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20년 04월 2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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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300쪽 | 444g | 138*203*20mm |
ISBN13 | 9791197021602 |
ISBN10 | 1197021604 |
발행일 | 2020년 04월 2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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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300쪽 | 444g | 138*203*20mm |
ISBN13 | 9791197021602 |
ISBN10 | 1197021604 |
MD 한마디
소설가 김영하의 시칠리아를 여행기. 오랜 시간 여행자로 살아왔지만 10여년 전 떠난 시칠리아 여행은 그에게 '오래 준비해온 대답' 처럼 떠올랐다고 한다. 길도 잃고, 생각지도 않은 일들을 겪었지만 돌아보면 다시는 할 수 없을 김영하의 추억이 담긴 여행. 읽는 내내 내가 떠난 지난 여행들의 추억을 떠오르게 한다. - 에세이 MD 김태희
Prologue 언젠가 시칠리아에서 길을 잃을 당신에게 내 안의 어린 예술가는 어디로 첫 만남 소프레소, 에스프레소 리파리 지중해식 생존요리법 리파리 스쿠터 일주 리파리 떠나던 날 향수 메두사의 바다, 대부의 땅 아퀘돌치해변의 사자 천공의 성, 에리체 빛이 작살처럼 내리꽂힌다는 것은 메멘토 모리, 카르페 디엠 신전 죽은 신들의 사회 Epilogue 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 |
그는 솔직하다. 거침이 없다. 자신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한다. 윤리적으로 보면 조금은 거리낄 수 있는 이야기도 가볍게 얘기한다. 이런 이야기까지 하는가 싶은 내용도 들려준다. 그러므로 읽는 사람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한다. 지식도 깊이가 있어, 그가 만지고 본 내용들은 훌륭한 옷을 입는다. 그래서 이야기가 거리에 나오면 사람들이 반한다. 그의 글들은 이렇게 시원하게 채색되어 변모하는 모습을 지니고 있다. <솔직, 담백, 명쾌> 이 세 단어가 그의 글을 이루어 나가는 원천이 되고 있다. 저자가 쓴 글을 전체적으로 바라보는 느낌이다. 이 글도 마찬가지다.
이 글은 기행문이다. 기행문 치고는 방대한 내용을 담았다. 그것은 기행지가 저자의 마음을 울리는 공간이었기 때문인 듯하다. 그는 시칠리아에 푹 빠졌다고 스스로 얘기한다. 현실이 어려운 일의 연속으로 이루어졌지만, 그곳에서 생활하면서 풍광과 인정에 마음을 빼앗겼다고 한다. 그러면서 왜 그들에게 마음을 내어주게 되었는가를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자신이 지녀왔던 기억들과 맞닿아 있었다. 역사와 유쾌한 사람들이 머물고 있고, 어디에도 비할 수 없는 아름다운 바다가 함께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제법 잘 나가는 소설가다.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고, 장편 소설도 4-5개 정도 썼다. 그리고 그 소설들이 그래도 가끔씩 팔려 나간다. 또한 방송사에서 글과 관련되는 프로그램을 맡고 있다. 동년배에 비해 비교적 잘 나가는 소설가란 뜻이다. 그런데 자꾸만 회의가 온다. 내가 잘 살고 있는가? 정말 내가 하고 싶어 하는 것을 하고 있는가? 이런 생각들이 머물며 생활이 자꾸만 축소되는 느낌이 든다. 내가 이리 힘들어 하니까 아내는 강의하는 것을 그만두라고 한다. 아마 저자가 가장 빨리 손을 놓았으면 하는 것이 대학 강의라고 은연중에 아내에게 심은 모양이다.
저자는 방송사 다큐 제작팀과 시칠리아에 머문 적이 있었다. 그 일이 있은 후 어려운 기억들이 많았지만 사적으로 언젠가 다시 한 번 오리라 생각했었다. 저자는 대학에서 소설 창작 강의를 하고 있었는데, 그 강의가 그리 달갑지 않다. 학생들이 스스로 글을 잘 쓰고 있는데 오히려 자신의 생각을 집어넣어 글을 쓰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쌓인다. 그러니 그 길을 떠날 수밖에.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는 중, 저자는 캐나다에서 살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그래서 이 땅의 모든 일들을 내려놓고 캐나다로 이주를 해야 하게 된다. 그는 집과 이곳의 일들을 정리해야 한다. 집이 잘 나가지 않을 것 같아 일찍 내어놓는다. 그런데 집이 바로 나가버린다. 하여 이곳에 머물 곳이 없어진다. 그때 생각한 것이 시칠리아에 한 번 가보자는 것이었다. 다시 가보고 싶었던 곳을 일이 아닌 여행으로 가보자는 생각을 했다. 아내와 둘이 하는 여행은 행복한 길이었다. 그것이 또한 이렇게 한 권의 책이 되고 있다.
