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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사람이여, 죽지 마라 | 김주희
위폐와 튤립 | 양선형 집 | 위수정 타임캡슐 | 윤성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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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 정치철학자인 낸시 프레이저는 지금 우리가 직면한 문제적 사회 시스템에 대해 ‘식인 자본주의Cannibal capitalism’라는 이름을 붙인 바 있다. 그것은 생산 영역에서의 착취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외부의 사회적 영역 또한 수탈하는, 마치 제 꼬리를 먹으며 자멸하는 뱀과 같다. 또한 살이 찌다가 더는 먹을 것이 없어 이내 자멸하는 자본주의를 설명하기에 무척이나 적절한 묘사가 아닐 수 없다. 일상의 재생산을 빚에 의존하는 이들을 계속적으로 포섭하는 금융기관과 오직 부채복지만을 제공하는 국가의 공모 시스템은 무척이나 식인적이다. 결국 채무자는 살을 뜯어먹히지만 죽을 수 없는 살아 있는 시체living dead의 대표 격이다. 선희 언니를 비롯하여 대항 투쟁의 새로운 얼굴에 주목해야 할 때다.
---p.11 김주희, 「가난한 사람이여, 죽지 마라」 중에서 채권자들은 내가 건강하기를 바라. 내가 안락하고 근면하기를 바라지. 채권자들이 질색하고 두려워하는 훗날의 상황이란 내 죽음이나 실종, 내 방황이나 무기력, 내 질병이나 변덕스러움일 거야. 내 무탈한 생존과 믿음직한 노동의 나날들, 내가 나를 책임지고 건사하기 위해 수행하는 온갖 기특한 활동들이 미래에 그들이 취득하게 될 이자와 동일해지기 때문이지.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하는 인간, 스스로의 삶에 대한 의욕적이며 면밀한 청사진까지 갖춘 건전한 인간이야말로 원리금을 무해하게 징수할 채무자의 모범적인 형상이라고 할 수 있겠지. 채권자들은 내가 영원히 살아남아 내게 주어진 영원한 시간을 돈으로 환산하길 원해. 숨만 간신히 붙은 채로 껄떡거리는 피 묻은 고깃덩어리나 얼굴에 산소호흡기를 장착한 식물인간으로 변신하는 게 내가 채권자들에게 가하는 가장 충격적인 악몽이자 복수일 거야. ---p.40 양선형, 「위폐와 튤립」 중에서 나는 매일 현금인출기를 찾아 돈을 뽑았다. 하루에 출금 가능 한도가 정해져 있어 매일 한도만큼 뽑아 가방 깊숙이 넣어두었다. (……) 뜨거운 태양 아래 발바닥이 아리도록 걸어다녔지만 즐거웠다. 시계를 보면 언제나 그곳은 밤이거나 새벽이었다. 부모들은 잠에 빠져 있을 시간. 내게 전화하지 않을 시간. 부모는 내게 빚을 나누어주었다. 나는 내가 써본 적도 없는 면 그만이었다. 돈을 갚아야 했다. 부모는 빚과 함께 성실함을 물려주었다. 게으름을 피우면 죄를 짓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녕. 정말 안녕. 그런데도 자꾸 부모 생각이 났다. 전화라도 해볼까 하고 시계를 보면 그곳은 늦은 밤이나 새벽. 나는 불안과 안도를 반복하다가…… 이제는 희미해지고 있음을 느꼈다. ---pp.66-67 위수정, 「집」 중에서 나는 많이 훔치지 않았어. 은행이 하루에 버는 돈이 얼마인지 알면 그건 정말 먼지 같은 수준이야. 그러니까, 0에 가까운 거야. 아마 없어진 줄도 모를걸. 나는 농담하듯, 정말 별것 아니라는 느낌으로 말하려고 노력했다. 최대한 가볍게. 노래하듯이. 허밍하듯이. 그래서 위스키도 많이 마셨는데.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귓불이 달아오르지 않도록. ---pp.86-87 위수정, 「집」 중에서 기하 아저씨는 이십대 후반에 사업을 하다 크게 실패를 해서 죽으려던 적이 있었다고 덧붙였다. 