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12년 09월 2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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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353쪽 | 478g | 145*210*30mm |
ISBN13 | 9788954619134 |
ISBN10 | 8954619134 |
발행일 | 2012년 09월 2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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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353쪽 | 478g | 145*210*30mm |
ISBN13 | 9788954619134 |
ISBN10 | 8954619134 |
만(卍) 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 해설 : 다니자키 문학, 내밀한 탐미의 결정체 다니자키 준이치로 연보 |
"여자 없이는 내 시도 예술도 없다. 하얀 것, 여자, 그것은 내 육신의 어머니일 뿐 아니라 내 생활, 내 사상, 내 이념, 내 모든 것의 모체다." -다니자키 준이치로(338p)
다니자키 준이치로, 그는 일본 탐미주의 문학의 거장이라고 한다. 이 탐미주의라는 게 아름다움을 극상으로 끌어올려 주기도 하지만 그에 수반되는 쾌락이나 퇴폐적인 감정은 결코 아름답게만 다가오지는 않는다. 평생 여성을 숭배하고 여성(여체)의 아름다움에 몰두해서 작품을 써내려간 작가이니만큼 여자라면 반색할 만하다. 페미니스트 기질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한국처럼 남녀의 성차별이 오랫동안 지속하여 온 곳도 드물기에 더욱 그러할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는 유독 성에 대해 여전히 개방적이지 못하다. 그렇다고 성적 발언을 서슴없이 토로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정서적으로 과하게 기피하는 경향이 있고 내가 자라면서도 가족 간에 입 밖으로 꺼내기는 불편한 주제였다. 그렇다 보니 나이가 들어도 성에 대해 선뜻 말하기가 꺼려진다. 이에 책이라는 매개는 궁금증과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절대적 존재가 돼준다. 사람의 심리라는 게 남들이 쉽게 읽으려 하지 않는 소재나 선정적인 문구에는 더 호기심이 일기 마련이다. 세간에 오르내리고 금서가 되고 비난과 설왕설래가 끊이지 않는 작품은 더 그렇다.
여인을 향한 절대 명제-아름다움, 그 탐미적 세계를 엿보다.
<만(卍)>과 <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 두 작품 모두 남자들의 눈과 마음을 홀리는 치명적인 아름다움, 매력을 지닌 '요부'같은 여인이 등장한다. <만(卍)>은 한 여자를 두고 부부와 한 남자, 세 명의 남녀가 한 여인에게 빠져드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과연 사람의 성적 욕망의 임계점은 어디까지인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한 여자에 의해 휘둘리는 인간의 본능을 묘사하고 있다. 특히 여성의 아름다움이 이성이 아닌 동성에게까지 미치는 부분은 작가의 미에 대한 예찬은 끝이 없다는 걸 잘 나타내고 있다. 여중·여고를 졸업한 나는 이런 끌림(동성애)을 느끼는 아이들을 종종 목격하기도 했었다. 그 시절에는 딱히 이상할 것도 없었고 다른 친구들보다 조금 더 애정이 깊어서 그렇다고 받아들이곤 했다. 동성애라는 것도 일종의 '다름'으로 받아들이면 이해 못 할 것도 없더라. 하지만 <만(卍)> 안에서는 도덕적인 비난을 피해 갈 수 없을 정도로 그 수위(정신적)가 높다. 부부가 한 여자를 두고 성적 패러다임을 구현하는 격이니 말이다. <만(卍)>이 파격적인 동성애와 이성애를 그렸다면 <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 같은 경우는 제목에서 나타나듯이 모친에 대한 사모의 마음을 절절히 묘사하고 있다. 시게모토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전형을 잘 나타낸 예라고 볼 수 있다. 작가 역시 어머니에 대한 사모의 마음이 남달랐기에 작품과 실상을 동일시하는 그의 가치관이 특히나 더 잘 나타난 작품이 아닌가 한다. 타임스에서는 다니자키를 동양의 D.H. 로렌스라 칭송했는데, 우리에게 『채털리 부인의 연인』으로 유명한 D.H. 로렌스 또한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일반적이지는 않았다. 일종의 연인과 모친의 중간적인, 일반인들이 쉽게 수용하기 벅찬 기묘한 관계가 성립되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삶과 작품에 임하는 이들의 시선이 더 남달랐던 건지도 모른다.
