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18년 06월 20일 |
---|---|
판형 | 양장? |
쪽수, 무게, 크기 | 520쪽 | 538g | 125*190*35mm |
ISBN13 | 9788937437564 |
ISBN10 | 8937437562 |
발행일 | 2018년 06월 2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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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형 | 양장? |
쪽수, 무게, 크기 | 520쪽 | 538g | 125*190*35mm |
ISBN13 | 9788937437564 |
ISBN10 | 8937437562 |
1부 가벼움과 무거움 7 2부 영혼과 육체 67 3부 이해받지 못한 말들 139 4부 영혼과 육체 213 5부 가벼움과 무거움 287 6부 대장정 393 7부 카레닌의 미소 463 |
같은 책을 반복해서 잘 읽지 않는 편이다. 읽고자 해도 새로운 읽고 싶은 책들이 너무 많아 항상 미루게 된다. 이 책도 임신동안 침대 감옥살이 하던 시기에 읽었다. 내 상태가 좋지 않았던 탓에, 제대로 집중하고 읽지 못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명작’을 그렇게까지 평가절하할 순 없다. 그 때 읽은 이미지 때문에 항상 이 책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이번에 완전 뒤집었다. 요즘 서평단 신청은 제한적으로 하고 있는데, 이 책은 당연히 선정 안 되겠지라는 생각으로 무의식적인 이끌림으로 신청했다. 무슨 생각이었을까, 이것이 이 책에서 말하는 우연의 우연이 내 어깨에 앉아 사고의 확장을 이끌어 준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전에 읽었을 때와 가장 차이점은 물론 나의 책에 대한 태도이다. 꽤나 지루하게 읽었던 것 같은데, 이번에는 읽으면서 너무 재밌어서 손에서 놓을 수 없을 정도였다. 이렇게 재밌는 책이었다니!! 이렇게 흥미진진했다니!! 읽으면서 놀라기도 하면서 점점 책장을 넘기는 손에 가속도가 붙었다. 인물들 각각이 너무 다양하고 새로워서 더 재미있었다. 결코 내가 살아볼 수 없는 인생들에 몰입하게 되었다.
다른 한가지는 내가 지금 이 책을 읽기 전에 다양한 책들을 읽었다는 거다. 특히 이 책은 밀란 쿤데라의 철학적인 사유가 가득 담겨 있는데 그가 이야기 하는 니체와 데카르트의 철학 이야기 그리고 베토벤의 이야기를 미리 알고 있어서 내용 흐름이 깨지지 않았다. 아마 이 때문에 처음 읽었을 때 어려워하고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토마시의 바람둥이 기질에만 집중했던 것 같다. 표면적인 내용에만 집중했던 것이다. 특히 영원회귀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무거움과 가벼움에 대해 생각해봤다.
● 영원한 회귀라는 사상은 세상사를 우리가 아는 그대로 보지 않게 해주는 시점을 일컫는 것. (p. 10)
● 세상사는 세상사가 덧없는 것이라는 정상참작을 배제한 상태에서 우리에게 나타난다. (p.10)
● 사라지고 말 덧없는 것을 비난할 수 있을까? (p. 10)
● 영원한 회귀의 세상에서는 몸짓 하나하나가 견딜 수 없는 책임의 짐을 떠맡는다. (p. 12)
무겁다. 그리고 가볍다. 인생이 무거워지면서도 가벼워진다. 한없이 가벼워지다가 갑자기 쿵! 하고 내 어깨 위로 떨어지는 듯 하다. 그리고 그 가벼움과 무거움을 인물들을 통해 다양하게 보여준다. 가벼움의 사비나, 무거움의 프란츠, 가벼움과 무거움의 토마시. 그리고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테레자. 내 기준에서 나눈 그들의 무게는 큰 의미로 다가온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인생의, 목표로 했던 사비나. 그녀는 무거움의 기(아버지)에 질려 가벼움을 추구한 것 아닐까? 인생 내도록 자신의 의사 없이 그저 학문적인 면에서 만족하며 무거움을 추구했던 프란체는 가벼움을 알게 되어 날아가고자 했다. 가벼움을 만끽하고, 그 가벼움(사비나)을 종교처럼 숭배하다가 가벼움으로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렸다. 심지어 자신이 사랑했던 여자(사비나일까? 안경 쓴 어린 여자일까? 사비나는 종교에 가까우니 후자 쪽일지도.)를 보지도 못하고 말이다. 가벼움을 추구하다 그렇게 떠난 그는 어쩌면 만족할 지도 모르겠다. 한 없이 자신의 정사에서 가벼웠던 토마시는 테레자를 알고 무거움을 알게 된다. 저자는 사랑을 한 없이 가벼운 것으로 이야기 하지만, 테레자에게 가볍지 않았던 사랑은 토마시에게도 무거움을 선사해준 듯 하다. 그들의 사랑은 무거웠다. 몹시도.