빚이 불어나고 불어나 도저히 갚을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고. 죽기 전에 맛있는 밥이나 먹자는 생각에 혼자 고깃집에 갔다. 식사시간이 아니어서 손님이 한 명도 없었는데, 가게 주인이 홀에 앉아서 배구 경기를 보고 있었다. 삼겹살 이 인분을 주문하고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아저씨도 배구 경기를 보았다. 어느 선수가 서브를 넣기 위해 교체 선수로 들어갔는데 그만 같은 팀 선수의 뒤통수를 맞히고 말았다. 뒤통수를 맞은 선수가 바닥에 주저앉아 한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그걸 보는데 갑자기 니 고모가 생각났어. 이마의 흉터를 만져봤는데 이상하게 용기가 나더라. 그래서 재기할 수 있었어.” 나는 기하 아저씨에게 사업만 하면 실패를 하는 우리 아빠에게 흉터를 한 번만 만질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부탁했다. 기하 아저씨가 그렇게 해주겠다고 했다. (……)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어째서 고모는 꽈배기 장사를 하게 되었어요?” 아저씨가 물었다. “인생이 자꾸 꼬여서 그랬대요. 그럴 바에는 꽈배기나 꼬면서 사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대요. 참, 생일이 언제예요? 생일날 고모네 가게에 가면 열 번 꼬아서 만든 기다린 꽈배를 만들어줘요. 꼭 가서 먹어봐요.” 내 말에 기하 아저씨가 다음 주가 생일이니 꼭 가보겠다고 대답했다. ---p.82 윤성희, 「타임캡슐」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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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타인이 어떻게 느끼는지를 직접 알려줄 수는 없지만, 그들이 처한 상황에서 우리가 어떻게 느낄지를 상상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야기가 가지는 공감의 힘일 것입니다. 추상적인 논증은 어느 정도 배경지식을 일러줄 수 있지만, 이야기야말로 오히려 직접적이고 절실하게 핵심을 보여줍니다.
소설잡지 『긋닛』은 그런 이야기의 힘을 믿습니다. 이야기는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이 세계와, 거기에 분명히 있지만 잘 보이지 않고 보지 않으려 하는 세계를 연결해 보입니다. 『긋닛』은 우리 시대에 간과할 수 없는 특정한 주제와 키워드를 중심으로, 한 편의 주제 에세이와 세 편의 단편소설을 엮어 독자들에게 선보입니다. * 2023년 2분기 가계부채는 1862조원을 넘어 지난 분기 말 대비 9조5000억원이 증가했으며, 가계들의 상환 능력은 계속해서 떨어지고 있습니다. 8월 5대 은행의 가계대출은 1년 9개월 만에 가장 큰 폭으로 뛰어, 이달(2023년 9월) 초금융권에 따르면, 5대 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의 지난달 말 가계대출 잔액은 680조 8,120억 원으로 집계됐습니다. 이는 7월 말(679조 2,208억 원)과 비교해 한 달 만에 1조 5,912억 원 늘어난 규모이며, 가계대출 잔액은 5월 이후 4개월 연속으로 증가해, 8월 증가 폭은 2021년 11월(2조 3,622억원) 이후 1년 9개월 만에 가장 컸다고 합니다. 