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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마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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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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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16년 02월 29일
쪽수, 무게, 크기 424쪽 | 564g | 140*210*30mm
ISBN13 9788959137046
ISBN10 8959137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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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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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은 너무 행복해서 겁이 날 지경이라고 로즈에게 말했다. “어떻게 이렇게 근사한 일이 있을 수 있어?” 그녀는 누가 들을 새라 조용히 속삭였지만 누가 들을까? 근처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의 말이 이렇게 강렬한 행복에는 대가가 따른다는 뜻이라는 걸 로즈는 알고 있었다.
--- p.49

릴은 톰에게 밤에 찾아오면 안 된다고 말했고, 로즈는 이안에게 릴과 함께 집에 가라고 했다. “당신이 모든 걸 망쳤어.” 이안이 로즈에게 말했다. “전부 당신 잘못이야. 그냥 그대로 살면 왜 안 되는데?” 로즈는 농담조로 말했다. “기운 내. 우리는 이제부터 기품 있는 숙녀가 될 생각이거든. 그래, 너희의 망신스러운 엄마들이 미덕의 화신이 될 거라는 이야기야. 우리는 완벽한 시어머니가 되고, 너희 아이들에게는 멋진 할머니가 되려고 해.” “당신을 용서하지 않을 거야.” 이안은 로즈에게 말했다. 그리고 톰은 릴에게, 오로지 그녀만 들을 수 있도록 목소리를 낮춰서 말했다. “나는 당신을 절대, 결코 잊지 않을 거야.”
--- p.67

버스를 타고 한 번 더 갈아탔더니 어느새 십 년 동안 그녀의 꿈속에 깃들어 있었던 집 앞에 도착했다. 이제 그녀는 열아홉, 그는 열일곱이었다. 둘은 서로가 몇 살인지 개월 단위까지 꿰고 있었다. 그는 실제보다 훨씬 나이 들어 보였고, 그건 그녀도 마찬가지여서 이제 소녀티를 벗고 세련된 아가씨가 되었다. 그가 계단을 올라갈 때 그녀는 순간을 부여잡으려는 듯 잠시 머뭇거렸다. 항상 꿈꿔왔던 키 큰 백인 소년과 이곳에 있건만, 마치 낯익은 사람이 다가오는데 막상 앞에 온 사람을 보니 그가 아니라 낯선 사람이거나, 아니면 헤어졌던 애인이 방 저쪽에 있는 걸 보고 기뻤는데 막상 고개를 돌리고 웃는 모습은 전혀 낯선 사람인, 그런 꿈 같았다. 지금 이 사람은 에드워드가 아니라 토머스였고, 문을 여는 그를 따라잡기 위해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오르는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속았다는 생각이 되풀이됐다. 그녀가 부드러운 색감과 환한 빛으로 간직했던 현관은 훨씬 작았고, 봄날 오후의 햇살은 그녀의 기억 속에서 따뜻하게 번지던 불빛과 달리 차갑기만 했다. 장밋빛 불그스름한 부드러움의 기억은 그대로 남아 바닥과 벽에 낡은 양탄자로 걸려 있었으나, 빛이 정면으로 비치는 부분은 낡아서 하얗게 드러난 실이 보였다. 꾀죄죄했다. 그래도 예쁘긴 하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돈이 많은 사람들이 새것을 살 여유가 없는 걸까? 그녀는 당장 기억 속의 방을 고스란히 마음의 저편으로 밀어버렸는데, 그 방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지금 보는 건 가짜라고 낙인찍기 위해서였다.
--- p.130

메리는 며칠이 지나 집에 돌아왔다. 자신은 돌아와서 보고 너무나 안도했던 것들, 빠듯한 세간이며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런저런 물건들을 나무라듯이 조그만 아파트를 둘러보는 아이의 차가운 시선을 빅토리아는 놓치지 않았다. 그러더니 창가에 서서 저 아래 콘크리트 풍경을 굽어보는 아이에게 뭐가 그리워서 그러냐고 굳이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메리는 얼른 달려와 엄마를 끌어안으며 재잘거렸다. “엄마는 우리 엄마이고 나는 언제나 엄마를 사랑할 거야.” 베시와 빅토리아는 씁쓸한 미소를 주고받았고, 메리는 그 일을 죄다 잊어버렸다.
--- p.176~177

그는 무엇을 손에 넣고 싶었던 걸까? 그는 무엇을 노렸던 걸까? 반도 전체를 차지하고 모든 도시를 다스리는 전제군주는 설마 아니었겠지? 도시들처럼 완벽하고 조화로운 걸 왜 파괴하려 했을까? 이유가 뭐였을까, 대체 어떤 연유였을까?
그 우울한 논의 과정 어디쯤에선가 자기 아들을 선택하는 걸 데스트라가 원하지 않았을 가능성을 따져보기도 했다. 우리는 이런 결론을 좋아하지 않았다. 우리는 자기 어머니가 창조한 모든 걸 파괴하는 괴물을 뽑아놓았다. 우리 잘못이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하는 건 고통스러웠다. 너무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우리는 그 명백한 사실을 애써 외면했다.
--- p.228~229

