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11년 05월 1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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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453쪽 | 674g | 153*224*30mm |
ISBN13 | 9788936472061 |
ISBN10 | 8936472062 |
발행일 | 2011년 05월 1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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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453쪽 | 674g | 153*224*30mm |
ISBN13 | 9788936472061 |
ISBN10 | 8936472062 |
서문 인생도처유상수 경복궁 1 경복과 근정의 참뜻을 새기면서 경복궁과 자금성 / 자리앉음새 / 경복궁의 뜻 / 창건과정 / 근정전 / 근정전의 뜻 / 월대의 석견 / 박석 / 강화도 박석광산 경복궁 2 아미산 꽃동산엔 십장생 굴뚝을 세우고 35 영제교의 천록 / 사정전·강녕전·교태전 / 양의문 굴뚝 / 아미산 화계 / 자경전 꽃담장 / 태원전 / 빈전 / 궁궐의 우리 나무 경복궁 3 경복궁 건축의 꽃, 경회루와 건청궁 경회루의 물길 / 박자청 / 경회루의 뜻 / 국제연회장으로서 경회루 / 건청궁 / 향원정 / 집옥재 / 건청궁의 근대건축 / 춘양목 경복궁 4 광화문에 새겨진 영욕의 이력서 광화문광장 / 아! 광화문이여 / 야나기 무네요시 / 콘크리트 복원 / 광화문 현판 / 설치미술로서 가림막 / 이방인이 기록한 광화문 복원 순천 선암사 1 산사의 미학?깊은 산, 깊은 절 산사의 모범답안 / 제1회 광주비엔날레 / 정직한 관객 / 한국의 들과 산 / 진입로 / 승선교와 강선루 / 삼인당 / 깊은 산, 깊은 절 순천 선암사 2 365일 꽃이 지지 않는 옛 가람 선암사의 사계절 / 승탑밭 / 태고종과 조계종 / 장승과 석주 / 선암사 경내 / 무우전 / 선암사 매화 / 뒷간 / 선암사의 시 달성 도동서원 도(道)가 마침내 동쪽으로 오기까지 시각장애인 답사 / 다람재 / 은행나무 / 김굉필 / 도동서원 석축 / 수월루 / 석단의 조각들 / 사당안 벽화 / 점필재와 한훤당 거창·합천 1 정자 고을 거창의 코스모스 길 거창의 이미지 / 가조 휴게소 / 건계정 / 외래 귀화인의 성씨 / 코스모스를 생각한다 / 거창의 정자들 / 황산마을의 거창신씨 / 수승대 거창·합천 2 종가의 자랑과 맏며느리의 숙명 동계고택 / 종가집 맏며느리 간담회 / 모리재 / 초계 정씨 / 거창의 인문정신 / 신원리 가는 길 / 거창양민학살 / 명예회복과 추모공원 거창·합천 3 쌍사자석등은 황매산을 떠받들고 영암사터 가는 길 / 단계마을 돌담길 / 황매산 / 화강암 예찬 / 쌍사자석등 / 무지개 다리와 석축 / 두 마리 돌거북 / 합천 촌부의 회상 부여·논산·보령 1 내 고향 부여 이야기 5도2촌 / 제3의 고향 부여 / 외산면 소재지 / 휴휴당 / 반교리 청년회원 / 반교리 돌담길 / 무량사 사하촌 / 만수산 산나물 / 마늘쫑 부여·논산·보령 2 그 많던 관아는 다 어디로 갔나 백마강 전설 / 왕흥사 사리함 / 송국리 청동기유적 / 홍산현 / 홍산관아 / 홍산 문루기 / 홍산의 근대건축 / 홍산장 / 지게의 회상 부여·논산·보령 3 백제의 여운은 그렇게 남아 있고 충청도 기질 / 장하리 석탑 / 가림성 옛 보루 / 대조사 석불 / 복실이와 해탈이 / 산딸나무 / 관촉사 해탈문 / 은진미륵 / 관촉사 여록 부여·논산·보령 4 바람도 돌도 나무도 산수문전 같단다 무량사 / 오층석탑 / 청한당 / 율곡의 김시습전 / 동봉의 여섯 노래 / 성주사터 / 낭혜화상비 / 최치원의 화려체 / 강승의 편지 부록 답사 일정표와 안내지도 |
인생도처유상수人生到處有相上手
