2부. 진눈깨비 때문에. 10장.」 중에서 우리는 사산아들이다. 게다가 살아 있는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지도 이미 오래이며, 그 사실을 갈수록 마음에 들어 한다. 그 묘미를 알아가고 있는 셈이다. 우리는 머지않아 어떤 식으로든 ‘관념’에서 태어나는 방법을 고안해내리라. --- pp.230-231, 「제2부. 진눈깨비 때문에. 10장.」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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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독자에게 필요한 책!
▸ 생각은 많은데 삶은 자꾸 제자리인 사람 ▸ 알면서도 바뀌지 않는 자기 자신이 답답한 사람 ▸ 냉소, 무기력, 인정욕구가 뒤엉킨 내면을 설명하고 싶은 사람 ▸ 『지하로부터의 수기』를 읽다 1부에서 멈춘 적 있는 사람 ▸ 『죄와 벌』 이전, 도스토옙스키 문학의 원형을 만나고 싶은 사람 생각은 이렇게 많은데, 왜 내 삶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가 『지하로부터의 수기』의 주인공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가장 바쁘다. 그는 온종일 생각한다. 자신이 왜 모욕당했는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상대는 자신을 어떻게 봤는지, 다음에는 어떤 말로 이겨야 하는지 끝없이 되감고 다시 쓴다. 현실에서는 가만히 있지만 머릿속에서는 이미 수십 번 싸우고, 변명하고, 복수하고, 패배한다. 이 낯익은 인간을 도스토옙스키는 160년 전에 ‘지하인’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내놓았다. 지하인은 게으른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너무 많이 의식하는 사람이다. 무지해서 망가지는 것이 아니라 너무 많이 알고, 너무 정확히 분석하고, 너무 오래 생각하다가 끝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지하로부터의 수기』는 낡은 러시아 고전이 아니다. 오늘의 언어로 말하면, ‘자의식 과잉’에 갇힌 인간의 최초 보고서다. 자기계발서를 읽고, 심리 콘텐츠를 소비하고, 관계의 해법을 계속 검색해도 여전히 같은 자리로 돌아오는 사람들에게 이 소설은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인간은 정말 알면 바뀌는가? 인간은 정말 자신에게 이로운 것을 선택하는가? 우리는 왜 행복보다 자존심을, 사랑보다 냉소를, 변화보다 자기파괴를 선택하는가?’ 따라서 지하인의 첫 문장 “나는 병자다”는 단순한 고백이 아니다. 그것은 현대인의 자기진단이자 도발이다. 그는 자신이 병들었다는 것을 안다. 문제는 알고도 멈추지 못한다는 데 있다. ‘합리적인 인간’이라는 환상을 가장 먼저 박살 낸 소설 1849년, 스물여덟의 도스토옙스키는 총구 앞에 섰다. 사회주의 혁명 모임에 연루되어 사형을 선고받은 것이다. 집행 직전 감형되어 영하 40도의 시베리아 수용소에서 4년을 보냈고, 군 복무까지 마쳤다.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 그는 이미 다른 사람이었다. 유럽적 이상주의를 품었던 청년은 지식인층의 탁상공론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작가로 귀환했다. 죽음을 통과한 자만이 응시할 수 있는 자리, 이성의 빛이 닿지 않는 인간의 지하를 향해 펜을 들었다. 1864년, 그는 아내와 친형의 죽음을 앞두고 있었다. 죽어가는 아내 곁에서 그의 펜 끝은 『지하로부터의 수기』의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다. 지하인이 매춘부 리자를 구하려다 끝내 모욕하고 파멸시키는 장면은 그렇게 완성됐다. 현실에서는 아내가 죽어가고 있었고, 소설에서는 리자가 지하인을 떠나가고 있었다. 두 번의 이별을 살아낸 그 무게가, 근대 소설의 가장 어두운 족적으로 남았다. 19세기 러시아 지식인 사회에는 강력한 낙관이 있었다. 인간이 제대로 배우고 합리적으로 사고하면 결국 자신에게 이로운 길을 선택하리라는 믿음이었다. 사회는 더 투명해지고, 인간은 더 이성적이 되며, 세계는 더 나은 방향으로 진보하리라는 믿음이었다. 도스토옙스키는 바로 그 믿음의 한가운데에 지하인을 세웠다. 그는 묻는다. 인간이 그렇게 단순한 존재라면, 왜 우리는 우리에게 해로운 것을 알면서도 반복하는가. 왜 관계를 원하면서 관계를 망가뜨리는가. 왜 인정받고 싶으면서 먼저 타인을 경멸하는가. 왜 자유를 원하면서 스스로를 더 깊은 감옥에 가두는가. 이 질문은 21세기에 더 선명해졌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정보를 얻고, 더 많은 선택지를 갖고, 더 정교한 자기분석의 언어를 배웠다. 