작품과 현실의 동일시성은 창작열의 원동력.
흔히 문학이 그 시대상을 대변한다고도 하는데 다니자키 준이치로만큼은 예외라고 해야겠다. 시대상을 포착하고 투영하기보다는 그 시대를 구성하는 주체인 개개인의 욕망에 더욱 초점을 맞췄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은 철저히 개인에 의한 이야기만을 서술한다. 보다 내밀한 개인의 은밀한 욕구, 탐욕, 질투 같은 원초적 욕망을 중심으로 이끌어나가기에 다소 불편하게 다가올 수도 있다. 사람이란 욕망하면서도 그 욕망을 거울로 비춰보기는 불편해하는 게 정상이니까. 괴테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자신이 '체험하지 않은 것은 한 줄도 쓰지 않았다'고 말한 바 있다. 다니자키 준이치로 역시 그러한 작가 중 한 사람이 아닌가 한다. 그의 소설은 상당히 은밀하고 섬세하다. 그의 실생활도 소설 같다. 그가 추구하는 탐미주의 문학이 곧 예술이고 작품화한 내용대로 삶도 비슷하게 흘러간 고집스러운 에고이스트기도 했다. 자신의 예술 활동에 방해요소로 작용할까 봐 사랑하던 사람과의 아이조차 낳기를 거부했으니 말 다한 거 아니겠는가. 작품과 현실의 동일시성은 그의 창작열의 원동력이나 마찬가지다. 두 편의 작품은 그 색채가 같은 듯 다르다. 한 작품은 시종일관 주인공의 회상, 고백으로 이어지고 한 작품은 과거 존재했던 인물을 두고 작가의 상상이 가미된 작품이다. <만(卍)>은 약간의 불편함을 전제하고라도 막힘없이 읽힌다 할 수있고, <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 는 여성의 아름다움에의 탐닉이라는 주제의 일치성을 배제한다면 다른 작가의 작품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유려한 문체를 구사했기에 소재에서 오는 진부함을 뛰어넘는다. 그의 작품 세계를 선정적인 에로티시즘 소설로 볼 수도 있겠고 외설도 하나의 예술이라는 외침처럼 인정해줄 것은 인정해줄 만도 하다. 그렇다고 오해는 마시라. 이 작품집 안에는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성행위 같은 건 있지 않다. 육체적 쾌락보다는 감정적인 쾌락과 은밀함이 산재하기에 임팩트가 큰 것뿐이다.
때로 작품과 작가의 삶이 판이한 경우가 많은데, 그 이유는 만들어내는 이야기는 어떤 이상과 이상향을 추구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작품뿐 아니라 삶조차도 한 편의 소설과 다름없기에 더 호기심이 이는 작가다. 삶과 작품을 일체화한 작가이기에 그의 작품이 외설이나 난잡함의 표상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건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고, 지나치게 여성성을 부각하고 숭배시하기에 어떤 이에게는 반감을 사기도 할 것이다. 역자도 언급했듯 그의 작품 안에는 순수와 순정한 사랑은 찾아보기 어렵다. 시게모토의 어머니에 대한 마음만이 순정할까. 그 외에는 여체에 얽힌 애증과 애욕, 갈등이 주요소다. 작가의 고집스러운 에고이스트 기질은 그의 삶과 작품마저도 철저하게 개인주의로 변모시켰다. 글을 쓰는 작가라면 자신만의 독자적인 에고는 필수 불가결한 것 아닐까. 오로지 여인에 의한 작품을 구현한 그의 탐미적 예술 세계는 한 번쯤 탐독 해볼 만하다. 다니자키 준이치로, 매력적인 작가다.
