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피아 코폴라 감독의 영화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 혁명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다룬 영화가 아니다. 영화의 초점은 철저하게 마리 앙투아네트라는 한 개인에 맞추어져 있다. 민중의 공분을 살 만한 사치스러운 장면이 엄청나게 많이 나오지만, 민중의 고통스런 삶과 마리 앙투아네트의 사치스러운 삶을 대비시키려는 의도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영화는 자기 앞에 닥칠 비극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 그저 예쁘고 맛있고 재미있는 것을 좋아하는 철부지 소녀의 일상을 때론 바비 인형처럼, 때론 디스코텍의 플레이 걸처럼 그려 낸다. 18세기 인물의 21세기식 버전이 다소 생경하기도 하지만, 매일매일 ‘재미있게 보내기’가 삶의 유일한 목표였다는 점에서 영화 속 인물과 실제 마리 앙투아네트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는 없다. 화려한 드레스와 부채, 각종 장신구와 최신 유행의 구두, 방 안을 가득 채운 온갖 종류의 케이크와 사탕, 과자 등등. 영화는 관객의 눈에 엄청난 물량 공세를 퍼붓는다. 그래서 오히려 현실성이 떨어진다. 현란한 색의 향연마저도 무색무취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한다.
매사에 여흥을 즐겼던 마리 앙투아네트는 오페라도 좋아했다. 영화에도 그녀가 왕실 사람들과 함께 오페라를 보는 장면이 나온다. 처음에 그녀가 본 오페라는 프랑스 작곡가 라모Jean Philippe Rameau의 「플라테Platee」이다. 라모는 루이 15세 시절에 활동했던 궁정 작곡가이다. 「플라테」는 그가 1745년 루이 15세의 아들과 스페인 공주의 결혼을 축하하고자 작곡한
것으로 베르사유 궁에서 처음 공연되었다.
주피터는 아내 주노의 질투심을 유발하려고 못생긴 플라테와 가짜 결혼식을 올리려고 한다. 그는 당나귀, 올빼미, 구름, 불꽃 등으로 변하는 변신술을 동원해 플라테를 유혹한다. 그래서 마침내 결혼식을 올리는데, 그때 주노가 들어온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주노는 신부의 얼굴을 보자며 베일을 벗긴다. 그런데 베일을 벗기니 못생긴 플라테가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그 순간 주노는 이 모든 것이 연극이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그래서 화를 거두고 주피터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다. 그 모습을 보고 플라테는 서둘러 자리를 떠난다.
영화에서 가수가 그네를 타면서 부르는 노래는 이 오페라의 2막에 나오는 「다프네는 아폴로의 구애를 거절했네Aux langueurs d'Apollon, Daphne serefusa」이다. 주피터가 플라테와의 결혼식을 준비하고 있을 때, 광기의 신 폴리가 나타나서 부르는데, 폴리는 아폴로와 다프네의 사랑 이야기를 하면서 플라테에게 주피터와 엮이지 말 것을 우회적으로 표현한다. --- 「나, 마리 앙투아네트 · 소피아 코폴라 '마리 앙투아네트'」 중에서
「장미의 이름」은 우리에게 중세를 느끼게 해 준다. 영화에서 보여 주는 중세는 무채색이고, 그 무채색 중심에 교회가 있다. 중세 사람들은 자기가 살고 있는 곳 어디에서나 마을 한가운데 우뚝 서 있는 교회 건물을 볼 수 있었다. 중세 교회는 두꺼운 벽과 육중한 기둥, 최소한의 빛만 투과되는 작은 창문을 특징으로 하는데, 이것이 교회를 어두우면서도 한없이 깊고, 중후하고, 신비로운 공간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렇게 깊고 어두운 공간에서 대부분 문맹이었던 당시 신도들은 자신들이 이해할 수 없는 라틴어로 노래되는 그레고리오 성가를 들었다. 「장미의 이름」에도 수사들이 그레고리오 성가를 부르는 장면이 나온다. 그중에 젊은 수사 역으로 출연한 세계적인 카운터 테너 안드레아스 숄의 모습도 보인다.
그레고리오 성가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성가를 말한다. ‘그레고리오 성가Cantus Gregorianus’라는 이름은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의 이름에서 나온 것이다. 전설에 의하면 그레고리우스 1세는 비둘기 형상을 한 성령이 불러 주는 선율을 받아 적어 성가를 완성했다고 한다. 중세 그림 중에도 그레고리우스 1세가 성령의 상징인 비둘기가 불러 주는 성가를 듣고, 이것을 필사가에게 받아 적도록 하는 그림이 있다. 바로 여기서 그레고리우스 1세가 그레고리오 성가를 썼다는 믿음이 생겼다. 하지만 이것은 전설에 불과하고, 실제로 성가에 대한 본격적인 정리가 이루어진 것은 그로부터 2세기 뒤였다.
옛날에 교회 성가대원들은 집중적인 음악 훈련을 받았다. 하지만 그 방법은 다소 원시적이었다. 음악을 악보로 기록하는 기보법이 발달하기 전이라 모든 것을 일일이 기억에 의존해야 했다. 당시 성가대원들은 스승이나 선배들이 부르는 것을 따라 부르는 방식으로 노래를 익혔다.
하지만 인간 기억력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성가 수가 적고, 의식 절차가 비교적 간단했던 초기에는 기억에 의존해 노래를 익히는 것이 어느 정도 가능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미사에서 부르는 성가의 수가 많아지고, 의식 내용도 복잡해졌다. 그에 따라 여러 종류의 미사에서 부르는 수많은 종류의 성가를 일일이 기억하는 것이 힘들어졌다. 미사에서 불리는 방대한 성가를 정리하고 기록할 필요가 생긴 것이다.
그레고리오 성가의 정리는 8세기경, 스콜라 칸토룸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스콜라 칸토룸이란 ‘가수들의 학교’라는 뜻으로, 이 학교를 세운 목적은 당시 구전으로만 전해 내려오던 가톨릭교회 성가들을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스콜라 칸토룸의 교육 기간은 9년이었으며, 교육을 마친 가수들은 각 교회에 파견되었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2세재위 715~731년가 통치하던 시절, 바로 이 스콜라 칸토룸을 중심으로 그동안 전해 내려오던 수많은 종류의 성가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이런 노력의 결과, 8세기 중반까지 로마 가톨릭의 특정한 전례에서 사용되는 텍스트와, 그 텍스트에 따라오는 선율들이 일정한 순서에 따라 정리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그레고리오 성가이다.
--- 「그레고리오 성가에 깃든 중세의 겨울 · 장 자크 아노 '장미의 이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