인도양을 지나는 삼 주 동안, 제임스는 속이 울렁거리고 몸이 욱신거리는데도 선실 벽에 등을 대고 앉아 꿈을 꾸었다…… 그건 꿈이었다. 그곳에 사는 행운아들의 머리 위로 축복 같은 구름을 토해내는 산이 있고, 정원이 딸린 크고 멋진 집이 등장하는 꿈. 그는 한 명은 검고 한 명은 흰 두 명의 젊은 여자가 꽃무늬 숄을 두르고 커다란 나무 밑에 있던 풍경, 그 풍경을 가슴에 새겼다. 그리고 대프니와 보낸 밤들과 특별한 기억 하나, 대프니가 전등 불빛을 받아 반짝이는 것처럼 보이던, 노란 머리를 흰 어깨에 드리우고 자신을 향해 팔을 내밀던 모습. 그리고 뺨을 맞대고 추던 춤. 그리고 깊은 사랑에 빠진 그들 위로 천둥 치듯 밀려와 와르르 무너지고 두드리고 빨아들이다가 아무런 상처도 남기지 않은 채 물러난 바다. 행복한 꿈. 그는 그것만 가슴에 품고 다른 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이 빌어먹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오로지 그것만 생각했다.
--- p.357

헬렌은 사랑으로 낳은 그의 아이가 지금 몇 살이냐고 물었다. 그녀가 그런 표현을 사용한 건 너그러운 처사였고, 그래서 그는 그녀에게 입을 맞춘 후 개월과 날짜까지 정확한 나이를 말해줬다. 그때까지는 한순간도 의구심을 가질 이유가 없었지만, 이건 헬렌이 받은 최초의 충격이었고 아주 심각했다. 자신이 뭔가 깊고 위험한 걸 건드렸다는 걸 그녀도 알았다. 그건 마치 꿈에서 무심코 열었다가 집을, 세계를, 풍경을, 자신이 아는 것보다 더 넓고 커다란, 더 환한, 또는 더 어두운 모습을 보게 되는 문과 같았다. 하마터면 그녀는 그 자리에서 파혼을 선언할 뻔했다. 그 말을 하는 그의 얼굴은 그녀가 그때까지 한 번도 보지 못한, 자신은 공유하지 못할 내면의 세계를 향해 고정되어 있는 얼굴이었다.
--- p.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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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마더스]를 읽는 사람이라면 ‘사랑’에 대해서 말하고 싶을 것이다. 사랑은 사랑을 하는 동안에는 말할 수 없다. 오로지 끝난 다음에만 그 사랑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 격렬한 행복, 격렬한 고통을 준 사랑은 영원한 흉터를 남기는 화상 같은 것이다. 도리스 레싱의 작품은 결코 “자기야, 우리가 만난 지 백 일이야”라는 달콤한 로맨스에 대한 것도 아니고, 인간은 오직 자기 자신만을 사랑할 수 있다는 나르시시즘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다. 사랑은 달콤함이 아니라 달콤한 고통이고 불길함이고, 나르시시즘이 아니라 나르시시즘을 파괴하는 것이다. 사랑만이 던질 수 있는 위대한 질문들이 있다. 사랑 때문에 우리는 얼마나 낮아질 수 있는가? 얼마나 위험해질 수 있는가? 얼마나 어리석어질 수 있는가? 세상의 경계를 넘어볼 수 있는가? 특히 자기 자신의 경계를 넘어가볼 수 있는가? 자아를 기진맥진하게 하는 피곤하고 격렬한 사랑 뒤에 오는 고요하고 안정된 사랑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조건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무조건적인 사랑은 과연 힘이 있는가? 도리스 레싱의 작품 안에서 우리는 이 질문들을 다 찾아볼 수 있다. 특히 맨 마지막 작품 [러브 차일드]를 눈여겨볼 것을 권하고 싶다. 우리는 매번 뜨겁게 사랑할 수 있는가? 아니면 단 한 번만 사랑할 수 있는가? 그 질문 안에서 우리는 초연한 사랑, 관대한 사랑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사랑만 할 수 있고 미워할 수는 없다. 그 초연함과 관대함에 이르기까지 우리에게는 많은 눈물과 뒷걸음질이 필요하다. 우리의 잠 못 이루는 밤에 도사리고 있는 우수 어린 꿈 같은 비밀. 그러나 잔인한 비밀, 사랑.
정혜윤 (CBS 라디오 프로듀서, 북칼럼니스트, [침대와 책]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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