그러나 정보가 많아졌다고 사람이 더 자유로워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선택지가 늘수록 망설임은 깊어지고, 자기분석이 정교해질수록 행동은 늦어진다. 모든 것을 이해한 듯한데, 삶은 여전히 바뀌지 않는다. 『지하로부터의 수기』가 지금도 새롭게 읽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소설은 인간을 ‘합리적 선택을 하는 존재’로 설명하지 않는다. 인간을 모순, 수치심, 욕망, 자존심, 자기혐오가 뒤엉킨 존재로 본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도스토옙스키는 현대 심리소설과 실존주의 문학의 문을 열었다. 『죄와 벌』 이전, 도스토옙스키의 모든 주인공은 여기서 태어났다 『지하로부터의 수기』는 짧지만 도스토옙스키 문학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입구다. 여기서 처음 폭발한 자의식, 죄책감, 모욕감, 자유의 문제는 훗날 『죄와 벌』, 『백치』, 『악령』,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로 이어진다. 이성으로 살인을 정당화하는 라스콜리니코프, 신의 부재를 논리로 밀어붙이다 광기로 치닫는 이반 카라마조프, 순수함으로 세계와 충돌하는 미시킨의 그림자가 이미 이 지하실 안에 있다. 지하인은 도스토옙스키가 평생 붙들고 싸운 인간형의 원형이다. 머리로는 모든 것을 이해하지만 삶을 감당하지 못하는 인간, 사랑을 원하지만 사랑을 견디지 못하는 인간, 구원받고 싶지만 구원의 손길을 모욕하는 인간. 1부에는 사건이 거의 없다. 대화도 없다. 지하인은 주장하고, 곧 스스로 논파하고, 다시 논파당한다. 지하인은 행동하지 않고 생각한다. 살지 않고 의식한다. 지하방의 어둠 속에서도 내면은 또렷하다. 지하인을 이성으로 이해하려 할수록 더 깊은 미로로 빠져든다. 1부가 난해하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독자가 지하인의 자의식 안으로 이미 들어와 있다는 신호다. 지하인은 지상으로 나갈 때마다 머릿속에서 먼저 대본을 짠다. 자신을 파리 취급한 장교에게 소심한 복수를 가하려고 대로를 서성이고, 송별회장에서 세 시간을 버티다 혼자 남는다. 관념 속에서는 승리했지만 현실에서는 매번 무너졌다. 진눈깨비가 내리던 밤 유곽에서 만난 리자는 그의 연기를 단번에 꿰뚫었다. “당신이 하는 말은… 꼭 책에서 본 것 같아요.” 2부는 그 무너짐의 현장이다. 『지하로부터의 수기』를 읽다 많은 독자가 1부에서 멈춘다. 사건은 거의 없고, 지하인은 혼자 말하고, 반박하고, 다시 뒤집고, 스스로를 조롱한다. 그러나 바로 이 난해한 1부가 이 작품의 핵심이다. 1부는 줄거리가 아니라 의식의 미로다. 독자가 지하인을 이해하려다 길을 잃는 순간, 이미 그의 머릿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1부 없이 2부를 읽으면 소심한 남자의 실패담이 된다. 2부 없이 1부만 읽으면 관념의 유희로 끝난다. 두 부분이 맞물릴 때 비로소 질문이 완성된다. “난 사악하기는커녕 그 무엇도 될 수 없었다. 악인도 선인도, 영웅도 벌레도 될 수 없었다.” 지하인의 고백이 불편한 것은 그것이 거짓이기 때문이 아니다. 너무 정확하기 때문이다. 지하인의 이야기는 160년 전에 끝났지만, 그 질문은 지금도 우리들의 방 안에서 계속되고 있다. 이토록 난해한 1부를 끝까지 읽어야 하는 이유 뭉크는 평생 같은 인간을 반복해서 그렸다. 절망하는 인간, 사랑하면서 고통받는 인간, 타인에게 닿으려다 끝내 닿지 못하는 인간을. 지하인도 마찬가지다. 홀로 생각을 곱씹고, 타인에게 반박하고, 끝내 저 자신마저 논파한다. 뭉크가 캔버스를 반복해서 채운 것과 지하인이 독백을 반복해서 쌓는 것은 같은 충동에서 비롯된다. 자의식이 자기 자신을 먹어 들어가는 과정이다. 도스토옙스키는 그것을 언어로 파고들었고, 뭉크는 그것을 회화로 천착했다. 뭉크가 세상을 떠났을 때 테이블 위에는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이 펼쳐져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았지만, 우울과 불안으로 가득 찬 밤을 공유했다. 현대지성 클래식에서 새로 선보이는 『지하로부터의 수기』는 그 밤을 한 권 안에 담았다. 뭉크의 〈절망〉과 19세기 러시아 사실주의 화가들의 그림 여덟 장이 1부가 열리기 전 지하인의 내면을 눈으로 먼저 통과하게 한다. 뭉크가 절망과 불안을 화폭에 새겼다면, 도스토옙스키는 그것을 언어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모스크바 국립대 문학 박사 조혜경 교수의 러시아어 원전 완역에 더해, 46개의 각주가 작품의 사상적 배경과 시대 맥락을 짚어준다. 뭉크의 대표작 4점과 러시아 사실주의 명화 4점은 지하인의 불안, 고독, 수치심을 먼저 눈으로 통과하게 한다. 이 책을 읽는 일은 단지 한 고전을 통과하는 일이 아니다. 자기 안의 지하실을 처음으로 열어보는 일이다. 그래서 『지하로부터의 수기』는 불편하다. 낯설어서가 아니다. 너무 익숙하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