로마에 도착해서 시칠리아로 들어가는 길이 쉽지가 않았다. 장화의 코 같은 곳까지 가서 기차를 배로 실어 들어가는데, 반도에서 시칠리아로 들어가는 기차가 쉽게 길을 열어 주지 않았다. 기차 노동자가 파업을 한다고도 하고, 차가 있다가 없다가 수시로 변하는 바람에 아내에게 신뢰를 잃는 상황까지 벌어지면서 황당한 입장이 된다. 그래서 원치 않는 기차도 타고, 원치 않는 여행 경로도 가지면서 그들은 꾸역꾸역 이탈리아 반도의 끝까지 갔다. 그곳에서 손수 배를 타고 시칠리아로 건너갔다. 그리고 다시 기차로 옮겨가고, 이렇게 수고로운 시간을 가지면서 목적지로 가까이 갔다.
시칠리아에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혼자 상상해 오던 이탈리아가 있었다. 따사로운 햇볕과 사이프러스 그리고 유쾌하고 친절한 사내들, 거대한 유적들과 그 사이를 돌아다니는 주인 없는 개들, 파랗고 잔잔한 자중해와 그것을 굽어보는 언덕 위의 올리브나무, 싸고 신선한 와인과 맛있는 파스타, 검은 머리의 여성들과 느긋하고 여유로운 삶......(p50) |
저자가 시칠리아를 다시 찾고 싶어 하는 이유가 그려져 있는 문단이다. 이탈리아의 진면목을 그곳에서 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그곳에서 다시 확인하고 싶어 한다.
시칠리아는 이탈리아 반도의 아래에 우리나라의 거제도처럼 이루어져 있는 섬이다. 그런데 규모가 대단히 크다. 제주도의 14배 정도라고 한다. 열차를 타고 돌아다니는 대단한 거리다. 이 섬은 삼각형으로 되어 있다. 그것이 그리스를 향해, 유럽을 향해, 아프리카를 향해 보고 있다. 유럽 쪽에 팔레르모가 있고, 그리스 쪽에 메시나, 시라쿠사가 있고, 아프리카 쪽에 아그리젠토, 젤라가 있다. 이 도시들은 자기가 바라보고 있는 쪽을 많이 닮았다. 노토는 반은 그리스 반은 아프리카 쪽으로 엉거주춤 앉아 있다. 이들의 도시를 중심으로 저자는 여행을 하고 있다.
시칠리아로 들어가 먼저 리파리 섬으로 갔다. 그곳은 인구가 1만 8백 정도 되는 섬이다. 시칠리아의 북쪽 바다, 화산도로 활화산이다. 메시나에서 쾌속선으로 100분 정도 달리면 리파리에 도착한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두 부류다. 활화산의 실재를 보려고 하는 사람들, 또 서핑이나 스쿠버다이빙 하는 사람들이 그들이다. 지중해의 풍광이 멋져 그것을 보기 위해 찾은 리파리, 지중해 무역의 거점인 이곳을 통해 지중해를 누빈 사람들의 역사를 일깨우고 있다. 확실히 박식한 저자의 언어는 탐스런 열매들도 다가온다. 그의 여정은 지리적 요인과 함께 아름다움을 넘어 깊은 울림이 되는 의미를 전해 준다.
리파리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고 있다. 생존법을 말하며 어떻게 음식을 만들어 먹는가도 얘기한다. 재료만 있으면 간단한 음식을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것은 여행에서도 큰 자산이다. 어류를 적당하게 구입하여 채소를 넣고 만드는 음식이 먹음직스럽기까지 하다. 리파리에서는 스쿠터를 타고 움직이는 것이 유용하다. 리파리의 진면목을 구경할 수 있는 방법이 배를 타고 섬을 돌거나 아니면 스쿠터를 타고 해안선을 가로 지르는 방법이 있다고 전한다. 둘 다 지중해와 화산섬의 살필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됨을 말한다.
