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원이 딸이었던 과거를 잊지 못한 서양의 어미는 자신의 아들이 천한 백정의 이름을 갖는 걸 원치 않았다. 그녀는 조금이라도 아들에게 온전한 핏줄도 가지고 있음으로 자신의 처지와 결국 자신이 물려줄 수밖에 없었던 처지 모두를 위로하고 싶어 했다. 그런 어미 때문에 서양은 왕까지도 갖게 마련이던, 오래 살라는 의미의 천한 아명조차 가진 적이 없었다.
박서양朴瑞陽 이름은 아들에게 잘 어울렸다. 하지만 그렇게 별스런 이름을 갖게 된 뒤부터 아들은 더 이상 아들이 아니었다.
한자로 뜻을 가진 이름을 갖다니! 상서로운 태양이라니! --- p.36
언제나 칼을 들고 선 아버지의 얼굴은 당당함으로 빛났었는데 그날은 뭔가 달라도 한참 달랐다. 그 당당함은 익숙함과 노련함으로 만들어지는 것이었지, 무기를 쥐고 다른 이의 목숨을 쥐락펴락하는 자의 그것은 아니었기에 서양은 아버지가 짐승을 죽이는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그날만큼은 서양의 눈에 금음산이 꼭 처음으로 사람들이 꽉 들어찬 형장에 들어서는 도부수(망나니)처럼 보였다.
그러나 평소와 다른 일이 생길까 염려는 부질없이, 아버지는 재빨리 일을 끝냈고 반촌 집에 도착해 다리를 뻗기가 무섭게 군관과 포졸들이 들이닥쳤다. --- p.80
깊은 밤, 익숙해진 불면으로 한참을 뒤척이다가 간신히 잠이 들 무렵, 연학은 자신의 목을 움켜쥐고 세게 누르는 손길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촉촉이 젖은 목소리.
“왜지, 왜냐고 이 나쁜 놈아! 내가 너한테 뭘 잘못했지? 대원군까지도 내가 공부할 수 있다고 허락하셨는데, 니놈이 뭐라고 나를……흑……나를…….”
반쯤은 어린아이의, 또 반쯤은 남자의 그것인 목소리. 연락은 작년 이맘때쯤 자신의 목소리가 꼭 그것과 같았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목을 조르는 손이 주인의 신분답지 않게 섬세하다고 느꼈다. --- p.144
막 수술실로 들어와 선 알렌의 의아한 눈이 서양의 멍한 얼굴과 떨리는 것을 막아보려 마주 쥔 손을 훑어 내렸다.
“예, 닥터 알렌. 괜찮고말고요.”
서양은 천천히 환자의 얼굴위로 구멍이 뚫린 깔때기를 얹었고, 그 위에 헝겊을 얹어 클로로포름을 조심스럽게 떨어뜨렸다. 조금만 기다리면 곧 환자가 클로로포름 기체를 들이마시고 마취가 이루어질 것이다.
나는 잘할 수 있어. 정말로 잘할 수 있어. --- p.205
“제왕절개(cesarean section)라는 게 있어.”
서양도 알고 있었다. 로마라는 나라의 유명한 장군이었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라는 사람이 복벽절개를 통해서 태어났기 때문에 유래되었다는 그 이름, 제왕절개.
“하지만 제왕절개를 하면 달이랑 아기는 죽잖아요.”
“제왕절개를 하든 안 하든 달이는 죽을 거야. 그치만 아기는 살릴 수 있을지도 몰라.”
자신 있는 어조로 말했으면서도 헤론의 떨리는 손은 좀처럼 가라안지 못했고, 헤론은 다른 손으로 수술칼을 쥔 손을 덥석 잡아 떨림을 세우며 큰소리로 말했다.
“나는 뛰어난 의사야!”
헤론의 외침은 다른 누구더라 들으라는 것이 아닌 자기 자신을 다잡는 다짐이었다. 뛰어난 의사인 헤론이 그런 다짐을 필요로 하는 것만큼 복부수술은 잘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일단 배를 가르면 감염으로 인해 죽는 것이 복부수술의 끝이었다. 팔다리를 절단하는 수술이나 종기를 째는 시술 또한 감염으로부터 결코 안전하지 못했지만 복부수술만큼은 아니었다.
복부를 가르는 순간, 의사는 자신이 환자를 죽였다는 것을 뼛속 깊이 깨닫지 않고는 안 되었으니 헤론의 망설임은 충분히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어미와 같이 죽을 수도 있을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는 몹시 유혹적인 것이라 헤론은 칼에서 손을 놓지 못했다.
헤론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세게 깨물고는 칼을 뻗었다. 잘 벼려진 칼이 달이의 거대한 배를 갈랐고, 그런데도 달이는 죽은 듯 정신을 차리지 않았다. --- p.219
지난해(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고 급속이 번져가는 전쟁을 제어할 힘이 없었던 조선은 청나라에 군사를 요청했다. 청나라가 출병하면 자신들도 출병하기로 약속했던 조약을 빌미로 일본은 조선에 군사를 파견했지만 동학군이 자진 해산하면서 조선에 주둔할 명분이 없어졌는데도 일본은 철수하지 않았고, 7월 23일 경복궁을 점령했는데 이것이 신분제를 사라지게 한 조선 개혁의 씁쓸한 시작이었다.
이런 식으로 강제적으로 이루어진 고국의 개혁을 기뻐하는 내가 부끄럽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신분제가 사라졌다니, 더 이상 양반이 없고 백정이 없다니. 대체 누가 나더러 감격해하지 말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빨리 돌아오고 싶었지만, 경복궁 점령 이후 곧 청일전쟁이 발발한 터라 때를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 p.262
박서양이 만주로 떠났습니다. 저도 곧 간도로 떠날 것이고 다른 제국익문사(1902년 6월 고종이 설립한 국가 정보기관)의 일원들도 각자의 자리에서 조선의 독립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거기 계십니까, 폐하. 거기서 저희 보고를 듣고 계십니까?
오늘 백성들이 일어나 만세를 부르고 있습니다. 폐하께 올리는 신 김범석의 제국익문사 보고서는 여기서 끝나지만 저희의 활동은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 p.3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