세상의 곳곳에 나보다 나은 이들이 있으니 항상 삼가고 조심해서 겸손하고 경거망동하지 말라.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3권 말하지 않는 것과의 대화에서 우리나라의 전통건축 대한 짧은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6권에서는 보다 더 깊게 본격적으로 건축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1권의 답사기부터 시작되어진 문화유산의 답사기의 완결이 건축이라는 것은 또 다른 의미가 있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한 시대, 한 민족의 문화는 건축이라는 나무에 미술이라는 꽃으로 남게 되는데 그 시대의 경제, 정치 군사, 인물,사상, 문학은 모두 땅속에 묻혀 있는 뿌리이며, 보이지 않는 무성한 잎이 그 시대 사람이 살던 민속이다. 그러니까 답사란 결국 건축을 보면서 한 시대를 읽어내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건축은 답사의 몸통인 셈이다. 그렇게 보게되는 건축이야기의 가장 으뜸인 문화유산은 바로 경복궁이 되는 것이다. 3권의 경주문화답사에서 보여준 한국건축의 미는 바로 자연석과 인공석의 조화였다. 불국사의 석축을 다양한 벽화와 계단의 설치로 긴 석축이 지루해보이지 않고 자연석 위에 인공석이 올라앉아 조화로운 모습에서 자연석의 초석을 깍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얹을 장대석을 자연석에 맞추어 깍은 기법은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기법이다. 6권 경복궁에서도 이런 자연과 인공의 조화를 볼 수 있게 되는데 그 조화로움이 가히 환상적이다.
경복궁의 이름은 정도전이 『시경』에 나오는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만년 그대의 큰 복을 도우리라”에서 큰 복을 빈다는 뜻의 ‘경복(景福)’이라는 두 글자를 따서 지은 것이다. 1412년 태종은 경복궁의 연못을 크게 넓히고 섬 위에 경회루를 만들었다. 이 곳에서 임금과 신하가 모여 잔치를 하거나 외국에서 오는 사신을 대접하도록 하였으며, 연못을 크게 만들면서 파낸 흙으로는 아미산이라는 동산을 만들었다.
경복궁의 진정한 의미는 외형적으로는 건축의 아름다움, 내면적으로는 조선왕조의 법궁이라는 역사적 가치이다. 흥성대원군이 법궁을 복원한 것은 실추해가는 왕조의 권위를 되찾기 위함이었다고 한다면 우리 시대 경복궁 복원의 이유는 첫째는 경복궁이 상징적, 정신적인 가치인 우리민족의 법통法統이기 때문이며 둘째는 왕조의 역사를 갖고 있는 나라에 왕궁이 남아있지 않으면 말할 수 없이 큰 상실감을 일으키며 왕궁은 그 민족, 그 나라의 역사적, 문화적 정통성에 대한 확인이자 상징이기 때문이다. 상처받은 문화유산을 복원하는 것은 후손된자의 임무이며 그 임무를 다함으로써 우리의 과거와 미래가 밝게 드러난다. 경복궁을 더 아름답고 원형에 가깝게 복원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지금의 경복궁은 고종 당시 500여 동의 25퍼센트 수준이다.
모든 나라의 왕궁 앞에는 그 나라를 상징하는 광장이 있다. 광장은 도시의 심장이고, 거리는 동맥이며 골목길은 실핏줄이다. 이것이 살아숨쉬는 도시공간의 구조다. -121
오욕의 근대사를 가지고 있기에 문화유산들 또한 오욕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불국사, 석굴암, 경복궁, 광화문 또한 그렇게 오욕의 역사가 세월이 흐르면서 상처는 치유되었어도 남겨진 상흔은 가슴 아픈 흔적이 되었고, 되돌아보고 싶지않은 기억이지만 다시는 되풀이 되어서는 안될 역사의 현장이기에 광화문은 복원되었다. 그러나 이 광화문 복원을 역사적 증언이자 인류학적 기록으로 남긴 학자는 다름아닌 외국인 하우드 리드이다. 하워드 리드는 광화문 복원이 갖는 의미를 한국적인 시각이 아니라 인류문명사의 측면에서 보고 있다고 한다. 그처럼 광화문의 복원은 우리나라 역사적 중요성 뿐만아니라 전인류에 문화유산 복원의 의미를 새롭게 깨닫게 해주는 각성의 의미이기도 하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전권에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일본인이 하나 있다. 식민지시대에 유일하게 조선인이 학살 되고 문화가 파괴되는 것에 분노한 야나기이다. 야나기는 민예운동의 창시자로서 일본 근대지성의 한 분이다. 그동안 답사기를 읽으면서 등장하곤 하였던 이름인데 6권에서는 야나기에 대하여 비교적 상세한 이력을 볼 수 있게 되었는데 2권 부석사에서 선묘의 이야기를 통해 지나치게 애향심, 애국심이 강한 우리 민족의 특성으로 인해 이민족에게는 대단히 배타적인 문화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었는데 야나기가 조선의 아름다움에 대한 존경을 몸으로 실천한 것이 인정이 되어 1984년 9월에 '보관문화훈장'을 추서한 사실은 우리의 문화역시 과거 배타적인 모습에서 변화하고 있구나 하는 감동이 느껴졌다.