리파리를 나와 신화 속의 이름인 메두사로 간다. 사랑 때문에 아름다운 여인이 괴물이 되어버린 이름, 메두사는 그러기에 바다를 사랑한 시칠리아 사람들의 마음이 반영된 도시 이름이리라. 대부의 도시, 기념품과 공연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흔적이 잘 드러나는 도시다. 길을 가다가 농장에 들어가 생활한 기억은 저자의 상상력을 자극하기도 한다. 추억 속에 잠겨 유년의 기억을 떠올리기도 한다. 현실적인 조건과 과거의 기억들이 혼재하면서 저자만의 시칠리아가 오롯이 다가온다.
그런 상상을 하고 있노라니 안토니나의 농장이 더 이상 낯설지 않게 느껴졌다. 시칠리아 산골의 한 농장이 내가 오랫동안 잊고 있던 기억을 떠올리게 해주었던 것이다. 쓸모 있는 작물이라고는 하나도 없던 메마른 구릉과 독립된 작은 집, 관목 숲에서 벌어지는 은밀한 도살과 죽은 개의 저주, 지독하게 캄캄한 밤과 요란한 아침, 밤새도록 이어지는 무서운 꿈과 그보다 더 무서운 추리소설들. 그랬다. 나는 그곳에서 자랐고 지금의 나를 만든 그 무엇인가의 일부는 거기에서 왔음이 분명하다.(p180) |
저자가 어떻게 성장했는가의 일단을 볼 수 있는 부분이다. 군인의 자녀로 관사에서 성장하면서 사랑하던 개가 어떻게 죽었으며, 그 뒤 그 부대가 어떻게 힘겨운 시간들을 보내었는지, 기억 속엣허 찾고 있다. 그것이 이 은밀한 농장에서 찾아낸 기억의 편린으로 우리들에게 다가오기도 한다.
팔레르모에서 고속도로를 타고 서쪽으로 달리면서 역사 속에 빠져든다. 포에니 전쟁과 식민지 경영 그리고 반란 사건들이 그려진다. 특히 스파르타쿠스의 난은 이곳이 주 무대가 되어 이루어진다. 물론 반란의 중심이 되는 인물들은 모두 잡혀 참혹한 형을 당한다. 그 후 시칠리아 인들은 3세기 정도, 로마에 귀속된 지 500년 후에야 시민의 지위를 획득한다. 이런 역사적은 흔적을 쫓으며 에리체로 향한다. 에리체는 비너스 숭배로 유명했다. 봉우리 정상에는 미의 신을 섬기는 신전이 있었는데, 그 안에 수십 명의 여사제가 살기도 했다 한다. 에리체를 거쳐 간 유명한 인물로 오디세우스를 얘기한다. 트로이전쟁을 마치고 돌아오던 길, 괴물과의 사투를 벌였던 인물이다. 이곳이 그 이야기의 무대다.
시라쿠사는 그리스문명의 토대 위에 로마문화를 더하고 그 위에 기독교적 색채를 가미한 일종의 크레이프 케이크 같은 도시라 할 수 있다. 이렇게 그리스문명과 로마문명을 일별할 수 있는 도시는 흔치 않다. 시라쿠사에서는 그리스인과 로마인이 어떻게 다른 지를 단박에 알 수 있다. 이야기를 사랑한 그리스인들과 아드레날린에 중독된 로마인들의 차이는 그들이 지어놓고 떠난 극장과 경기장으로 드러난다. 경기장과 극장들이 발달한 것은 로마인들의 생활 습관 때문이리라. 곳곳에 원형 극장이 있고, 곳곳에 경기장이 있다. 그들은 특별히 경기를 지켜보면서 삶의 희열을 느낀 삶을 살아가지 않았나 보여 진다. 시라쿠사뿐만 아니라 곳곳에 그런 흔적을 보여주고 있음은 민족성과 전쟁이 일상이었던 삶의 형태가 가미된 것이리라.
