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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현
황금알 2024.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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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알 시인선

목차

1부

점點 · 10
환장할 봄날 · 12
여름비 · 14
선방에 들이기 전 · 16
비결 · 18
그네 · 20
살생 · 22
당신 · 24
무위진인無位眞人 · 26
꽃게 · 28
나비 한 마리 머물다 · 30
금장대 나룻배 · 32
계곡물 · 34
부도浮圖 · 36
은행나무 · 38
팬데믹 · 40
화두 · 42
바람을 엮다 · 44
편식 · 46
퍽치기 · 48
불면증 · 50
화장터에서 · 52
꽃이 꽃으로 보이질 않는다 · 54
낚시 · 56
운명 · 58

2부

자화상 · 62
감자꽃 · 64
동백꽃 · 66
지심도只心島 · 68
파도 · 70
친정엄마 · 72
바람 들다 · 74
아버지 · 76
온난화溫暖化 · 78
핵폭탄 · 80
유산 · 82
요즘 뉴스 · 84
보물찾기 · 86
칼의 소리 · 88
고기잡이 · 90
그들만의 법 · 92
오후 불식 · 94
푸른 사랑법 · 96
하마터면 · 98
바다 사막 · 100
즐거운 식사 · 102
즐거운 술 · 104
동안거 · 106
춤 · 108
시詩 한 갑 · 110

해설 | 오민석_무슨 종이냐고 누가 묻거든 · 114

저자 소개 1

Poet Lee, Jeong-Hyun

1964년 강원도 횡성에서 태어나 동국대 대학원 선학과를 졸업하고, 2007년 『수필춘추』(수필) 2016년 『계간문예 』(시)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살아가는 즐거움』 『춤명상』 『풀다』 등과 시선집 『라캉의 여자』, 평론집 『60년대 시인 깊이 읽기』, 산문집 『내 안에 숨겨진 나』가 있다. 문학비평가협회상, 문협서울시문학상, 수필춘추문학상, 한국시원시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관공서, 동국대 평생교육원에서 요가와 명상을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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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4년 04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128쪽 | 192g | 128*210*8mm
ISBN13
9791168150775

책 속으로

나를 위한 면적이 필요하다고 애원했지만 꿈쩍 않던 그가
디큐브아트센터 10분 거리의 위치에서 먹고 자게 하더니만
점·점·점들이 방출할 때의 숨소리를 읽으라 하였다
역의 출구마다 쏟아지는 점들의 아우성,
눈알보다 바쁘게, 마치 거리의 화면을 꽉 채운 비가
대사를 외듯
움직임이 언어보다 빠르다






오고 감이 없다는 말 집어 던지고
들숨으로 멈춤 한 채, 그에게 따지려니

그가 사람들 틈에서 졸고 있다, 점인 채로
움직임이 요란타

선문답식 노트 :
암두巖頭 이르시길
‘물物을 물리침이 상上이 되고, 물物을 좇음이 하下가 된다’ 하시기에.
--- 「1부, 점點」

꽃무릇 피기 시작할 때부터 수상쩍더니

봄이 무슨 죄여?
한번 피워보겠다는데

흰 고무신이 먼저 내달린다

선문답식 노트 :
산세 깊고 물소리 수려한 절간 앞에서 호들갑이 한창인 내게, 스님이 하시는 말씀!
“나는 청담동이 좋더라.”
--- 「환장할 봄날」

여름밤 다락방에서 듣는 빗소리
창문을 여니
비가 와락 안긴다

얼마나 헤매었는지
차다

선문답식 노트 :
무문관無門關에서.
--- 「여름비」

결혼은 했냐고 묻는다
고개를 끄덕이니 자식은 있느냐 묻는다
딸 아들 두었다고 하니 맥빠진 손끝으로 볼펜을 돌린다

남편직업을 묻는다
은행에 다닌다고 하자 그의 볼펜이 바닥에 떨어졌다

라훌라*
가진 것이 많을수록 절실하다는 걸 모른다는 듯
시치미 뚝 떼고 앉은 선승의 고뇌

‘이년을 들여 말어?’