저자의 제 2의 고향은 부여이지만 나의 제 2의 고향은 거창이다. 서울에서 좋은 직장에 높은 연봉으로 부족함이 없던 내가 남편이 고향에서 살고 싶다고 했을 때 아무 말 없이 거창에 내려온 이유는 아이들의 교육때문이다. 도시사람들은 이런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거창지역의 특성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수긍을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읽으면서 놀라웠던 것은 동네에 살고 있는 사람보다도 토박이만 알수 있는 지역의 특성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3권에서는 경상도 사람의 특성에 대해서 너무 잘 알고 있어서 놀라웠는데 이번엔 거창에 대해 너무 많이 알고 있어서 놀라웠다. 거창이 세상사람들에게 신비한 고장으로 인식되고 있는 이유는 다름아닌 높은 일류대학 진학률 때문이다. 도대체 어떻게 교육하기에 대도시의 명문들을 제치고 그런 교육성과와 높은 진학률을 내는지를 모두 신기해하고 궁금해한다. 나도 처음에 그 부분이 신기했는데 십년 살아보니 거창사람들의 생활하는 모습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것은 거창사람들의 인문정신이었으며 인문정신이 거의 생활 속에 스며들어 있다는 것이 정답이었다. 저자는 거창이 내세울 수 있는 가장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은 계곡가의 정자라고 하는데 처음으로 거창에 정자가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내가 사는 곳 상림리에 한 쪽 구석탱이에 있던 정자가 침류정이란 사실을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아 ~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인다는 말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정자를 두고 저자는 우리나라 산천의 꽃이라 표현한다. 정자하나 있음으로 해서 그 땅의 가치가 완전히 달라진다는 것이다. 또한 이런 건축공간은 우리의 독특한 자연 속에서 탄생한 한국의 표정이다. 한국의 전통건축은 단순한 건축이 아니라 그 자체가 자연이고 또 하나의 풍경이다. 그리고 한국의 문화유산들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움의 상징이라는 사실과 응달에서 멍든 문화유산의 상처를 치유하며 우리 문화의 정체성을 일깨워주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는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한국인의 인문서이자 필독서이다. 우리의 과거와 미래를 밝게 하는 일은 이렇게 잠들어 있는 문화유산을 깨우는 것이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통해 우리나라의 문화유산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깨닫는 것이 이 시대 우리민족의 제 1순위인 과제이다.
우리 산하에 대한 기억이 아스라하다. 해마다 한국행을 할 수도 없지만 가더라도 시간의 압박에 쫓기듯 지내다보니 마음처럼 어느 한 곳에 느긋하게 자리를 잡고 앉아 있던 적이 없었다. 그러던 차 4년 전 어느 봄날 아마도 3월이었을거다. 한국행을 결정하고 아이들과 나는 문화,역사탐방를 시도했었다. 경북 영주 소백산자락에 자리잡은 부석사를 기점으로 경주 불국사에서의 하룻밤, 석굴암, 산처럼 둥그런 왕릉들, 첨성대, 안압지, 성덕대왕 신종이 있는 박물관등 대여섯번 왔다 간 자리였지만 아이들에게는 생경하고도 낯선 그럼에도 마음에 깊이 남는 여행의 한 순간이었다.
언젠가 김은사지 쌍둥이 탑을 보러 나선 적도 있었다. 폐허처럼 남겨진 절터에 우뚯 솟은 탑 두기가 무척 인상적이었는데 이는 감은사지의 은근하고도 제대로 된 매력을 엿볼 수 있게 해준 유 홍준님의 답사기덕분이었다. 그뿐이던가. 부안 내소사 진입로 양쪽에 푸르른 소나무 숲길을 거쳐 대웅전 문살의 섬세한 아름다움을 눈으로 만지러 일부러 움직였던 적도 있었다. 다산을 만나러 강진에도 갔었고 남도의 알프스라고 불리는 해남의 풍광에 취하고 싱그러운 녹음에 취해 앞으로 가장 사랑해야 할 색은 초록이어야한다고 결심도 했었다. 고창 선운사는 말해 뭐하나. 문학의 소재로도 한없이 언급되는 곳 아닌가. 이제껏 찾아갔던 기억속에 남아 있는 우리 문화유산의 공간들이 지금은 무척이나 아스라하다. 이럴 때는 다시 움직여줘야 하는데 그러기엔 나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어서 안타까움만 더한다.
