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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프롤로그 1강 고(苦) 아픈 만큼 사랑이다 2강 무상(無常) 무상을 보는 순간, 사랑에 사무친다 3강 무아(無我) 영원에도 순간에도 치우지 않아야 비로소 보이는 세상 4강 정(靜) 맑고 잔잔한 물이어야 쉽게 파문이 생긴다는 이치 5강 인연(因緣) 만들어진 인연에서 만드는 인연으로 6강 주인(主人)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것, 아니 그만둘 수 있어야 자유다 7강 애(愛) 이렇게 피곤한데 이다지도 충만하다니 8강 생(生) 아끼고 돌볼 것이 눈에 밟힌다면 에필로그 |
姜信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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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공기의 사랑’으로 압축되는 아낌의 지혜가 더욱더 요구되는 시대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낙담하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삶을 회의하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하고 있다. 심지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포기하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인간보다는 개나 고양이와 있기를 원한다. 인간이 인간에 대한 희망을, 그러니까 사랑과 연대의 희망을 포기하고 있다. 그들 옆에 그들을 사랑한다는 무수한 사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두 공기, 세 공기, 나아가 한 가마의 밥이 되어버렸고, 그것이 사랑이라고 맹신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프롤로그」중에서 타인의 고통을 느낀다는 것! ‘일체개고’의 가르침을 온몸으로 안다면, 우리는 그 일체의 것들에게 잔인하게 굴 수 없다. 오히려 그것들의 고통을 경감시켜주려는 마음을 품을 뿐만 아니라 직접적으로 고통을 줄여주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바로 이것이 사랑이다. 당연히 타인의 고통을 제대로 느끼는 사람, 같은 말이지만 타인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말과 행동으로 타인의 고통을 가중시키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게 된다. ‘혹시 내 말이 그녀를 아프게 하지 않을까?’ ‘혹시 이런 행동이 그를 속상하게 만드는 건 아닐까?’ 결국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의 진정한 슬로건은 하나일 수밖에 없다. ‘최소한 나로 인해 당신의 고통이 가중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 p.36~37 불행히도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말하고 심지어 스스로도 그렇게 믿고 있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이 바로 ‘관념적 사랑’, ‘말뿐인 사랑’, 혹은 ‘가짜 사랑’이다. (…) 가짜 사랑이 진짜 사랑 혹은 행동을 낳는 사랑과 같을 수 있을까? 타인의 고통을 온몸으로 느껴 어떻게든 그 고통을 완화시키려고 즉각적이고 자발적인 반응을 하지 않는다면 사랑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가짜 사랑 혹은 형식적인 사랑은 상대방을 낙담하게 만든다. 상대방의 고통을 사무치게 느끼지 못하기에, 상대방의 고통을 완화시키려는 모든 노력은 표적을 맞히지 못한다. --- p.40 오늘을 살면서도 오늘을 향유하지 못하는 것이 보통 우리의 삶이다. 오늘에 뛰어든다는 것은 아주 힘든 일이다. 가만히 있으면 어제 생각, 그제 생각, 내일 생각, 모레 생각이 떠오른다. 그렇지만 바로 이 순간, 오늘이라는 짐승은 자신을 잡으라고 다양한 헤르메스를 우리에게 보낸다. 그것은 태양일 수도, 바람일 수도, 꽃일 수도, 계곡일 수도, 애인일 수도, 가족일 수도, 친구일 수도 있다. --- p.62~63 도처에 모든 것이 무상을 분출하고 있지 않은가? 