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몇 년이 지나자 이탈리아는 수공예 가죽 구두와 핸드백, 섬세한 금 장신구를 비롯한 품질 좋은 고급 제품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구찌는 유럽 최초의 신분 과시용 브랜드 중 하나였어요. 전쟁으로 오랫동안 좋은 물건을 소유하지 못했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경제력과 신분을 마음껏 과시하고 싶어 했죠. 내가 구찌라는 브랜드를 처음 알게 된 것도 그 무렵이었어요. 당시 사람들은 구찌 제품은 가격에 맞는 품질을 제공한다고 생각했었죠.”
--- p.53, 「‘구찌 왕조’의 시작」 중에서
“꽃으로 가득한 스카프를 디자인해 주세요! 일차원적인 디자인 말고 꽃이 쏟아져 나올 것 같은 디자인이 필요해요. 어떤 방향에서 보더라도 꽃이 보이는 스카프 말이에요.”
얼마 후 그는 로돌포가 상상한 대로 화려한 꽃이 넘쳐나는 디자인을 완성해 들고 왔다. 로돌포는 밀라노 인근의 코모에서 활동하는 피오리오(Fiorio)에게 가로세로 90센티미터짜리 대형 스카프에 꽃 도안을 인쇄해 달라고 의뢰했다. 이탈리아 최고의 실크 인쇄 기술자로 꼽히던 피오리오는 실크스크린과 비슷한 기법을 개발해 한 번에 40가지가 넘는 색상을 번짐 없이 인쇄해냈다. 스카프가 완성되자 로돌포는 인편으로 왕비에게 전했다.
현재 최초의 스카프 디자인과 제품 자체의 행방은 묘연하지만 당시 시도한 플로라 디자인은 구찌 실크 제품의 확장을 이끌었으며 나중에 의류나 가방, 부속품은 물론 장신구에까지 응용되었다. 좀 더 작은 미니플로라 스카프 역시 인기를 끌었으며, 몇 년 뒤 플로라 디자인은 더 가벼운 소재의 갖가지 의류를 출시하는 발판이 되었다.
--- pp.76~77, 「미국에 진출한 구찌」 중에서
새로운 제품군은 구찌 액세서리 컬렉션(Gucci Accessories Collection: GAC)이라 불렸다. 로베르토는 피렌체에서 GAC의 경영을 담당했고 알도는 뉴욕에서 제품 개발을 지휘했다. 새로운 제품군에는 화장품 가방과 토트백뿐 아니라 구찌의 특징으로 자리 잡은 갈색 또는 암청색 돈피와 그에 어울리는 줄무늬 끈으로 테를 두른 더블 G 모노그램이 프린트된 캔버스백도 포함되었다. 이 컬렉션은 GAC 또는 ‘캔버스’ 컬렉션으로 알려졌다. 구찌의 핸드메이드가죽 가방이나 패션 소품보다 제작비용이 낮았던 GAC 제품들은 구찌라는 이름을 더 많은 소비자에게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출시되었다. 향수 매장과 백화점에서 구찌의 화장품 가방과 토트백을 구찌 향수와 함께 판매한다는 전략이었다. GAC는 분명 좋은 의도에서 출발했고 용의주도하게 설계된 데다 1979년의 시대정신에도 부합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결국에는 사업 안정성과 가족의 우애를 깨뜨리는 요인이 되었다.
--- p.135, 「가족 간의 경쟁」 중에서
사실 구찌 브랜드의 가치는 이미 오래전에 땅에 떨어진 상태였다. 맞물린 형태의 G 로고가 들어 간 캔버스백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을 만큼 흔했다. 1980년대 후반에는 구찌 운동화가 마약상들 사이에서 유행했고, 구찌에 대한 랩을 담은 힙합이 인기를 끌기도 했다. 마우리치오는 훼손된 구찌 브랜드의 이미지를 바로잡아 호화로움과 품질, 스타일의 상징이던 그 영광의 시절을 부활시키고 싶었다.
“저는 구찌의 전성기를 기억하는 사람이, 구찌가 다시 전성기를 맞이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구찌라는 회사의 본질을 이해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멜로 씨가 바로 그 적임자입니다!”
--- p.296, 「구찌를 바꾼 미국인들」 중에서
인베스트코프가 1991년 1월 연례 경영위원회 회의에서 검토한 구찌의 경영 실적은 암울했다. 매출이 20% 가까이 떨어졌고 이익은 실종되었으며 단기 전망은 한층 더 비관적이었다. 구찌는 수천만 달러의 손실을 입었다. 인베스트코프의 임원이자 구찌 업무에 점점 더 많은 시간을 쏟아부었던 플란츠는 이렇게 묘사했다.
“구찌는 하강 기류 속으로 들어간 비행기 같았어요. 6,000만 달러(약 655억 원) 정도 이익을 내던 회사에서 불과 몇 년 사이에 6,000만 달러의 손실을 내는 회사로 추락했습니다.”
--- p.367, 「결별」 중에서
1993년 가을, 파트리치아는 마우리치오가 회사의 지배권을 잃을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를 대신해 나섰다. 남편을 돕기 위해서가 아니라 딸들을 위해 구찌를 지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이 구찌와 인베스트코프 사이에서 중재자로 활약했고, 수많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마우리치오에게 명예 회장 자리를 수락하고 경영에서 손을 떼라고 설득했지만 그가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를 도와 지분을 되찾을 돈을 구하려 애썼고, 변호사 피에로 주세페 파로디를 보낸 것도 자신”이라고 주장했다. 파로디는 구찌 지분이 경매에 붙여지는 것을 막기 위해 마우리치오와 조르지를 연결해 막판에 자금 조달을 주선한 인물이다.
마우리치오가 인베스트코프와의 싸움에서 패해 구찌 지분 50%를 매각해야 했을 때 파트리치아는 자기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큰 충격을 받고 남편에게 소리쳤다.
“당신 미쳤어? 그건 당신이 벌인 짓 중에서도 가장 미친 짓이야!”
구찌가 인베스트코프에 넘어간 일은 그녀에게 또 하나의 곪은 상처였다. 한때 그녀의 친구였던 피나 아우리엠마는 이렇게 말했다.
“그녀에게 구찌는 모든 것을 상징했어요. 그녀와 딸들에게는 돈이자, 권력이자, 정체성이었거든요.”
--- p.443, 「호화로운 생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