● 테레자의 약함은 그가 더이상 강하지 않아 그녀 품에서 토끼로 변할 때까지 매번 그에게 타협을 강요했던 공격적인 약함이었다. (p. 511)
신분상승을 원했던 테레자는 결국 신분하락으로 토마시를 끌고 내려왔다. 테레자를 사랑하는 토마시에게는 항상 선택권이 없었다. 테레자의 옆에 있고자 했을 뿐이고, 그 방식에 있어서 그 자리에 있어서 불안이 없었다. 토마시의 말대로 휴가가 필요하다며 테레자와 함께 시골행을 결정하는 것처럼 항상 타협했다. 그녀와 함께 있기 위해 타협을 했다. 결국 테레자는 온전히 토마시와 함께 하는 데 성공하게 된다. 하지만 이것이 테레자의 잘못인가? 그녀 스스로가 그녀를 비난하지 않았으면 한다. 무거움이 가벼움을 누를 수 밖에 없는 원리 아닐까? 무겁지도 가볍지도 못했던 그녀는 무거움의 이점을 통해 가벼움을 무겁게 만들 수 있었던 것 뿐이다. 그렇게 그녀는 ‘살아 있고자’ 했을 뿐이다.
이 책의 구성이 참 특이하다. 중간 중간 ‘나’라는 인물이 등장하기에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등장인물이 더 있었나 했다. ‘나’는 저자였다. 저자가 직접 소설 중간에 말을 걸고, 자신의 이야기를 전하고, 등장 인물에 대해 독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듯하다.
● 소설은 작가의 고백이 아니라 함정으로 변한 이 세계에서 인간 삶을 찾아 탐사하는 것이다. (p. 362)
저자는 자신의 고민과 생각을 독자들과 나누고 싶었다. 이런 태도는 내가 더욱더 이 책에 몰입하고, 저자와 함께 등장인물을 관찰하면서 나만의 생각의 궁전을 구축하도록 만들었다. 밀란 쿤데라는 그저 자신이 전하고 싶은 세계관을 풀어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대화를 나누고 싶은 느낌이다. 내가 살아온 인생은 이러하고, 이런 모습이 보여, 넌 어때? 라며 나를 생각하게 만든다. 그래서 이 책을 단순한 사랑 이야기 책이 아니라 철학책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지도 모르겠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으면서도 느꼈지만 고전의 반열에 든(?) 소설 책을 읽을 때는 항상 역사적 배경을 알고 있는 편이 좋을 듯 하다. 이 책에서도 체코가 소련의 침공으로 인해 공산화가 되어 가는 상황이 큰 축을 이룬다. 그 사실을 알고 어떤 방향으로 흘러갔는지 알고 있었다면 소설의 내용을 더 잘 알 수 있었을 듯 하다. 이 책을 읽을 다음 기회가 있다면, 읽기 전에 꼭 배경 조사를 하리라.
‘키치’ 라는 개념에 대해 정확히 이해를 못한 듯 하다.
● 키치란 본질적으로 똥에 대한 절대적인 부정이다. (p. 405)
● 권위를 상실한 키치는 모든 인간의 약점처럼 감동적인 것이 된다. 왜냐하면 우리 중 그 누구도 초인이 아니며 키치로부터 완전하게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무리 키치를 경멸해도 키치는 인간 조건의 한 부분이다. (p. 421)
어렵다. ‘확고한 동의’를 기반으로 하는 ‘키치’는 어떤 의미일까?
표지에 개 그림이 그려져 있어서 왠 개지? 했다. 다 읽고 나니 카레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카레닌. 저자는 개를 통해 그저 ‘전원시’ 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 카레닌의 죽음이 아니라 마지막 장 제목을 카레닌의 미소로 한 것만큼 의미가 있는 걸까? 카레닌이 테레자에게 의미했던 것만큼 인간에게 동물이 지니는 의미를 보여주고 싶었던 걸까
물음표가 엄청 생긴 독서였다. 그래도 명작을 놓치지 않고 알게 되어서 기쁘다. 이렇게 좋은 책이었구나, 이래서 많은 이들이 감동적으로 읽는 거였구나, 나도 알게 되어서 기쁘다. 기준점은 모든 사람들마다 다르겠지만, 나에게도 기쁨이 되어 주어 기쁘다.