갓난아이티를 벗은 아이, 흰머리가 살짝 늘어난 남편, 눈가에 주름살이 얼핏 스치는 아내, 나이가 드니 창가에 누워 있기를 좋아하는 고양이, 산책 도중 양지바른 곳에 몸을 누이는 반려견, 푸른 하늘에 허허롭게 흘러가는 뭉게구름 등등. 그러니 고개 돌리지 않고 무상을 응시하고, 아무런 두려움 없이 오늘 하루를 잡아야 한다. ‘허무함’과 ‘덧없음’이 아니라 ‘충만함’과 ‘찬란함’으로 오늘 하루를 영위하려면 말이다. 무상을 느끼지 않고 우리 마음에서 어떻게 사랑이 싹틀 수 있을까. 바로 이것이 싯다르타의 마지막 가르침 ‘제행무상’이 가진 힘이다. --- p.78 책상에는 ‘앉아서 책을 보는 본질’이 존재하고, 목불에는 ‘경배를 드려야 하는 본질’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보수주의자가 되고 만다. 책상은 우리에게 앉으라고 명령하고, 목불은 자신을 경배하라고 명령하는 형국이다. 사물의 명령을 듣고 있는 이런 상황에서 무슨 자유가 있을까? 자유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가슴에 네 글자만 새기면 된다. ‘제법무아!’ 모든 존재에는 우리가 반드시 따라야만 하는 본질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액체를 담는 것을 컵의 절대적인 본질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야, 우리는 컵에 꽃을 꽂아둘 수도 있고 예쁜 구슬을 담을 수도 있다. --- p.110 중도의 길, 사랑의 길, 자비의 길에 들어서려면 균형 잡기가 필수다. 자전거를 탈 때처럼 영원 쪽으로 넘어지려 할 때는 순간 쪽으로 핸들을 틀고, 순간 쪽으로 기울어지려 할 때는 영원 쪽으로 핸들을 트는 연습을 많이 해야 한다. 변하지 않을 듯한 것에서 그렇지 않은 부분을 찾고, 변할 것 같은 것에서 그렇지 않은 부분을 찾자. 영원하지도 않고 순간적이지도 않은 존재의 실상을 파악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중도의 길, 사랑의 길, 그리고 자비의 길을 걸을 수 없기 때문이다. --- p.132 마주침의 지속과 반복이 위험한 이유는 분명하다. 다른 마주침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을 잊게 하기 때문이다. 다른 마주침의 가능성에 열려 있어야, 우리는 지금 자신이 반복하는 마주침을 성찰하고 반성할 수 있다. 이 사람과 계속 사는 것이 나를 유쾌하고 행복하게 만드는가? 이 학교에 계속 다니는 것이 나를 성장시키고 아름답게 만드는가? 이 직장에 계속 다니는 것이 나의 미래에 희망을 던지는가? 사회의 선과 악이 아니라 나의 좋음과 기쁨이 가치 평가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반복되는 마주침이 새롭게 일어날 수 있는 마주침들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 p.215 어느 순간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해주고, 또 어느 순간 상대방이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것을 해준다. 바로 이것이 사랑이고 배려다. 일방적인 배려, 일방적인 사랑, 다시 말해 “노!”라고 말할 수 없는 배려나 사랑이 진정한 배려나 사랑이 아닌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배려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를 배려할 때에만, 그것이 진짜 배려다. 배려를 하지 않을 수 없어서 누군가를 배려하는 경우, 이것은 가짜 배려이고 심하게 말하면 굴종이나 복종일 수밖에 없다. --- p.261 너를 부리기보다는 나 자신을 부리겠다는 것! 너를 수고스럽게 만들기보다는 나 자신을 수고스럽게 하겠다는 것! 너의 몸을 움직이게 만들기보다는 나 자신의 몸을 움직이겠다는 것! 너는 쉬고 내가 움직이겠다는 것! 그래서 너의 수고와 고통을 내게로 고스란히 가져오겠다는 것! 바로 이것이 ‘아낌’이라는 개념이 말이나 정서에만 머물기 쉬운 ‘사랑’이라는 개념과 달라지는 지점이다. 아낌은 그 사람 대신, 혹은 그 사람을 위해 기꺼이 감당하는 수고와 노동, 즉 사랑을 증명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 p.287~277 무엇이든 애지중지하는 대상이 있다는 것은 정말 행복한 일이다. 어쨌든 애지중지하는 대상은 그 존재만으로 우리 삶을 기쁨으로 물들이고, 우리 삶에 의미를 제공하며, 우리 삶을 활기차게 한다. 