탐미주의라는 것이 '미'를 최고의 가치로 하는 것은 알겠으나 그래서 그게 어떤 것이냐고 하면 선뜻 답하기가 애매하다. 미를 추구하는 것은 따지고 보면 모든 예술의 공통분모가 아닌가. 그렇다면 탐미주의는 단순히 공통으로 삼는 정도를 벗어나, 극으로 치닫는 궁극의 영역이라고 봐야 할까. 다니자키 준이치로를 치면 바로 따라오는 것이 '탐미주의'이다. 소설이 다른 목적에 눈 돌리지 않고 오직 '미'만을 추구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탐미주의야말로 오직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고 하지만, 또 달리 생각해보면 '미'를 추구하는 것은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의 근본 욕망이므로 진짜 인간을 위한 예술이라고 불러도 될까. 작품에 작가의 신념이나 사회적 인식은 전혀 배제하고 오직 미를 추구하는 인간의 이야기는 마뜩지 않지만 매력적이다.
주인공 소노코가 선생님(작가)에게 이야기하는 것을 그대로 옮겨 놓은 형식의 소설이다. 그녀는 따분한 생활에 활력을 주고자 여자기예학교에서 미술을 배우기로 한다. 하루는 모델을 세우고 관음보살을 그리는데 교장이 와서 아무래도 소노코 씨의 그림은 모델을 그리지 않는 것 같다고 말한다. 별 이상한 소리라고 생각하면서도 자신이 평소 흠모하던 옆반의 미쓰코를 떠올리던 소노코는 한번 더 그 소리를 교장에게 듣자 기분이 확 상해서 교장에게 따진다. 학교 내에서는 소노코와 미쓰코의 동성애를 의심하는 소문들이 있었고, 오히려 이 일을 계기로 둘은 실제로 친해진다. 둘의 관계는 처음에 괜찮다고 하던 남편의 의심까지 받는 상황에 이르러, 어느 날 미쓰코가 오사카의 어느 집에서 옷을 도둑맞았다며 옷을 가져다 달라고 전화를 한다. 오직 자신만을 향해 있을 것이라 믿었던 미쓰코가 다른 남자와 함께 있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소노코는 미쓰코와 연락을 끊고 일상으로 돌아가려 한다. 하지만, 이도 그리 오래 가지 못하고 다시 미쓰코를 향한 사랑을 눈을 뜨고, 또 하나의 인물 미쓰코의 남자친구 와타누키가 등장한다. 소설은 이 둘의 미쓰코를 향한 사랑과 욕망을 중심으로 각각의 관점에서 이야기가 계속 뒤바뀌면서 진행된다. 마지막으로 가서는 소노코의 남편까지 가세하면서 이야기는 걷잡을 수 없게 된다.
이 소설이 세계문학으로 고전 형식으로 출판되었고, 탐미주의니 유미주의니 하는 이미지를 업고 있어서 소설이 꽤 추상적이고 지루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 이 책은 근래 읽은 책 중에 가장 재미있는 소설이었다. 특히 아쿠타카와 류노스케의 '덤불 숲(라쇼몽)'의 구성처럼 등장인물이 말을 할 때마다 관점이 바뀌고 스토리가 달라지는 점이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한다. 첫 번째 화자가 이야기 할 때 이야기를 독자가 믿고 있으면, 두 번째 화자가 나타나 사실 그 사건은 이런 이유 때문이라고 앞의 이야기를 완전히 뒤집는다. 이것이 흥미로운 이유는 그 이야기들이 모두 하나의 완벽한 '미'의 존재, 미쓰코를 중심으로 벌어지기 때문이다. 사람이 가장 객관적일 수 없는 때는 감정에 휘둘릴 때이고, 감정에 휘둘리는 것 중에서도 사랑에 빠졌을 때 거의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 없다. 미쓰코의 말을 완전히 믿어야 하는 지 마는지도 모르는 채 흔들리는 소노코를 중심으로, 미쓰코의 남자친구이면서 성불구자인 와타누키, 미쓰코의 남편까지. 등장인물들은 오직 하나의 절대적인 '미', 미쓰코를 향한 욕망을 가지고 파멸을 향해 달려간다. 그들이 하나의 욕망을 좇는 동안 끝없는 의심과 경쟁자에 대한 증오 때문에 스스로 인간의 바닥을 드러낸다. 우리가 오직 하나의 절대적인 것을 소유하려 한다면 인간은 한편으론 그만큼 성장하면서도 결국에는 파멸에 이르고 마는 것은 아닐까.
