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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1부 새벽의 보법 과녁 12 새벽의 보법 13 붕어 14 낡은 찻잔 16 돌멩이의 기억 18 별 19 나뭇잎 지도 20 무화과 21 머슴나무 22 풀 24 패각의 집 26 별상 28 무궁화 30 톱 32 2부 옹이구멍 옹이구멍 34 탱자꽃 기억 36 골무 37 징검돌 38 꽃의 기억 40 냄비받침 42 주름 43 사과 44 나비 45 골목 46 푸른 죄 48 목련 50 매화나무 51 3부 아내의 잠 책 54 변기 55 아내의 잠 56 산행 58 산그림자 60 바람잡이 62 맹감나무 64 나비 집 65 바람도 늙는다 66 초승달 68 그녀 70 여백 72 산벚 한 그루 73 4부 붉은 애첩 환한 귀틀집 76 꽃상여 78 단문 79 붉은 애첩 80 깜박 82 민들레 혼魂 84 아버지 86 연애의 유효기간 87 세미누드 88 연 89 주름꽃 90 가족사진 91 나로호 92 해설 기억의 힘으로 가닿는 지극한 사랑의 미학 |유성호(문학평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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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발자국 소리 듣는다
언제나 4시보다 한 발 늦게 왔다 어둠에 시선을 잡아먹힌 지금 더 선명하게 들린다 쿵쿵 나를 굴리는 심장처럼 지구를 굴리며 온다 그 회전축에 시침과 분침, 초침이 빗살처럼 돈다 분쇄된 새벽 4시가 어둠에 터널을 뚫는다 빛가루 날리는 산등성이 나무들도 검붉다 4시가 사라진 자리에 5시가 한 포기씩 빛을 심는다 밤새 어둠이 포장된 길 위로 자동차가 환한 빛을 뿌리며 지나간다 6시가 풍선처럼 부풀다 툭 터진다 어둠이 와르르 무너진다 달동네 깨진 유리창 틈새로 스며든 빛이, 드르륵 아침을 연다 ---「새벽의 보법」 중에서 꼬막껍질 쓴 집들이 바람을 견디고 있다 저녁이 깊어지면 굽은 등 조갯살처럼 박고 패각의 어둠 속을 파고들었다 한 생을 주름으로 새기면서도 노비문서 같은 논밭 버리지 못하고 피땀 흘렸지만 억새꽃 계절에도 들판은 허기진 그믐달만 내걸었다 그래도 이 땅은 지켜야 한다며 서릿발 틈에라도 씨 뿌려 봄을 잉태시키겠다고 삽날 아래 웅크린 떡잎의 시간 북돋우고 있다 ---「패각의 집」 중에서 오랜 지병이 간에 옹이로 박혔다는 김 노인 그것 돌아 빠지면 저승길 환하겠다며 천진스레 웃는다 바람이 식구처럼 들락거리던 이모네 판잣집 옹이 빠진 구멍으로 밖을 보면 동구 밖 훤히 보였듯 저승길도 환할까 간밤 또 암흑의 통증을 견딘 그는 슬리퍼 끌 힘조차 놓았는지 방문 열어 앞산 산벚꽃 눈부신 하강의 시간을 보고 있다 꽃이 열매에게 자리를 내어주듯이 그도 세상 문 잠그려는지 콜록콜록 생을 놓고 있다 옹이구멍 밖으로 ---「옹이구멍」 중에서 늦은 귀가를 기다리다 이불 돌돌 말아 고치 집 지은 그녀를 본다 머리쪽에 숨구멍 하나 나 있다 처마 낮은 방에 엎드려 등이 가렵다고 피 나도록 긁으며 삶은 쓴약 같다던 그녀가 숨을 드르렁 내쉬며 번데기처럼 저승잠을 잔다 한참을 바라보다 혹 아내의 집에 찬바람이 스밀까 이불을 당겨 덮어주다 화들짝 놀라 고치 속 그녀를 깨운다 한 올 풀려나온 실오라기가 당겨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녀와 나 사이에 이렇게 긴 경계가 있었던가 세상과 싸우고 나와 싸우느라 손에 단단한 각질을 새긴 그녀는 깨워도 끔적하지 않는다 우화등선을 꿈꾸는지 ---「아내의 잠」 중에서 친구 집에 갔다가 시집이 냄비받침으로 쓰이는 걸 보고 의절했다는 모 시인의 말을 듣다 시상 하나 얻은 난 자리가 파하기만 즐겼다 냄비, 상징이 뭐던가 그의 받침이 된다는 것 얹는다는 것 그의 모두를 받아들인다는 것 얼마나 오랫동안 꿈꾸던 환상인가 거칠고 빳빳하기로 소문난 내 시집 한 권 그녀에게 선물하고 싶다 뜨거운 냄비 올려주고 싶다 까칠한 시 한 편 식탁에서 잘근잘근 씹히다 가시로라도 발라진다면 냄비받침이 된들 바닥이 된들 뭐 그리 서운할까 모두 그가 품은 몸인 걸 아직 끝나지 않은 술자리 술잔은 빙빙 돌고 머리에선 시 한 편 빙빙 돌고 ---「냄비받침」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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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시는 마음을 찾아 떠나는 긴 여행이다 벌써 30년이 지났다 얼마나 더 가야 할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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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준의 새로운 시집 『기억의 그늘을 품다』는 ‘시간’이라는 창을 통해 아름다운 인생론적 축도를 그려낸 미학적 성과로서 돌올하게 다가온다. 서정시의 보편적 정서인 그리움을 주조로 하여 많은 이들을 정서적으로 위안하는 서정의 도록을 펼친 셈이다. 우리는 그 안에서 고전적인 서정의 원형을 어렵지 않게 발견하면서 시인 스스로의 고백과 증언에 집중하게 된다. 이번 시집은 시인이 자신만의 나직한 목소리를 통해 사물의 다양한 형상과 그것을 감싸고 있는 시간의 질서를 노래한 언어적 집성으로 다가오고 있다.
그의 시는 남다른 기억의 힘으로 지난날을 재현하면서 그 시간을 항구적으로 간직하려는 꿈의 세계에서 발원하고 완성되는 언어예술이라 할 것이다. 한 영혼의 온전한 기억을 기록해온 양식으로서의 서정시가 독자적 빛을 발하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유대준의 시는 합리성에 의해 일사불란하게 구축되는 선험적 질서가 아니라 이성이 그어놓은 표지標識들을 재구성하면서 상상해낸 상징적 질서에 의해 스스로를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 유성호 (문학평론가) |