특히 최근 가계대출 증가세를 주도하는 주택담보대출의 경우 8월에만 2조1,122억원(512조8,875억원 → 514조9,997억원)이나 뛰어, 주택담보대출 월별 증가액이 2조원을 넘어선 것은 2022년 12월(2조 3,782억원) 이래 8개월 만에 처음이라고 합니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가계부채 규모는 100퍼센트를 돌파, 국제통화기금(IMF)이 경고하는 ‘레드라인’도 넘어선 상황으로, 9월 위기설이 불거지고, 10월 위기설, 12월 위기설이 만들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긋닛』 5호는 ‘빚’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한국 경제를 위협하는 큰 위험 요인 중 하나인 가계부채가 ‘시한폭탄’으로 언급된 것은 벌써 20년 전, 이제 이 폭탄이 터지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 아니라, 규모가 커진 만큼 그 폭발력 또한 걷잡을 수 없으리라는 전문가들의 전망입니다. 최근 연이어 오르는 대출금리와 환율 인상 등으로 인해 빚은 점점 더 늘어가고, 빚을 갚기를 포기하는 이들, 젊은 세대의 채무불이행 등의 문제도 이미 최근의 일은 아닙니다. 학자금대출을 시작으로 이십대가 되면서 이미 ‘빚쟁이’가 되어 살아가는 지금-현재의 우리들. 『긋닛』 5호는 국민들 대부분의 문제가 되어버린 ‘빚’이라는 주제를 둘러싼 우리의 삶에 대한 개성있고 문제적인 이야기 3편을 선보입니다. 김주희 덕성여대 차미리사교양대학 교수의 주제 에세이 「가난한 사람이여, 죽지 마라」는 현장활동가로서 저자가 직접 겪은 에피소드로 시작합니다. 가난하기 때문에 오히려 죽을 수도 없는, 결코 죽어서는 안 되는 가난한 이들의 삶은 결국 채권자와 금융기관의 몸집을 불리는 먹잇감이 되고, 가난 극복을 미끼로 가난한 사람을 포섭하여 이들로부터 수익을 얻는 자들의 이중성은 자연스레 빚의 속성에 대해 생각하게 합니다. 결국 살을 뜯어먹히지만 죽을 수 없는 살아 있는 시체living dead가 되어버리고 마는 채무자의 현실을 잘 보여주는 동시에, 앞으로 우리가 나아갈 바에 대해 다시금 고민하게 하는 글입니다. 양선형의 소설 「위폐와 튤립」은 작가 특유의 개성이 잘 드러나 있는 작품입니다. 우화처럼 읽히기도 소설가소설로 읽히기도, 또 독자에게 직접 말을 거는 듯도 읽히는 독특한 형식의 소설을 써내려가는 정갈한 문장은 특유의 리듬을 만들어냅니다. 그 리듬을 따라 생겨나는 이야기 속에서, 저자는 자연스레 주제를 드러내어 보입니다. 종이보다 가치가 떨어진 화폐, 그 무가치한 종잇조각을 짊어지고 사는 우리의 현실에 대해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고민하는 작품입니다. 위수정의 소설 「집」은 가난과 성실함을 물려받은 화자의 이야기입니다. 어쩌면 대다수의 우리가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연인과 먼 곳을 여행하는 며칠의 이야기 속에서 독자는 자연스레 화자가 떠나온 곳에서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 알게 됩니다. 연인만을 왔던 곳으로 돌려보낸 화자가 편히 쉴 곳은 어디일지 모르겠습니다. 작가노트에서 밝히고 있는 작가의 질문, “우리가 갚아야 할 것과 그것을 갚기 위해 들이는 노력은 우리가 빌린 것의 가치와 동일한가. 얼마나 차이가 있을까. 가치라는 것은 무엇일까”는, 어쩌면 매일같이 우리가 고민하는 질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윤성희의 소설 「타임캡슐」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짓게 만드는 따뜻한 작품입니다. ‘빚’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배경으로 두고도, 언제나 인간과 삶에 대한 긍정으로 나아가는 이야기를 선보이는 작가의 특장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빚에 쫓겨 어쩔 수 없이 귀촌한 아버지를 따라 내려간 시골집 마당에 설치한 게르에서 눈을 뜨며, 게르의 구멍 사이로 보이는 하늘을 두고 “별 같네”라고 중얼거릴 화자를 따라, 조그맣게 따라 말해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