<휘연이 묻다>
1. 나에게 가벼움과 무거움은 어떤가? 나의 인생에서 지향점은 어떠해야 할까
2. ‘인간을 천국에서 추방하면서 신은 인간에게 그의 추한 본모습과 혐오감을 보여 주었다. (p. 403)’ 추한 본모습이라 함은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던 것일까? 이를 바탕으로 하면 우리에게 내재된 추함과 혐오감은 애초에 우리의 것인데, 그걸 모름으로써 행복하다면, 그 행복은 진정한 행복이 될 수 있는가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민음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광고 카피를 비롯한 여러 매체를 통해 워낙 다양한 형태로 접했던 제목. 정작 이 유명한 제목을 지닌 원작은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이 책의 내용은 뭔지 읽어보고 싶다는 궁금증이 생겨서 이번 기회에 읽어보게 되었다.
이 책의 첫 문장은 이와 같이 시작한다.
“영원한 회귀란 신비로운 사상이고, 니체는 이것으로 많은 철학자를 곤경에 빠뜨렸다. 우리가 이미 겪었던 일이 어느 날 그대로 반복될 것이고 이 반복 또한 무한히 반복된다고 생각하면! 이 우스꽝스러운 신화가 뜻하는것이 무엇일까?”
벌써 시작부터 영원 회귀라는 니체의 사상이 나온다. 뒤이어 바로 영원 회귀 사상의 무거움에 대해 언급하며 파르메니데스가 제기한 가벼움과 무거움의 분류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과연 그의 분류 처럼 가벼운 것이 긍정적이고 무거운 것이 부정적일까?
이어 본격적으로 소설이 시작된다. (사실 이 책이 소설인지 철학책인지 아무 배경없이 제목만 보고 집었던 것이라 이게 소설이라는걸 이 시점에서 처음 깨달았다.) 소설은 “프라하의 봄” 사건이 일어나는 전후 시점쯤의 체코와 스위스를 배경으로 토마시, 테레자, 사비나, 프란츠의 4명의 인물을 중심으로 진행이 된다. 그들 사이에 얽히고 엃힌 사랑이라는 관계에서 누군가는 가벼운 사랑을 즐기고, 누군가는 무거운 사랑을 바라고, 누군가는 가벼운 사랑을 동경하기도 하지만 누군가는 전혀 “참을 수 없”어 하기도 한다. 책에서는 이 처럼 각 인물들이 인식하는 사랑의 무거움과 가벼움의 대비, 더 나아가서 각 인물의 인생, 그리고 그들을 관통하는 역사적 사건의 가벼움과 무거움의 대비를 통해 계속적으로 스토리가 진행이 된다.
소설이기도 하고 꽤나 분량이 많아 자세한 내용은 생략하고, 과연 저자 밀란 쿤데라는 이 소설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나의 부족한 내공을 바탕으로 생각해본 내 나름의 결론은 “각자의 삶에 충실하고, 서로의 삶과 생각을 존중하고, 나를 포함한 내 주변의 모든 것에 충실하고 후회없이 살아가자” 라는 것이다. 소설의 도입부에서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을 언급을 했는데 이 영원회귀는 무한히 반복되는 삶의 덧없음으로 오해 될 수도 있지만, 실제 니체의 의도는 현재의 불만족이나 비참함이 반복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현재의 생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라 한다. 바로 이 개념으로 부터 “아모르 파티” (amor fati; 운명애; 운명을 사랑하라) 라는 니체의 핵심 사상이 나온다. 따라서 저자 밀란 쿤데라가 영원 회귀를 언급한데에는 이런 배경이 있을 것이다. 소설의 후반부에 보면 테레자가 토마시에게 가졌던 각종 의심과 원망이 (비록 바람기가 많은 사람이지만, 결국 나를 위해 가진것을 다 버리고 따라와 주었던 점을 생각하며, 그가 그의 방식으로 나를 진정으로 사랑 했음을 깨닫고) 얼마나 부당했는가를 깨닫고 후회하는 대목도 이러한 내 나름의 결론의 근거가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이 외에 이 책의 주제라고 볼수도 있고 책에서 저자가 던졌던 “가벼움”과 “무거움” 에 대한 질문의 답은 무엇일까. 이는 결국 “답은 없다”라고 보인다. 밀란 쿤데라는 이 소설의 인물들의 삶의 방식을 단순히 나열할 뿐 그 무게감의 긍정성/부정성에 대한 가치 판단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아마도 소설의 6부 “대장정” 파트에 “키치”에 대한 생각을 통해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것 같다. 유럽인들의 믿음 이면에는 “이 세계는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는 모양으로 창조되었” 다는 근본적인 믿음이 있는데 이를 “존재에 대한 확고부동한 동의”라고 하고, 이를 미학적 이상으로 삼는 것이 “키치” 라고 한다고 한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이것은 마땅히 이래야만 한다거나 저래야만 한다고 하는 소위 “키치”를 긍정적으로 보지 않는데, 이 부분을 통해서도 왜 저자가 가벼움/무거움에 대한 가치판단을 미루었는지 알 수 있다. 다만 어떤 쪽을 선택할 지는 본인이 직접 결정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토마시의 권유로 자살을 도와주는 사람들에게 보내진 테레사의 사례를 통해 전달하고자 한 것 같다.