[만(卍)]과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흡입력 강한 작품이다. 완독 후 해설까지 읽고 보니 다니자키 문학(삶)에 대한 이해가 수월해짐에 따라 그의 다른 작품에 대한 호기심이 극대화된다. 작품에 작가의 삶이 투영되기 마련이라지만, 한 치의 가감도 망설임도 찾아볼 수 없는 유려한 문체는 그야말로 놀라움 그 자체다. 그것은 심지어 다음의 착각까지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뭐지? 일기인가? 적어도 자서전적 소설(?)이라고 해도 전혀 손색이 없겠군.' 실제로 작가 자신이 고백하기도 했거니와 그의 삶 자체가 그랬다. 여성을 사모(숭배)하지 않고서는 그의 문학적 도약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는 예술에 투신하고자 하는 지독한 자기애로부터 비롯된 자신의 숙명을 일찌감치 간파한 천재 작가의 실천적 영악함과도 일맥상통한다.
[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에 이르면 그가 얼마나 일본 고전문학에 통달했는지도 알게 된다. 여체 숭배, 악마주의, 마조히즘적 색채에 가미된 구전문학의 해박함은 그것의 특성 상 몽환적 신비감은 물론이고 독자로하여금 지적 욕구를 자극할 수밖에 없다. 단순히 액면 그대로의 정보를 습득했다는 순간적 만족에 그치지 않는다는 얘기다. 이를테면 시공간적 배경, 구전문학이 성행하던 당시의 일본 사회와 일본인들의 생활상은 어땠는지 또 그에 따른 문학(예술)사는 어땠는지 등등 하나둘 발아된 궁금증은 어떤 형식으로든 그 해답을 얻기 위한 행동을 추동시키기 마련이다.
구전문학의 인물, 헤이주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들로 시작하는 소설의 큰 줄거리는 이렇다. 색광인 헤이주는 자신의 여성 편력을 은근 자랑하며 허세를 부리던 어느 날 젊은 좌대신의 장난끼 섞인 추궁에 못 이겨 한때 자신의 여자였던 미모의 양반집 부인에 대한 이야기를 흘린다. 그 후 좌대신은 그녀의 집을 수시로 방문하고, 헤이주는 왠지 모를 불안감을 감출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남편은 그녀보다 50살 연상인 80대 노인으로 좌대신은 그에게 족보상 백부였으나 신분으로는 감히 올려다보지도 못할 나무 같은 존재였던 것. 그렇게 노인은 조카뻘인 좌대신의 은밀한 계획에 말려들어 하루아침에 부인을 강탈당한 후 부정관 수행까지 감행하며 아내를 잊으려 온갖 노력을 다하지만 결국 죽고만다. 한편 아내를 잃은 당시 다섯 살이던 아들 시게모토 역시 젊고 아름다운 어머니와 생이별한 후 내내 그녀를 그리워하면서도 섣불리 찾아가거나 만날 용기를 내지 못하다가 40대가 되어서야 뭔가에 이끌리듯 깊은 산속을 거닐다 우연히 한 여승을 만나는데...
라이벌 대신의 중상으로 좌천당한 사람의 혼령의 저주로 좌대신은 물론 그의 자손까지 급사, 단명한다거나 그래도 개중에 선량한 자손에겐 자비를 내리는 점, 헤이주의 자업자득인 이른 죽음 등을 보다 보면 다분히 권선징악적이어서 일면 통쾌하기도 하다. 또 불교 용어라든가 수행 과정, 혼령에 대한 이야기와 더불어 여성을 일종의 연애 게임의 말처럼 여기는 호색한 헤이주, 아름답고 젊은 아내를 지극히 사랑하면서도 내내 안타까워하는 노인에 대한 탁월한 심리묘사는 숨도 안 쉬고 읽도록 만드는 데 큰 몫을 차지한다. 여러 가지로 매력적인 요소가 많은 작품이다. 어서 빨리 다니자키의 다른 작품을 만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