중국 북경의 자금성엘 갔다. 십수년이 넘은 일이다 보니 이 기억의 진위도 찾아내기 참 힘겹다. 정확히 기억하는 것은 무척 크고 넓은 공간에 땡볕처럼 내리쬐는 따가운 햇살을 피할 곳은 그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처음 보면 입이 안다물어지는 곳이다. 이 부분에서 우리의 경복궁이 왜 생각나지 않겠는가. 유 홍준님의 답사기 6편에서는 우리의 문화유산을 바라보는 마음이 이중성을 띄고 있다고 했지만 나도 그 중 한 사람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자금성에 대한 정확한 정보와 역사적 이야기를 알고 있지도 않았지만 우리의 궁궐인 경복궁은 고사하고 경운궁(현재의 덕수궁), 창덕궁, 창경궁의 창대한 이야기를 우리는 알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번 기회에 어느 정도 깨달았으니 조금은 다행스럽다.
개인적으로 경복궁을 보고 온 지도 꽤 오래되었다. 지금은 광화문 복원공사가 완료되어 육조거리를 다듬은 광장과 궁궐 본연의 고매한 모습으로 자리를 잡았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공사전에 들렀다 왔기에 그 기억이 사진으로도 남아있어 봄꽃과 더불어 꽃샘추위가 한창이던 그 때의 궁궐을 내 기억속에서 끄집어내기도 했다.
궁궐 연회장으로 활용했던 연못에 비친 경회루의 모습도 눈에 선하다. 국악의 향연이나 품격있는 연주회등이 이런 장소에서 이루어진다면 좋겠다. 아울러 사람이 들고 나야 건축물은 살아 움직인다고 한다. 자주 활용하고 바닥은 밟아주고 만져줘야 오래도록 보존이 가능하다. 근거없는 출입금지나 잔디보존으로 못들어감등의 문구는 그만 철회해주었으면 한다. 조선조 고택이나 박물관 주변을 꾸며 놓은 잔디위에 해골바가지와 함께 농약쳐서 못들어감이라는 강압적인 문구를 보고 기겁을 했던 적이 있어서 이 책의 그 부분을 읽는 동안 웃음을 금치 못했다.
산사의 미학이라고 명칭한 순천 선암사의 고즈넉한 다리인 승선교를 사진으로 만나는 순간 만추로 물들어가던 젊은 날의 애상이 겹치고 이 책은 분명 여행서가 아님에도 등산화 신고 산사의 그 길을 걷고 싶은 충동마저 일었다. 지금은 다 져버려서 사라지고 없겠지만 이른 봄 약동하는 생명의 서막같은 매화의 첫터트림을, 길을 걷다 바람결에 은근하게 섞여드는 매화향을 맡고 싶다. 기억이란 사랑보다 더 슬프다는 노랫가사가 이 부분에서 극적으로 생각난다. 내게 기억이란 그토록 사무치는 일이 되어간다.
선암사에서 산채비빔밥을 드셨다길래 산채는 아니지만 봄야채를 곁들여 비빔밥을 섞어먹으며 단조로운 한낮의 졸음도 물리치고 범벅이 된 내 기억을 정돈해보았다. 아! 음식이란(짝퉁이지만) 기억을 생생하게 한다.
제1회 광주 비엔날레 개막전후의 에피소드와 대상을 수상한 설치작품-인생이란 맥주병 위에 떠 있는 편편조각 빈 조각배-와 같은 것이라는 해석이 그 이후 한참이나 시간이 지나 젊음은 더 이상 내것이 아닌 게 되버린 지금에서야 피부에 절절이 와닿는다. 무상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거창하면 거창사과와 학습의욕이 샘솟는 동네로 알고 있다. 그 동네의 가슴아픈 학살이란 생각하기 싫은 아픈 역사이지만 천재들의 공간이라는 소문은 익히 들어왔기에 동네이름만 들어도 아니 열심히 발로 움직이던 시절에 두어번 만난 학부형들의 학습시기 아이들에 대한 차분하고 합리적이며 긍정적인 태도는 무척 인상적이었다. 이래서 국내 최고의 진학률을 자랑하는구나 생각했었던 기억들.