* 장애라는 뜻으로 부처님의 아들 이름이다.

선문답식 노트 :
고덕古德이 이르시되, “흐름을 따라 성性을 알면 기쁨도 없고 또한 근심도 없다.” 하시었다.
--- 「선방에 들이기 전」

꽃 같은 나이에
선방에 앉아 있으려니
등 뒤에서 누가 바닥을 톡톡 친다
-차 한잔하러 오시게
졸다가 놀라 얼른 스님의 뒤를 따르니
-내가 요즘 통 잠을 못 이루는데, 자는 비결이 뭔가
-그냥 앉아 있었을 뿐인데요?
-그냥 앉아 있었다고?

찻잎이 웃는다

선문답식 노트 :
주신 엽서에 “밖으로 모든 연緣을 쉬고 안 마음이 헐떡임이 없어야 가可히 써 도道에 든다고 하심이여, 이는 방편문方便門이라.” 하셨느니라.
--- 「비결」

아픈 기색도 없이

대추나무가 마지막 숨 거둘 때

오후 3시가 막 지났다

햇살이 박살이 나고

바람도 따라 정定에 들었다

그 후 나는

그네에 앉으면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

선문답식 노트 :
“어떤 것이 조사의 뜻입니까?” 물으니 “뜰 앞에 잣나무庭前柏樹子니라.”하셨거늘.

--- 「그네」

출판사 리뷰

이정현의 시집을 읽는 독자들은 고요와 안식, 그리고 평화를 느낄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성급하게 대답과 결론과 해결을 원하는가. 우리는 얼마나 모든 것의 자명함과 명쾌함을 갈구하는가. 우리의 피로는 원칙적으로 대답이 없는 공간에서 성급한 대답을 기대하고 찾는 행위에서 축적된다. 우리는 화끈하고 명쾌한 길을 원하며, 불분명함, 대답 없음 혹은 대답할 수 없음의 희미한 상태를 견디지 못한다. 우리가 이렇게 성급하고 천박한 진리-경쟁의 공장에서 숨을 헐떡이며 확실한 성과물을 향해 돌진할 때, 이정현은 그런 기계적이고 야만적인 행위들을 “하지 않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아무도 없는 숲속 오두막 조그만 창에 그림처럼 가득한 초록 나뭇잎들, 목적도 성취도 없이 흘러가는 강물, 겨우내 키우고 키워 더 이상 견딜 수 없이 커진 꽃망울을 터뜨려 봄을 알리는 목련,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항상 처음 같은 풍경으로 흘러가는 구름, 이런 것들은 해명해야 할 진실도, 끝내 구해내야만 할 명쾌한 해답도 가지고 있지 않다. 이런 것들은 인간보다 먼저 무명, 무념, 무상, 무위의 상태에 가 있으며, 차지도 넘치지도 않는 ‘존재의 충만’에 도달해 있다. 이정현의 이 시집은 정복과 성취의 담론에 지친 독자들에게 이런 고요와 평화와 안식의 풍경도 있다는 사실을 섬광처럼 보여준다. 이 시집을 읽다 보면 독자들은 때 절은 옷을 벗고 맑고 푸른 숲속에서 영혼의 삼림욕을 하고 있는 자신을 느낄 것이다. 평화는 거기에서 온다.

꽃 같은 나이에
선방에 앉아 있으려니
등 뒤에서 누가 바닥을 톡톡 친다
-차 한잔하러 오시게
졸다가 놀라 얼른 스님의 뒤를 따르니
-내가 요즘 통 잠을 못 이루는데, 자는 비결이 뭔가
-그냥 앉아 있었을 뿐인데요?
-그냥 앉아 있었다고?

찻잎이 웃는다.

