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우리 사회의 페미니즘이 성차에 대한 문제 제기를 ‘넘어’ 사회 현상 자체를 파악하는 주요한 장치로서, ‘절망 사회’의 대안적 인식론으로서, 상상력의 마르지 않는 수원(水源)으로서 자리 잡기를 기대한다. 여성주의는 “흘러간 사상”, “한때의 유행”이 될 수 없는 사유다. 여성주의는 고갈되지 않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유유한 수원이다. 현실이 바로 그 수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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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안다는 것은 상처받는 일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안다는 것, 더구나 결정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삭제된 역사를 알게 된다는 것은, 무지로 인해 보호받아 온 자신의 삶에 대한 부끄러움, 사회에 대한 분노, 소통의 절망 때문에 상처받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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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누구나 소수자이며, 어느 누구도 모든 면에서 완벽한 ‘진골’일 수는 없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는 성별과 계급뿐만 아니라 지역, 학벌, 학력, 외모, 장애, 성적 지향, 나이 등에 따라 누구나 한 가지 이상 차별과 타자성을 경험한다. 중심과 주변의 이분법 속에서 자신을 당연한 주류 혹은 주변으로 동일시하지 말고, 자기 내부의 타자성을 찾아내고 소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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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까지 여성은 인식 주체가 아니었다. 따라서 세계를 창조할 수 없었다. 단지, 말해지는 대상, 남자 갈비뼈의 한 조각, 남자가 만든 판타지, 국민, 시민, 민중이 아니라 그들이 소유한 가장 비싼 동산(動産)일 뿐이었다. 여성의 시각에서 보면 기존 언어의 내용은 물론이고, 담론의 형성 구도 자체가 붕괴된다. 여성이 인식 주체가 되면 노동자가 생산 수단을 소유하는 것보다 더 ‘근본적으로’ 세계가 흔들리고 새롭게 재구성되기 시작한다. 그러니, 어찌 여성주의가 위험하지 않을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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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페미니즘은 저항이론, 저항운동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자본주의가 생겨난 지 3백 년도 안 되었지만, 한국에 자본주의가 들어온 지 1백 년도 안 되었지만, 자본주의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거의 없다. 하물며 수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가부장제의 위력으로부터 그 누가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페미니즘은 협상, 생존, 공존을 위한 운동이다. 여성운동은 남자 시스템에 저항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남성의 세계관과 경험만을 보편적인 인간의 역사로 만드는 힘을 조금 상대화시키자는 것이다. 남성의 삶이 인간 경험의 일부이듯, 이제까지 드러나지 않았던 여성의 경험도 인간 역사의 일부임을 호소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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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장애인, 동성애자……라는 사회적 위치와 삶의 경험은, 주류의 시각에서 보면 열등함의 근원이고 극복되어야 할 장애이다. 그러나 반대로 억압받는 자의 시각에서 기존 사회를 보면, 이들의 타자성은 새로운 사회에 대한 상상력과 지성을 가능하게 하는 자원이 된다(이것이 바로 모든 탈식민주의 사유의 출발점이다). 그래서 주류의 언어를 규범으로 생각하고 열심히 익힐수록 이들은 더욱 열등해지지만, 이들이 자신의 경험과 노동에 근거하여 자기 언어를 갖기 시작하면 말할 수 없이 ‘똑똑해진다’. 저항할수록 권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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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운동은 사회 안에서 여성의 지위를 논하자는 것이 아니다. 여성의 시각으로 사회·역사·정치를 재구성하자는 것이다. 여성, 장애인, 동성애자의 문제는 기존의 공적 영역 중심의 협소한 정치 개념을 바꾸지 않고서는 설명할 수 없다. 이제까지 여성은 역사 밖에, 여성 문제는 정치 밖에 존재했다.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 등 기존의 정치 전선 자체가 남성의 관심사에 의해 설정된 것이기 때문이다.
--- p.158
폭력은 이유가 없다. 권력 행동에 무슨 이유가 있겠는가. 폭력에 이유가 있다면, 그것을 가능케 하는 조건이 있을 뿐이다. …… 사랑이나 폭력은 모두 자기 확신 행위이지 상대방의 매력이나 잘못과는 무관하다. 이렇게 본다면, ‘묻지마 폭력’의 이유는 단지 피해자가 ‘거기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피해자의 잘못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폭력의 시비와 정의를 분석하려는 시도에서 폭력을 둘러싼 사회적 조건을 고찰하는 시각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 p.2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