위에 다룬 내용 외에도 너무나 생각해볼 부분도 많고, 다룬 내용들도 좀더 깊숙히 생각해볼 부분이 많지만 아직 나의 내공이 그만큼 다루기까지 다다르진 못한 것 같다. 이런저런 생각의 여운이 많이 남는 작품인지라 추후에 좀더 내공이 쌓인 뒤에 또 읽어보고 그때의 나의 감상은 어떤지 비교를 해 보아야 겠다는 다짐을 하며 글을 마친다.
실존의 덫
책을 읽으며 나의 얕은 지식으로 설명은 되지 않지만, 놓을 수도 없었던 한가지 감상이자 발상은 ‘코기토 명제’로의 회귀였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라는 데카르트의 유명한 명제를 생각하며 네 명의 중심인물들이 과연 책의 제목대로 존재하고 있는지, 그리고 실존주의 철학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지에 대해 상상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책에서 ‘밀란 쿤데라’가 계속해서 언급하고 인용한 데카르트와 니체 등의 철학자를 공부하며 생각해본 ‘실존’에 대해 부족한 의견을 나누어보고자 한다. 이 책은 니체가 말한 삶에 대한 언급으로 시작한다. 인문학의 연못에 발을 담아보고자 고전을 찾은 수많은 독자들로 하여금 첫 단락에서 나가떨어져 ‘어려운 책’으로 속단 내리게 한 악명높은 책이기도 하다. 니체와 데카르트의 철학과 명제들이 가득한 이 책에 나오는 인물들은 과연 ‘등장인물’을 벗어나 실존주의적 삶에 충실하였을지 궁금했다. 또한 나는 책 속 네 명의 인물들은 과연 존재하는가, 그리고 실존주의적 삶에 이르렀는가에 대해 알고 싶었다.
‘토마시’와 ‘테레자’, 그리고 ‘프란츠’와 ‘사비나’. 책 속에는 그들의 모든 지적 행위와 선택, 과정이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그들은 생각을 멈추지 않으며, 생각한 대로 행동한다. 어떤 이는 자신의 삶의 무게에 대해서, 어떤 이는 자신의 애정 상대의 행동을 보며 옳고 그름의 정의 판단에 대해서 끊임없이 생각한다. 생각을 멈추지 않는 그들은 과연 존재하며 실존하는가?
사랑에는 자아 정체성의 회복과 발견의 특성이 있다. ‘나는 누구인가?’ 혹은 더 극적으로, ‘내가 이런 사람이었던가?’라는 질문에 대해 가장 진한 인상을 남기는 인간의 행위는 단연 사랑일 것이다. 어떠한 대상을 사랑하는 과정에서 우리 인간은 자기에 대한 새로운 경험과 발견을 하게 된다. 그것은 가히 충격적이고, 중독적이며 자극적이다. 기준은 모호하지만 평범한 사람과의 평범한 사랑은 우리에게 안정과 편안함, 따뜻함 등을 주곤 한다. 하지만 ‘토마시’나 ‘사비나’와 같이 가벼운 삶을 살아가며 애정과 성적 관계의 경계를 나누고 파트너를 찾아다니는 사람과의 사랑은 극적이고 반짝이지만, 아픔과 고통을 동반하기도 할 것이다. 아픔과 고통에 시달린 ‘테레자’와 ‘프란츠’는 책 속에서 무거움을 대표하면서도, 일상 속에서 각자의 연애 대상에 동조하고 동화되며 가벼움이 주는 심리적 혼란을 동반한 쾌락을 경험한다. 두 연인의 복잡하게 얽힌 사랑의 과정을 그린 이 책을 읽으며, 인물들은 사랑을 통해 살아있음을 경험하고자 하며, 이는 곧 실존주의적 삶에 대한 갈망임을 느꼈다.
