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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05
제1부 지울 수 없는 서사 선택 13 선태 14 차중이 아재 16 홍식이 아재 18 49세 19 똥장군 20 점순이 누님 21 강남골 댁 22 석수쟁이 23 목깽이 24 젖가슴에 대한 통과의례 26 스웨터와 모자 27 코피쟁이 28 단감나무의 마음 30 찍히다 32 선달네 까끔 34 트럭 바큇자국 35 월치재 대학 36 물방내 39 제2부 집과 사람 집과 사람 43 소 눈 둠벙 44 지붕 46 질구루마 47 다리 밑에서 주워온 아이 48 물고기 비 50 보리 밥티 52 탐진만 바닷가 53 어린 가수 54 배호·3 56 자화상 57 달방 58 강변 살다 59 아카시, 아가씨 60 폐촌 61 제3부 고조곤히 서러운 마을 이름들 저 불빛 65 고조곤히 서러운 마을 이름들 66 곰소 68 벗집 70 맹골 곽도 72 천지간의 둥근 울음 73 유달산 76 목포에 살다 78 아리랑 고개 80 오거리 식당 81 정병조 82 동거차도 83 조도댁 85 구족 마을에서 87 제4부 남도밥상 남도 밥상 91 푸조나무 어르신 92 덕자 병어 93 서대 94 독옷 95 낚시꾼 시인 96 잘피숲 98 무지갯등 99 음악쌀 100 묵은지論 102 세월도 녹이 슨다 103 돈데보이·2024 104 바로 이게 시 107 오동도 동백꽃 108 골초 110 금연記 112 평상 114 늙어가면서 115 해설_ 수긍과 긍정의 아름다운 서사/이지엽 116 |
金善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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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마을에 같은 이름을 가진 아이가 살았다. 같은 나이에다 동성동본에 항렬도 같았다. 생김새와 성격만 다를 뿐이었다. 우리는 항상 서로를 의식하며 살았다. 딱히 싫어하거나 미워할 이유도 없는데, 내가 그를 부를 때 나를 부르는 것 같아 싫었다. 그렇게 은근한 거리에서 늘 서먹했다.
초등학교 시절 같은 반이 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곤혹스러운 건 출석을 부를 때였다. 동시에 두 명의 선태가 대답했다. 결국 선생님은 궁여지책을 내놓았는데, 내가 큰 선태 그가 작은 선태였다. 그땐 내가 좀 더 키가 컸던 모양이다. 멀리 떨어진 산기슭에 살았던 그는 집안 형편이 어려워 진학을 포기했다. 그런데 세월이 바람개비처럼 돌아간 어느 날이던가. 일찍부터 가출하여 세상을 떠돌던 그가 불행히도 불혹이 되기 전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누군가로부터 전해 들었다. 그때 나는 왠지 슬픔보다 미안함 같은 것이 밀물져왔다. 살아생전 그를 멀리했던 양심의 가책 때문이었을까. 아무튼, 지금도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를 때마다, 그가 어디서 불쑥 튀어나올 것 같은 걸 보면, 우리가 서로의 아바타였는지도 모르겠다. 같은 이름으로 살았지만 일찍 유명을 달리한 그를 위해, 내가 그 몫까지 살아줘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새삼 마음을 다잡곤 한다. ---「선태」중에서 들판 한가운데 크고 동그란 둠벙이 하나 있었지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고 물이 그득해서 농사짓기에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수원이었지 들짐승들도 이곳에서 목을 축였지 어느 날 논일을 하던 소가 그만 풍덩 빠져버렸어 주인이 쉬는 사이 