이 책의 표지에도 등장하는 엉덩이를 치켜올린 쌍사자석등의 해학적이면서도 전체적인 우아함이 주변 황매산을 떠받들며 자연이 만든 디자인과의 조화를 확연히 보여준다. 저자도 한없이 예찬한 보석이다. 인간의 예술성을 자연이 보듬은 형상이라는 표현이 적절할 만큼 사진에서 눈을 떼기 힘들게 만든다. 게다가 저자의 문체에 한꺼풀 빠져들고 그 곳에 한번은 꼭 가야지, 가서 나의 또다른 기억들을 만들어서 내 마음창고에 보관해놔야지하는 결심을 세우게 한다.
저자의 제2의 고향이 된 부여에서의 새로운 삶은 동경해 마지않은 부분이었다. 그 동네에 어울리는 돌담을 쌓고 그 동네 사람이 되고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찬란했던 백제문화를 되새기고 미처 알지 못했던 백제권에 대한 고증과 잘못된 인식의 회복까지, 참으로 백제문화를 이 답사기의 한 부분을 통해서나마 제대로 알리고 싶은 의지가 보였다. 내심 나도 인생의 황혼기를 -이와 같지는 않겠지만- 자연과 문화를 바라볼 수 있는 곳에서 보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소백산 자락에 터를 잡고 맑은 공기와 깊은 산이 있는 곳에서, 내 마음의 창고에서 한 기억을 끄집어내며 흙을 밟으며 근본있는 우리 문화의 깊이를 느끼며 살고 싶다.
나에겐 꿈이 하나 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우리 국토를 구석구석 한번 둘러보고 싶다. 걸어서 할수 있다면 금상첨화 일 텐데, 자꾸 세월만 보내고 있다 보니, 그것은 말 그대로 꿈에 그칠지도 모른다. 매년 연초가 되면 일단 시작부터 해보자고 지도를 꺼내놓고, 각 지방을 둘러보지만 역시나 마음뿐이다. 그 단초가 되었던 것이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였고, 거기에 부채질 한 것이 김훈의 [자전거 여행] 이었다. 그 책들을 보면서 의외로 내가 가본 곳이 적다는 걸 알게 되고, 우리 국토가 아름답다는 것을 느낀다.
예전에도 마찬가지였지만,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읽으면 마음이 편해진다. 그저 눈길 가는 대로 책장을 넘기면서 읽으면 되기 때문이다. 힘들여 정독하거나, 곰곰이 생각해야 할 것 없이 저자의 발길을 따라 나도 그가 인도하는 대로 가기만 하면 된다. 우리국토 곳곳에 널려있는 문화유산을 보면서, 예전에 학교 다닐 때 배운 것이 있다면 그 기억을 떠올려보고, 내가 처음 알게 된 것이라면, 얼마 동안 기억할지 모르지만 머릿속에 담아 놓는다. 언젠가 그곳에 갔을 때, 저자가 말한 것과 내가 느낀 것의 차이를 알게 되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인생도처유상수(人生到處有上手), 저자는 문화유산을 답사하면서 삶의 도처에 숨어있는 고수들을 만나고, 그들을 통해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 즐거움을 말하고 있다. 나는 그가 답사한 곳을 눈으로 좇으며 덩달아 깨달음을 얻는다. 발로써 가보지 못한 곳들을, 독서로 가보고 있는 중이다.
저자가 6권에서 소개하는 곳 중, 달성, 거창, 합천과 부여, 논산, 고령은 슬쩍 지나가 본 적이 있다. 다른 곳에 볼 일을 보러 가다가, 그곳에서 점심을 먹는다든지, 아니면 근처에서 일을 보기 위해 방문했던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때는 미처 생각하지도 못했던 유적지를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된다. 하긴 우리나라 어디를 가던지 문화유산이 없는 곳이 없지만 말이다. 순천 선암사는 몇 번 가본적이 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저자의 설명을 대하고 보니, 내가 그저 겉만 보고 왔다는 생각이 든다. 다음에 갈 기회가 생긴다면 저자가 답사한 내용을 하나하나 살펴보고 싶다.