그들은 각자의 사랑의 본위가 너무나도 달랐다. 나는 그들이 정체성을 확인하고 ‘쿤데라’가 만들어낸 책 속에 갇힌 성 중독자 혹은 의존증 캐릭터에서 벗어나, 지적 생명체로서 실존함을 느끼기 위한 수단으로 사랑을 선택했음을 느낀 적이 있다. 네 인물의 사랑에는 극명한 차이가 있고, 감히 누구 한 명도 옳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들은 사랑을 통해 소설 속에서 살아갔고, 책 속의 누군가는 아파야만 했다. 그리고 동조와 동화, 회피 등의 방어 기제를 선택하며 중독적인 만남을 이어갈 수 밖에 없었다. 남녀가 거침없이 몸을 섞는 신체적인 격돌과 꿈속에서조차 그들을 괴롭히는 정신적 싸움은 그들이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실존주의적 투쟁이 되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이 곧 실존이라는 철학이 놓아둔 덫에 걸려들었다고 생각했다. 사랑을 통해 본인이 살아있음을 느끼고, 궁극적으로 실존에 대한 확인을 갈망하는 그들은 책에서 나오지 못한 채 망가진 연애를 했고 보통의 사람처럼 역시나 죽음으로 발길을 옮기더니 평범하게 죽었다. 나는 이 과정을 실존의 덫으로 보게 되었다.
안타까움을 느꼈다. 그리고 인물들의 죽음이나 시골에서의 말로에 대한 묘사를 보며 안도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들의 엇나간 정사와 애정에 대한 중독과 무관하게 흘러가는 시간의 축에서, 그들은 죽음이라는 다분히 인간적인 운명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책의 6부 마지막에는 인물들의 마지막에 대해 비문 하나만이 남았다고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의 마지막을 상상해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프란츠의 죽음을 시작으로 안도감과 그로 인한 배덕감을 동시에 느끼기도 했다. 나는 책 밖의 독자로서 쿤데라가 써놓고 번역된 글자들 이외의 것들을 멋대로 상상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내가 어떤 이유로 안도감을 느꼈던 것일지 생각해보니, 삶과 실존에 대해 고민하고 수단으로 사랑을 택한 뒤, 인간의 죽음으로 끝맺는 모든 과정이 그들에게 희미하게나마 인간답게 실존했다는 위로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특히나 책 속 인물일 뿐인 그들에게 죽음만큼이나 인간적이고 실존적인 행위이자 결정이 없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책 속 인물일 뿐이지만 타인의 죽음을 통해 실존을 느끼고 안도한 나 자신에게 배덕감을 느끼기도 했던 것이다.
정리하자면 책 속 네 명의 인물들은 책장을 넘어 각각의 인간으로서 실존주의적 삶을 살기 위해 사랑이라는 수단을 택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각자의 본위가 너무나도 다른 사랑으로 서로를 괴롭히며 ‘실존’이 주는 중독과 자극의 덫에 더욱 깊게 빠져들도록 만들었다. 실존이라는 가치가 소중하다는 사상에는 이견이 없다. 하지만 책에서 나올 수 없는 등장인물들에게 작가가 선사한 사랑과 호르몬이 주는 자극이나 실존주의가 동반하는 혼란은 그들이 중독되기에 충분했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럼에도 그들은 인간답게 소설 안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그리고 뜨겁게 고민하고 정사로 가득했던 젊은 시절을 지나 평범한 인간으로 인생의 말로를 살아간다는 결말로 책이 끝났다.
실존주의 철학이 주는 자극은 책 속 인물일 뿐인 그들에게 너무나 컸고, 사랑을 통해 살아있음을 느낀 그들은 책장 속에서 죽었다. 그리고 그들은 다른 독자의 책 속에서 다시 태어나고 다시 사랑한다. 이들의 적나라하고 노골적이지만, 가장 동물적이면서도 솔직한 사랑을 읽고 싶은 독자, 그리고 사랑을 통해 내가 살아있음을 경험해본 적이 있는 모든 독자들에게 이 책을 추천하고자 한다. 나는 책 속 인물인 그들의 마음을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의 인간다운 평범한 죽음으로 그들이 실존하였고, 실존주의적 삶을 선택했으며 그 실천을 위해 발악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나 역시 사랑을 하고, 죽음에 대해 고민해오며 실존적 삶에 조금이나마 다가간 경험이 있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실존함은 죽음을 통해 증명되기도 할 것이다. 그들의 죽음이 본인의 사랑과 삶이 옳았음을 충분히 증명하였기를 바라면서 글을 마친다.
<참고문헌>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이재룡 역, 서울: 민음사,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