물을 마시다 그만 미끄러진 거지 기어 나오려고 사력을 다해 허우적댔으나 경사가 가팔라 깊은 둠벙 속으로 가라앉고 말았지 뒤늦게야 달려온 마을 사람들이 죽은 소를 건져 올려 둠벙 가에서 해체하여 집집마다 고기를 나누었지 덕분에 다들 귀한 소고기를 맛볼 수 있어 좋았지만 일만 하다 죽어 육 보시까지 한 소를 불쌍히 여겼지 그런데 그 뒤로 이상한 일이 벌어졌어 밤마다 둠벙에서 움머 소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거야 그 소리가 하도 슬퍼서 다들 잠을 이룰 수 없었어 둠벙 가에서 고사를 지낸 후에야 겨우 그쳤지 그때부터 마을 사람들은 그 둠벙의 이름을 빠져 죽은 소의 눈망울을 닮았다 하여 소 눈 둠벙이라고 불렀는데 지금도 들판 한가운데서 커다란 눈을 끔벅거리며 눈물 글썽이고 있다지 아마. ---「소 눈 둠벙」중에서 흑산, 하면 마음부터 미리 캄캄해지고 입안 가득 비린내가 풍기지만 막상 당도하여 상라봉 열두 구비 넘어 서쪽 해안을 따라가다 보면 마음은 자진 유배를 떠나온 양 고조곤히 서럽더라. 꼬막 껍데기마냥 엎어진 어촌마을들 보면 아름다워 절로 눈물 나더라. 그런데, 이 꾀죄죄한 마을들이 기어이 내 발길을 막걸리 몇 순배로 가로막는 이유는 비록 지금은 한자어에 자리를 내주었으되 주민들 입가에 구수하게 살아 있는 토박이 이름들 때문. 마리는 ‘모듸미’, 비리는 ‘전듸미’, 곤촌은 ‘곤듸’, 심리는 ‘지푸미’ 가파른 한다령 너머 동쪽으로 꺾어 들면 소사리는 ‘잔모래미’, 천촌은 ‘여티미’, 청촌은 ‘청재미’ 또 남쪽 옴팍한 바닷가엔 정약전이 유배의 시름을 풀었던 사리는 ‘모래미’ ‘―미’란 해안선이 육지 쪽으로 움푹 파고들어 후미진 곳. 이 토박이 마을 이름들의 곤곤한 내력을 하나씩 되짚노라면 세월아 네월아 어쩔 수 없이 또 하룻밤을 묵고야 마느니. 아, 아름다운 것들은 죄다 멀리 있구나 들킬세라 꼭꼭 숨어있구나. ---「고조곤히 서러운 마을 이름들」중에서 마을이 생길 때 심었다는 오백 살 묵은 푸조나무엔 직박구리들이 떼로 깃들어 산다. 다른 나무로 이주하지 않고 대대손손 집을 짓고 산다. 마을 사람들은 푸조나무를 어르신이라고 부른다. 푸조나무 어르신은 마을의 살아있는 역사요 수호신이다. 여름이면 무성한 그늘을 드리워 사람들을 쉬게 하시고 가을이면 까만 푸조 열매를 새들에게 나눠주신다. 숱한 태풍을 이겨내며 지금껏 꿋꿋이 마을을 지켜오고 계신다. 이 핵가족 시대에 마을 사람들과 직박구리들이 대가족을 이루며 사는 것도 모두가 푸조나무 어르신의 음덕이다. 아무리 첨단 문명의 시대라지만 앞으로도 몇백 년은 너끈히 정정하실 것이다. ---「푸조나무 어르신」중에서 늦가을과 초겨울 사이의 이 허전한 잿빛 공간이 나를 슬프게 한다. 유난히 추위를 타면서도 텅 빈 벌판에서 첫눈을 기다리며 서 있는 나무의 모습이 내 젊은 날의 초상이 아니었던가. 아득한 곳으로 목적도 없이 여행을 떠나와 잠시 쉬면서 들른 이 간이역의 이름은 무엇인가. 망각의 심연 저편으로 힘껏 돌팔매질하면 풍덩 깨어나는 지난날의 물빛 기억들. 내 스산한 얼굴에 희끗희끗 마른버짐이 피면 가을이 오던 아름다운 허기의 시절은 어디로 갔는가. 이 쓸쓸하고 적막한 계절에 다시 그곳으로 가고 싶어 환상처럼 어깨에 날개가 돋는다. 내 젊은 날의 꿈은 탈출 연습. 자유라는 이름의 부단한 날갯짓. 날마다 공복의 새벽 거리를 빠져나와 황량한 벌판을 헤매다 지쳐 돌아오는 바람 같은 한 사내의 어깨를 생각한다. 비틀거리며 돌아오는 사내의 발목을 휘감던 낯익은 골목의 어둠을 생각한다. 결코 잠들 수 없어 밤새 피워 물던 담배와 그 연기의 희고 슬픈 잔영들. 내 망각의 강 저편에 길고 뿌옇게 누워있는 안개처럼 걷히질 않는다. 이순의 간이역을 통과하고 있는 나의 여정은 이제 어디로 이어질 것인가. 어디까지 이어지다 고단한 날개를 접고 오래 쉴 것인가. ---「늙어가면서」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