시칠리아는 그리스와 로마, 그리고 기독교적인 색채가 짙은 섬이다. 이들과 함께 있다 보면 이야기 속에 매몰되고 풍광 속에 빠져들고, 기꺼이 시간을 줄일 수 있는 공간이다. 지중해의 유려한 바닷물과 서구 역사의 발원지 이야기가 아라비안나이트처럼 전개되는 곳이다.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을 붙들고 얘기를 들으면 밤을 새는 것이 아깝지 않을 듯한 시간이 흘러갈 게다. 그 숱한 시간을 만나며 그렇게 살아보는 것도 분명 축복이다. 저자의 마음을 빌리면 시칠리아에서 살아본 것은 정말 행복함이었을 게다. 저자는 노토, 아그리젠토 젤라 등을 관람하고 시칠리아를 떠난다. 행복한 삶이 이루어진 시칠리아는 그렇게 저자의 언어 속에 녹아 있다. 가보고 싶게 만드는 이미지와 이야기가 표현되어 있다.
시칠리아를 떠나면서 아내가 하는 얘기를 듣는다. 아내는 밖에 잘 나가는 성격이 아니라 한다. 그런데 이 여행을 통해 삶의 관점이 상당히 달라졌다고 말하는 것을 듣는다.
“그냥, 그렇게 사는 거지. 맛있는 것 먹고 하루 종일 얘기하다가 또 맛있는 거 먹고.”
“그러다 자고.”
“맞아. 아무것도 계획하지 않고 그냥 닥치는 대로 살아가는 거야.”
“가이드북 보니까 이탈리아에 이런 속담이 있대. 사랑은 무엇이나 가능케 한다. 돈은 모든 것을 이긴다. 시간은 모든 것을 먹어 치운다. 그리고 죽음은 모든 것을 끝장낸다.”
아내가 한 말의 요지다. 그러니까 여행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뚜렷한 계획이 필요가 없는 삶도 의미가 있다는 뜻이다. 여행이란 것이 계획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도 목도하고 난 뒤의 생각이리라. 어디에서 살든, 어떻게 살든 자신을 잘 살피고,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삶이라면 목표가 없어도 된다는 깨달음이리라. 그것을 죽음과 연결시킨 일은 그렇지만.
시칠리아, 유럽 문화의 출발점이자 고대 사회의 기반이 되었던 섬, 그곳은 화려한 경치와 아름다운 바다와 삶의 여유가 있는 공간이다. 고대가 살아 있고, 현대가 어울러 숨 쉬고 있는 곳, 이 책을 읽으면 한 번쯤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책 읽기는 많은 이미지로 도움을 받지만 미지의 공간을 상상하는 것도 즐거움이 된다. 바다를, 섬을, 절벽에 세워진 건물들을...... 함께하고 싶은 진한 전율이 일게 만드는 책 나들이였다. 시원하고 상쾌한 기분이 마음을 씻어내는 느낌으로 다가오게 만드는 독서였다.
현대적 콘서트홀은 관객들이 오직 무대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설계되지만, 그리스식 극장은 관객들이 서로를 의식하도록 만들어졌다. 인간의 반응은 잘 전파된다. 특히 웃음과 하품이 그렇다. 그래서 이런 극장에선 콘서트나 연극도 좋지만 관객들이 참여할 수 있는 행사들이 더욱 잘 어울린다. 나는 노천극장에서 그 대학의 응원가와 율동을 배웠는데, 그 순간의 행복감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89) |
이탈리아(로마)의 원형극장에서 그 내용을 가져왔다. 원형극장은 함께 어울릴 수 있는 공간이기에 관람객들이 동질성을 느끼기에 좋다. 그러기에 무대가 있고, 그 무대에서 배우에 의해 이루어지는 공연을 관람객이 일방적으로 보는 것보다 참여하는 무대가 될 수 있음을 말한다. 이 이야기를 김영하는 <시칠리아 섬>에서 가져왔다. 그곳도 이런 원형의 극장이 많이 만들어져 있는 모양이다. 지중해 연안 어디를 가나 원형극장은 우리가 호흡할 때 필요한 공기처럼 만들어져 있다. 경기를 즐기는 것이, 공연을 즐기는 것이 그들의 보편적인 삶인 것이다. 이런 극장을 그는 대학의 노천극장과 비교하면서 그 다양성과 가치를 생각해 보고 있다.