그러나 이 책에서 가장 재미있게 본 것은 경복궁에 대한 부분이었다. 주위에 있기 때문에, 토요일이나 일요일, 마음만 먹으면 가볼 수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단지 왕이 살던 궁이라고만 알고 있었던 나에게, 저자는 궁의 역사를 이야기 해준다. 그래서일까? 궁에 대해서 내가 알지 못했던 부분을 알고 나니 새삼스레 다시 한번 가보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우리의 문화의식 속에는 이중적인 면이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우리는 유구한 역사와 찬란한 문화의식을 갖고 있다는 민족적, 애국적 자부심이 강한 반면, 이집트, 그리스, 중국의 거대문화유산과 비교하여 독창성이 없고, 작고, 초라하다는 느낌을 갖는 것이 그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한국 문화재에 대한 객관적 가치를 마음속에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며, 따라서 우리 나름의 고유한 문화와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는 확고한 문화의식이 필요하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경복궁은 흔히 자금성과 비유되지만 역사적으로 볼때, 경복궁이 25년먼저 지어졌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자금성의 장대함을 이야기하지만 자금성이 5문3조인데 반하여, 경복궁은 3문3조라고 한다. 이것은 당시 동아시아 질서의 산물이었기에 당시로써는 어쩔수 없는일 이었을게다. 3문은 길밖에서 근정전에 이르기까지 거쳐야하는 문으로 광화문, 홍례문, 근정문을 말하며, 3조는 외조, 치조, 연조를 가리킨다. 외조는 외국사신을 맞이하고 문무백관이 조회하는 근정전권역을 말하며, 치조는 편전이라고도 부르며, 정무를 보는 사정전권역, 그리고 연조는 왕과 왕비의 생활공간인 강녕전, 교태전, 자경전을 말한다.
경복궁은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가 개성에서 도읍을 옮기는 장소로 지금의 경복궁터를 지정하여, 궁을 세움으로써 조선의 법궁이 되었으며, 경복이라는 이름은 시경의 시구에서 따 왔다고 한다. 14만평의 경복궁에는 수많은 전각들이 있으며, 각각의 전각마다 다 사연이 있음을 알고,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경복궁을 그렇게 드나들면서도 알지 못했다는 것이 새삼스레 부끄러워 진다.
조선왕조의 법궁으로써 조선 통치의 최상층 부에 위치하던 경복궁은 임진왜란때 전소되어 폐허로 있게 된다. 그러다가 고종2년 흥선대원군의 중건공사로 복원되었으나, 1910년 한일합방후 일제는 계획적으로 경복궁을 훼철하기 시작하였으며, 그때 대부분의 건물이 헐린다. 문민정부때 처음 복원계획이 세워지고, 마침내 2010년 경복궁 1차 복원정비사업의 완료로 89채의 건물이 복원되어, 일제의 철거를 피한 36동을 포함하여 총 125개동이 되었지만, 고종5년 당시 500여동에 비하면 25% 수준의 복원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경복궁의 복원은 2번에 걸쳐 이루어졌다. 흥선대원군이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된 법궁을 복원한 것은 실추해가는 왕조의 권위를 되찾기 위한 것 이었다면, 일제시대 훼철된 경복궁을 우리시대 복원하는 것은, 일제가 훼철한 그 궁이 역사적, 문화적 정통성에 대한 확인이자 상징이기 때문이라는 저자의 말이 가슴을 울린다. 그런데 어찌하여 2번의 훼손이 다 일본과 관련되어 있는지..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가 정동에 있었다. 매일 학교가 끝나고 집에 갈 때쯤이면 덕수궁 돌담길을 어슬렁거리며 걸어 나와 광화문에서 차를 탄다. 그 덕분에 광화문 일대를 퍽이나 쏘다녔다. 덕수궁, 경복궁을 안마당처럼 드나들었다는 기억이다. 대학교 다닐 때 잠시 뜸했지만, 사회생활을 하면서 또 다시 회사가 시청 앞에 있었다. 학교 다닐 때처럼 자주 가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토요일 오후 하릴없을 때 그곳에서 시간을 때웠던 기억이 있다. 그러고 보니 경복궁 복원공사가 끝나고서는 한번도 가보지 못한 것 같다. 아마 지금의 경복궁은 내가 알고 있는 경복궁이 아닐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우리주위에 있는 문화유산들을, 우리는 아무런 생각 없이 보아 넘긴다. 마치 애초부터, 당연히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이제부터라도 관심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해 보지만, 얼마나 갈지는 나 자신도 잘 모르겠다. 그나저나 언제 여행을, 아니 답사를 떠날 수가 있을는지.. 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