어떤 것도 아끼는 것이 없다고 생각해보라. 삶은 짙은 잿빛으로 우울하게 변할 것이고, 그러한 삶을 사는 우리는 심각한 우울과 무기력에 빠지고 말 것이다. 문제는 애지중지하는 대상이 인간일 때 발생한다. 타인을 아낀다는 것은 그를 대신해 그의 수고를, 그의 고통을, 그리고 그의 노동을 감내하며 기뻐하고 행복해하는 일이다. 누군가의 짐을 짊어지고 심지어 그 사람을 업으면서도 미소가 얼굴에서 떠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끼는 사람을 최소한 한 명 가진 셈이다. --- p.301 우리 각자에게 아끼는 대상이 어머니일 수도, 아버지일 수도, 아내일 수도, 남편일 수도, 아이일 수도, 친구일 수도, 반려견일 수도, 반려묘일 수도, 아니면 화초일 수도 있다. 아끼는 대상이 무엇이든 우리는 그것의 행복에 있어 ‘한 공기의 연’일 뿐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농부의 물꼬 트기처럼 이 ‘한 공기의 연’을 우리가 채우지 못하면, 아끼는 사람의 삶은 불행에 빠진다. 그러니 좋은 공기, 맛있는 음식, 쾌적한 잠자리, 따뜻한 태양, 싱그러운 바람, 아름다운 음악, 근사한 영화, 멋진 식당, 의사와 간호사, 친구들 등등이 아끼는 사람에게 건강한 연이 되어줄 때, 우리는 충분히 쉬어야 한다. 잘 쉬고 맛있는 것을 먹고 잠도 잘 자야 한다. 우리에게는 ‘한 공기의 연’을 채워야 할 때가 찾아오기 때문이다. --- p.327 사랑도 삶도 행복도 그리고 자유도 ‘이만하면’이라는 말로 가늠할 수 있는 양적인 문제가 아니라 질적인 문제다. 사랑했거나 사랑하지 않았거나, 제대로 살았거나 그러지 못했거나, 행복했거나 행복하지 않았거나, 자유롭거나 자유롭지 않았거나. 이제 ‘이만하면’이라는 말을 우리 삶의 사전에서 지우도록 하자. 사랑도 삶도 행복도 그리고 자유도 남들의 시선이나 평가, 재산이나 소비수준과는 무관하게 전적으로 질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잘 사랑하려면, 제대로 살려면, 정말 행복하려면, 그리고 자유로우려면, 우리는 ‘이만하면’이라는 전제를 붙인 너저분한 자기만족과 정신 승리에 함몰되어서는 안 된다. 차라리 사랑도 삶도 행복도 그리고 자유도 아직까지 제대로 영위하지 못했다고, 아직도 부족하다고 이야기하자. 그래야 우리에게는 제대로 사랑하고, 제대로 살아가고, 제대로 행복하고, 제대로 자유로울 수 있는 희망이 생길 수 있다. --- p.342~343 |
불교 철학의 여덟 가지 키워드와 여덟 편의 시,
동서양의 중요한 철학적 사유를 통해 ‘한 공기의 사랑’과 ‘아낌의 정신’을 배우다 이 책은 고(苦), 무상(無常), 무아(無我), 정(靜), 인연(因緣), 주인(主人), 애(愛), 생(生)을 키워드로 하여 ‘한 공기의 사랑과 아낌의 정신’을 이야기한다. 김선우 시인의 시 8편으로 각 주제를 열어, 싯다르타와 나가르주나, 임제, 백장 등 불교 사유와 함께 동서양 과거와 현재의 중요한 철학적 사유를 종횡으로 아우르며 주제의 핵심에 다가간다. 1강 ‘고(苦); 아픈 만큼 사랑이다’에서는 사랑의 바로미터인 고통의 감수성을 이야기한다. 우리 삶이 ‘고통’인 이유, 그 고통을 완화하는 것이 ‘행복’이며, 상대의 고통을 완화시켜주려 하는 것이 바로 ‘사랑’임을 사물(四物)과 공양(供養)의 의미, 모리스 메를로-퐁티의 최소 폭력과 연결 지어 살펴본다. 2강 ‘무상(無常); 무상을 보는 순간, 사랑에 사무친다’에서는 ‘덧없음’이나 ‘허무함’이 아니라 언젠가 사라질 것을 대하는 ‘지금’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준다. 무상의 감각과 대비되는 ‘영원’에 대한 집착, 니체의 ‘영원 회귀’를 통해 무상의 의미에 깊숙이 들어간다. 3강 ‘무아(無我); 영원에도 순간에도 치우치지 않아야 비로소 보이는 세상’에서는 본질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사고하는 ‘제법무아’의 가르침, 단견에도 상견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도(中道)’를 통해 사랑과 자비의 길을 역설한다. 4강 ‘정(靜); 맑고 잔잔한 물이어야 쉽게 파문이 생긴다는 이치’에서는 들끓는 마음과 고요한 물과 같은 마음을 통해 번뇌와 망집의 뿌리를 짚어보고, 혜능이 말한 ‘때가 끼지 않고 틀이 없는 마음’, 원효가 말한 ‘생멸문과 진여문’, 열반에 이르면 열반에 머물 수 없는 까닭을 통해 타인의 마음과 세상에 반응할 수 있는 인간을 그려본다. 5강 ‘인연(因緣); 만들어진 인연에서 만드는 인연으로’에서는 연기의 논리, 인연의 논리, 인과의 논리를 통해 ‘생성’을 살펴보고, 질 들뢰즈의 ‘아장스망’, 혜능의 첫 설법 등을 통해 우리 존재가 어떤 인연들로 구성되는지, 좋은 인연과 나쁜 인연은 무엇인지 이야기한다. 