오늘날 우리들이 살고 있는 곳도 이런 공간이 많이 마련되고 있다. 주로 노천에서 이런 원형이나 반원형의 관람석으로 두고 무대가 마련된다. 학교나 공원 등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이런 공간을 활용해 생활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은 복된 일이다. 전통적인 우리의 극들도 이런 곳에서 공연하기 좋다. 탈춤, 가면극, 사물놀이 등의 공연, 이런 곳에서 하면 배우와 관객들이 함께 아울릴 수 있다. 마당극도 마찬가지다. 이런 공연장은 무대를 마당과 같이 생각해도 될 것이다. 서구의 현대식 공연과는 많이 차이가 난다. 서구에서는 관람자들의 관람석과 무대를 구분해 놓고 있다. 그런 면에서 우리의 전통적인 공연, 민중(관객)들과 함께하는 공연들은 이런 무대와 잘 어울린다. 지난 세월 속에 우리의 마당은 그런 공연장을 대신하는 역할을 했다. 즉 우리의 극예술은 서구보다 훨씬 민중들 속애서 생활화 되어 있었다고 봐도 될 듯하다.
'가장 가보고 싶은 여행지가 어디인가'라는 질문을 받을 때 어느 한 곳을 선뜻 이야기할 곳이 있는가? 그것도 마치 '오래 준비해온 대답'처럼 말이다. 이미 가 본 경험 없이 짧은 사전지식만으로 그럴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어쩌면 천생연분일지도 모르겠다. 김영하 작가에게 시칠리아는그런 곳이었다고 한다. 그리스, 로마, 스페인처럼 지중해를 둘러싼 천혜의 지역이 여행의 최적지임에 틀림없지만, 그 중에서 특히 끌리는 곳이 하필 장화의 나라 이탈리아의 발끝에 자리한 시칠리아섬이었다고 한다.
어떤 나라나 도시를 마음에 두었다고 바로 가게 되는 것은 아니다. 한 동안 잊어버렸다가 문득 어떤 계기로 다시 그곳이 떠오른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그곳에 가있다. EBS의 '세계테마기행'을 계기로 한 번, 그리고 6개월 이후 아내와 함께 찾은 두번째의 여행, 마치 예정된 운명처럼 다가온 두 번의 시칠리아 여행이었다. 그래서 책 제목을 <오래 준비해온 대답>으로 정했다고 한다.
스마트폰이 생기기 전의 마지막 여행이었다. 현지에 도착해 그날 묵을 곳을 공중전화로 예약하는 방식으로 호텔을 정하고, 종이 지도를 보고 길을 찾다가 이상한 길로 접어들고 일정에도 없던 숙소에 머물기도 한다. 여행이라는 것이 낯섬과의 만남일진대 불확실성으로 인한 긴장감을 더할 수 있는 이런 여행이 진짜 여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개인적으로 동해안 해파랑길 도보여행 할 때에도 일부러 사전 예약없이 직접 부딪혀 보았던 생각이 난다.
그들이 시칠리아 여행을 통해 경험한 것은 무엇일까? 어려울 때 다정하게 다가와 도와주고 사라지는 따뜻한 사람들, 오후 1시가 되면 오전 일과를 정리하고 시에스타를 즐기는 느긋한 사람들, 장엄한 그리스 로마시대의 유적지를 보면서 느끼는 인문학적 사유들, 그런 시간들을 통해 작가 자신의 과거를 만나고,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자기 안의 '어린 예술가'도 다시 만난다.
책을 통해 우리는 시칠리아 곳곳에 깃든 신화와 전설의 세계를 만나고, 아름다운 풍광을 보여주는 사진들을 만날 수 있다. 천공의 섬을 닮은 에리체에서는 오디세우스와 괴물 키클롭스의 전설이 기다리고 있다. '유레카'를 외치며 욕조에서 뛰어나온 아르키메데스의 도시 시라쿠사도 소개된다. 타오르미나에서는 영화 <대부>를 떠올리며 촉발된 '복수의 연쇄'라는 주제를 그리스 비극 이야기를 이어가기도 한다.
중간중간 여행지에서 찍은 장면들을 담은 사진들이 독자들에게 쉬어 갈 여유를 제공한다. 독자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시칠리아의 지도 한장을 앞부문에 붙여 두었더라면 조금 더 실감난 간접 여행의 기회를 제공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든다. 김영하의 시칠리아 여행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겠다.
나는 내 마음속의 시칠리아에게 작별의 인사를 했다. 맛있는 음식과 거칠고 순박한 사람들,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매력으로 가득한 오래된 유적과 어지러운 거리들을 생각했다. 시칠리아는 나에게 현재의 삶을 있는 그대로 즐기는 법을 가르쳐주었다.(28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