선문답식 노트

주신 엽서에 “밖으로 모든 연緣을 쉬고 안 마음이 헐떡임이 없어야 가可히 써 도道에 든다 하심이여, 이는 방편문方便門이라” 하셨느니라.
―「비결」 전문

이 시집 모든 시의 끝에는 위에서처럼 “선문답식 노트”가 달려 있다. 이것은 일종의 ‘시작 노트’라고 할 수도 있는데, 일반적인 시작 노트와 달리 본문과 화학 반응을 일으키며 본문의 영역을 더욱 확장한다. 이런 형식은 중국 남송대의 선승 무문혜개가 지은 (선 사상의 고전이라 할) 『무문관無門關』의 구조와 유사하다. 『무문관』은 총 48칙則의 공안을 싣고 있는데, 각 칙의 본문이라 할 “고칙”은 “무문의 말”과 “무문의 송”으로 이어지며, 말미엔 항상 “군소리”라는 형식이 따라붙는다. 그야말로 선문답인 고칙의 의미는 말과 (게)송을 거쳐 군소리에 이르면서 더욱 분명해지는데, 이 시집의 “선문답식 노트”는 바로 그 “군소리”의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시의 바깥이 아니라 안에 있다. 말하자면 이정현의 선시에서 “선문답식 노트”는 시의 일부이지 시의 설명이 아니다. 위의 작품은 짐짓 가벼운 위트를 동원하며 ‘도에 이르는 길’의 핵심을 보여준다. “꽃 같은 나이”의 화자는 선방에서 도를 가르치는 선승에게 가르침을 받기는커녕 깨우침을 준다. 잠을 잘 자는 비결이 뭐냐는 선승의 질문에 화자는 “그냥 앉아 있었다”고 말한다. 화자는 역설적이게도 깨우침의 열성조차 버리고 “졸다가” 깨우침의 경지에 이른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이 시의 “선문답식 노트”에 그 답이 있다. 집착을 버렸을 때 “밖으로 모든 연緣”의 쉼이 오고, “안 마음이 헐떡임이 없어야” 도에 든다.

시인의 말

“시는 선禪이 될 수 있어도 선은 시가 될 수 없다” 하시더니

선시禪詩 50편만 엮으라던, 시작 노트도 붙이라던
방산芳山 박제천 선생님께 이 시집을 바칩니다.

2024년 봄
이정현

추천평

점點 하나 제대로 찍으면 출발에서 도착까지의 고샅길이 환할 것이다. 이정현 시인은 “나를 위한 면적”으로서의 “점”하나 찍으려는 구도에 나섰으리라. “나/나/나/점/점/점”으로 일갈하는 호기로움이 시편들마다 번져 있다.
지난여름 홍천 수타사 근방 풀밭에서 혜능 선사의 오도송 ‘한 물건도 없는데 어디에 티끌이 묻겠는가’를 염송하던 모습에서 사람 좋아 보이는 그의 웃음 속 심지를 슬쩍 엿본 적이 있다.
그래도 선시집을 묶다니, 이런 큰 사건을 어찌 감당하려나 걱정이 앞섰다. 그러나 시편들을 읽으며 선禪 보다 시詩가 앞서 있음을 확인하며 안도했다. 더구나 「여름비」에 이르러서는 시 스스로 현현하는 한 경계의 올곧음과 만나 정신을 가다듬는 계기를 톡톡히 누렸다. “여름밤 다락방에서 듣는 빗소리/ 창문을 여니/ 비가 와락 안긴다// 얼마나 헤매었는지/ 차다”- 와락 안기는 비와 차가운 감촉의 얽힘은 곧 자타불이自他不二의 실상이겠다.
시인의 시편들마다 무無로 농축된 일 점의 긴장이 팽팽하니 퉁기는 이들의 손끝이 오래 아릴 것이다. - 한영옥 (시인)
요즘은 너무나 희귀한 적요와 고요와 조용한 웃음의 시집으로 깨달음의 순간에도 위트와 유머를 잃지 않는다. 시인의 웃음은 주체가 과도한 진지함에 빠져 사물을 경직화하는 것을 막는다. 시인은 멍청한 진지함보다 경쾌한 깨달음을 원한다. - 오민석 (시인, 문학평론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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