6강 ‘주인(主人);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것, 아니 그만둘 수 있어야 자유다’에서는 주인으로 영위하는 삶, “노”라고 말할 수 있는 자유, 스피노자의 ‘기쁨과 슬픔의 관계’, 임제의 ‘수처작주 입처개진’을 통해 ‘진짜 세계’에서 ‘진짜 나’로서 살아가는 법을 말한다. 7강 ‘애(愛); 이렇게 피곤한데 이다지도 충만하다니’에서는 상대의 고통과 수고로움을 모두 감당하고자 하는 ‘아낌’의 마음을 ‘자중자애와 애지중지’. 백장 스님의 ‘일일부작 일일불식’을 통해 살펴본다. 8강 ‘생(生); 아끼고 돌볼 것이 눈에 밟힌다면’에서는 아낌의 자유 ‘사랑=자유’, 아낌의 언어 ‘네가 있는 것만으로 좋아’, 아낌의 예술 ‘연기의 지혜로’, 아낌의 마음 ‘물망 물조장’을 통해 이제까지의 논의를 아우르며 ‘아낌’의 핵심에 다가간다. 각 장의 말미에서는 ‘착수처’를 제시하여, 지금보다 더욱 성숙하게 ‘아낌’을 실천할 수 있도록 독자를 이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한 공기의 밥이 되도록 온몸을 다시 만드는 일, 그것은 감성과 지성, 혹은 심장과 머리를 통째로 바꾸는 일이다” 어머니는 아이가 배고파하면 한 공기의 밥을 준다. 아이는 한 공기의 밥을 먹으면 배고픔이 충분히 해소된다. 시간이 지나 아이가 다시 배고픔을 느낄 때 또 한 공기를 먹으면 배고픔의 고통이 사라진다. 그런데 어머니가 아이에게 한 번에 두 공기, 세 공기, 아니 한 가마의 밥을 먹이려 한다면 어떨까? 아이는 배고픔의 고통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배부름의 고통을 느끼게 될 것이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에게 한 공기의 밥과 같은 존재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한 공기만큼의 사랑이 필요할 때 우리는 딱 그만큼을 채워주는 사랑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철학자 강신주가 말하는 ‘고통의 감수성’에 기반한 ‘한 공기의 사랑’이다. 1강의 주제 ‘고(苦)’에서부터 8강의 주제 ‘생(生)’에 이르기까지 각 키워드는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을 하려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어떻게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 진짜 사랑을 할 수 있는가’를 깊이 다루고 있다. 아낌, 사랑 그 이상의 의미 ‘애’가 ‘사랑’으로 완전히 번역되지 않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애’는 ‘사랑’이라는 뜻에 ‘아낌’이라는 뜻을 더해야 제대로 읽히는 글자이니까. ‘너를 아낀다!’는 말은 ‘나는 너를 함부로 부리지 않는다’는 의미, 극단적으로 말해 ‘나는 너를 쓰지 않고 모셔두겠다’는 의미다. ―「7강 애(愛) 이렇게 피곤한데 이다지도 충만하다니」 중에서 “받았으니 주려고 하거나 주었기에 받으려고 하는 자본주의적 태도, 혹은 ‘기브 앤드 테이크(give & take)’의 효율성에 온몸으로 저항하려는 의지, 이것이 아니면 아낌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철학자 강신주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우리나라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된 이래 그 의미가 희석되고 남용되는 것을 되짚어보면서, ‘애(愛)’의 진정한 의미를 담은 ‘아낌’이라는 단어에 주목한다.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는 친구의 관계, 연인의 관계를 비롯해 부모와 자식 등 가족의 관계마저 ‘기브 앤드 테이크’의 관계가 되기 쉽다. 이 책에서 말하는 ‘아낌’은 사랑 이상의 의미를 담은 단어로서 우리 모두가 하나의 타자에게만큼은 부처가 되고, 시인이 되고, 철학자가 되는, ‘기브 앤드 기브 앤드 (…)’의 삶으로 나아가는 방법이다. “사랑은 행동으로 증명되어야 할 그 무엇, 반드시 몸으로 드러나야만 하는 그 무엇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